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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북강녕 Jun 24. 2021

아무튼, 왕가위 #0

#인트로


오래 전 어느 날. 여고 동창 S와 나는, 야자에서 빠져나와 떡볶이를 사 먹고 심야영화를 보던 일상을 벗어나, 갑자기 심각하게 앞날을 의논하기로 했다.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 무슨 전공을 택할 것인가. 일단 같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데 우리 의견은 일치했다. "우정이 우선이지, 암." S와 나의 뜻은 같았다. 전공에 대해서도 그 자리에서 즉시 고민과 결정을 마쳤는데, 셈에 밝고 돈 벌기를 원했던 S는 경영학과를, 한문을 잘하던 나는 중어중문학과를 가기로 정했다. 누가 그 대학 그 학과를 보내준다고 보증한 것도 아닌데 엄청 뿌듯했다. "우리 미래 정도는 우리가 정해야지, 암." S와 나는 뜻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S는 장국영의 열성 팬이었다. 그즈음 장국영이 내한하여 토토즐을 비롯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했었는데, S는 장국영의 사진 위에 Leslie라는 영어 이름이 코팅된 책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방에는 브로마이드 사진도 붙여져 있었다. 내가 중어중문학과에 가면 우리는 같이 홍콩에도 가고, 연예인들도 만나고, 홍콩 영화나 노래도 번역해 주고...... 생각은 신나게 달려갔다. 당시 사회주의의 양대 산맥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과 더불어 모두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중국은 개혁 개방을 이끈 등소평 시대 이후 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한 고르바쵸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공산당을 해체하였다. 전통의 강자 영어영문학과의 뒤를 잇던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의 아성을,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가 두드리던 때였다. 내가 중어중문학과를 가겠다고 하자, 부모님도 큰 반대 없이 내 결정을 지지하셨다. 92년 3월, 대학에 입학하여 받아 든 교재는 대만에서 만든 '번체자' 어학서였지만, 8월 한중 수교 및 대만 단교를 거친 후 2학기부터는 갑자기 중국에서 만든 '간체자' 어학서로 교재가 바뀌었다.


S와 함께 꿈꾸던 대학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절친이었음이 무색하게, 여고 졸업 후 연락도 끊겼고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도 않았다. 전공만 그대로 살렸다. 4년간 중어중문학을 공부하고, 25년간 중국어를 쓰며 일했다. 한국과 중국을 숱하게 오가며, 홍콩을 포함한 중국 전역, 타이완과 몽골을 중심으로 영업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연관성도 없고 생계에 도움도 되지 않는 자격증들을 움켜쥐고 있지만, 내세울 만한 자격증을 하나만 쓰라면 한중 관광통역안내사를 꼽을 것 같다. 중어중문학과를 택한 것은 S의 책받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끈을 이어온 것은 홍콩영화다. 번체자에서 간체자로 교재가 바뀌고, 타이베이 시내에서 우육면을 먹는 장면을 배우다, 베이징에서 천안문을 찾아가는 대화로 전공언어 수업의 소재는 바뀌었지만, 관심사는 홍콩영화로 굳어진 이후 지속되었다. 중심에는 단연 왕가위가 있었다. “아뵤~”를 외치며 콧등 한번 툭 치고 날아오르던 이소룡의 시대는 강렬하지만 짧았다. 성룡과 원표, 홍금보로 이어진 코믹 쿵후 액션은 덕후를 낳기엔 독보적 매력이 덜했다. 주윤발, 장국영에 이르러 제대로 터진 홍콩영화의 매력을,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왕가위 감독이다. 실력과 스타성을 모두 갖춘 배우 군단을 이끌고도 저급 코믹물만 양산하던 홍콩 영화계의 밀키스이자 투유 초콜릿! 20년 동안 단 열 편의 장편영화만 연출한 밀당의 제왕! 그의 영화와 함께 내 청춘도 텐션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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