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alf Century 콘서트와 함께 한 나의 사랑 창파, 장학우
넓은 중국 대륙에서 8개월 동안 82명의 지명수배자를 검거한 사람은? 바로 홍콩 4대 천왕 중 하나인 가수 張學友, Jacky Cheung이다. 경찰도 아닌 가수가 어떻게 100명 가까운 지명수배자를 검거했을까? 한날 한곳에 지명수배자 한정 무료입장 음악회라도 열었던 것일까?
張學友는 2018년 4월에서 12월까지 중국 전역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다. 매번, 매회 수만 명의 관객이 콘서트장을 찾았는데, 그를 직접 보러 온 팬들 가운데 지명수배자가 무려 82명이나 있었던 것. 콘서트장 입장 시 공안당국의 안면인식 기술로 지명수배자를 잡았다는 것도 놀라운 소식이지만, 50대 후반의 가수, 張學友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엄청난 티켓 파워를 아직 갖고 있다는 점도 놀라울 따름이다. 나 역시 2010년 어느 날 베이징 인민 체육관에서, 50세를 맞은 그의 Half Century 중화권 순회 콘서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홍콩에서 온 팬들과 함께 소리칠 때는 "혹 야우! 응오 오이 네이!"라고 광둥어를 외쳤고, 베이징 팬들과 함께 할 때는 "쉐 여우! 워 아이 니!"라고 표준어를 내질렀다. 1997년에 홍콩 체육관에서 그가 기획, 연출, 무대감독, 주연, 기타 등등을 맡은 홍콩 최대 규모 창작 뮤지컬 『설랑호』 초연을 직관할 때도 마찬가지로 목이 터지게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안면인식 기술이 그렇게 뛰어난 것이야 몰랐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중 집객시설에 공안이 잔뜩 배치되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팬들은 그 장소를 찾았을 것 같다.
장국영, 왕조현의 브로마이드 책받침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빳빳하게 코팅된 기성 책받침을 문방구에서 사기도 했지만, 귀하게 구한 사진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레어템을 직접 가져가 코팅을 하기도 했다. 잘못해서 공기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두고두고 속이 상했다. 예쁘게 코팅된 것은 공책 사이에 끼우고 평평한 기분을 만끽하며 꾹꾹 눌러써 필기를 하기도 했다. 책받침은 대개 공책보다 사이즈가 커서 옆으로 삐져나왔는데, 친구들과 서로 바꾸어 보며 스타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의 것들도 인기였다. 『맥가이버』에 출연한 리처드 딘 앤더슨의 것도 있었고, 『블루문 특급』의 젊은 브루스 윌리스도 있었다. 책받침 외에도 지갑에 끼울 포토카드나 책갈피도 있었지만, 인쇄가 조악해 쌍꺼풀이 겹쳐졌거나, 비닐이나 아크릴 포장이 뜯어지기 일쑤인 질 낮은 굿즈였다. 그래도 좋았다. 원할 때마다 원하는 영상을 인터넷 검색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라, 좋아하는 스타가 출연한 영화가 국내 개봉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던 시절이다.
알란 탐(1950년생), 장국영(1956년생)의 인기가 살짝 시들해지던 1990년대 초반 그즈음, 꾸며내는 대중문화의 당시 끝판왕답게, 연예계와 미인대회, 어둠의 세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기적 조직답게, 1992년 미스 홍콩 선발대회의 축하 공연 무대에 모인 네 명의 남성 홍콩 가수는 '四大天王'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되며 집단 스타성을 뿜어냈다. 카리스마 넘치는 유덕화(1961년생), 꽃미모 곽부성(1965년생), 훤칠한 엘리트 여명(1966년생), 그리고 나의 歌神 장학우(1961년생)가 있었다. 이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학교 앞 문방구 벽, 소녀들의 책가방 속, 교실 서랍 안에 머물렀다. 사대천왕의 웃는 모습, 노래하는 모습은 언제나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았다.
장학우는 국내에서 인기가 없었다. 일단 돋보이는 외모가 아니었다. 홍콩 대중문화계는 스타를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우상파, 즉 아이돌이고, 또 하나는 말 그대로 실력파였다. 장학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실력파였고, 이는 노래에서나 연기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음악에서의 '실력파'라고 하면, 몇 옥타브 정도는 라이브로 넘나드는 싱어송라이터에, 악기도 여러 종류 다루어야 이름을 올리지 않을까 싶다. 요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신인들은 주간 단위로 새 곡을 쓰거나 편곡, 안무를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일을 벌인다. 하지만 당시 홍콩의 음반 수준을 보면, 절반이 일본 가수의 노래나 미국 팝의 번안곡이요, 나머지 절반 중 절반은 이미 냈던 광둥어 음반의 표준어 재발매 수준이었고, 뮤직비디오는 입이 맞는 립싱크, 음악쇼는 입이 안 맞는 립싱크 정도였다. 연예 프로그램에서 실력파 가수를 인터뷰할 때 한다는 질문이, "노래할 때 가사를 잊지 않는 비법은 무엇인가요?" "그럼 xxx씨는 무대에서 가사를 잊은 적이 정말 없으시단 말입니까? 참으로 대단합니다!" 수준이었다. 실제로 대다수의 가수가 음악쇼 녹화 또는 실황 중계 중 자기 노래의 가사를 잊기 일쑤여서 웃음으로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고, 모국어로 홍콩어밖에 구사하지 못함에도 외국어처럼 배운 표준어 음반으로 중국 대륙을 공략하느라, 표준어 음반의 노래는 발음조차 정확하지 못했다. 장학우는 노래의 신, 歌神으로 불리는 수준이었는데 안정된 음색으로 정말 노래를 잘했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 나는 그가 좋았다.
연기도 마찬가지. 잘생긴 홍콩 배우는 연기를 연습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시나리오는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고 대본 연습을 하지도 않은 채 촬영에 투입되었다. 언어적 문제 때문에 후에 더빙을 입히는 경우도 흔했다. 캐세이퍼시픽에서 일하다 1984년 홍콩 18구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우승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인 장학우는, 옆집 오빠 같은 외모로 노래도 연기도 열심히 했다. 그의 첫 영화는 홍금보의 『대나팔』, 1986년작이다. 1987년, 왕가위의 『몽콕하문』에 출연하여 홍콩 금상장 영화제 최우수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력을 명백히 입증한다. 몽콕은 빈민가다. 몽콕하문은 몽콕 카르멘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열혈남아』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는데, 정말 피가 들끓는, 충동적이고 어이없게 지질한 과잉 캐릭터 창파로, 조연임에도 확실한 발암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학 졸업반, 취업준비생 시절, 장학우처럼 나도 캐세이퍼시픽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홍콩 상하이뱅크에도 넣었다. 한쪽은 외국인 회사라 한국인 지사 직원들은 계약직이 된다고 했다. 한쪽은 서류 통과 후 지필시험에 계산기를 지참하라고 했다. 비정규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수학도 자신이 없었다. 다른 회사로 입사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내가 가입하고 있던 대한민국 장학우 공식 팬클럽에서는 -어떤 차원에서 공식인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앨범 판권을 가진 한국 폴리그램에서 인정했던, 정도로 해석된다- 장학우가 기획, 연출, 무대감독, 주연, 기타 등등을 맡은 홍콩 최대 규모 창작 뮤지컬 『설랑호』 초연을 직관하기 위해 홍콩 여행팀을 모집한다고 했다. 이들은 싱가포르나 대만 등에서 열리는 순회 콘서트에도 참가해본 경력자 언니들이었다. 저렴한 단체 숙소 확보, 공연 전 리허설 장소와 시간 정보, 종료 후 팬클럽과의 뒤풀이 만남 가능 여부 등 일정을 검토하는데 기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이어서, 쉽게 쉽게 단체를 모집했다. 가까운 홍콩이기는 해도 해외여행인 데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숙식을 해결한다 쳐도 항공료와 뮤지컬 표값의 부담이 크던 터라, 팬클럽 멤버들 중 20-40대의 청장년층 중심으로 멤버가 구성되었다. 최장기로는 15일 가량을 머무르며 매일 똑같은 공연을 1층과 2층, 앞자리와 뒷자리에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두 손 두 발 다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차마 극성팬으로 공연을 보러 해외에 간다는 이유로 집에서 허락을 받을 자신이 없어, 입사 동기 두 명을 꼬셔 같은 일정으로 2박 3일 홍콩 여행을 짰고, 저렴한 항공사를 이용하는 팬클럽 단체와 달리 국적항공사를 탔으며, 낮에는 동기들과 홍콩 관광을 즐기다 저녁에만 뮤지컬 2회를 관람하는 일정으로 스스로 타협을 했다. 팬클럽 언니 동생들은 나에게, 덕질이면 덕질 -당시에는 덕질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다른 표현을 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관광이면 관광, 하나를 택하는 편이 일정에 집중할 수 있다고 점잖게 조언하였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덕질의 떳떳함을 내세우지 못했던 때였다.
극성팬 여행단의 하루는 단순했다. 오전에는 잠을 보충하고 점심 무렵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 공연 장소로 이동한다. 리허설에 입장할 스타를 보기 위해 공연 장소인 대형 체육관 앞 야외에서 1-2시간을 대기한다. 지금과 달리 연예기획사에서 팬클럽을 철저히 관리하며 마케팅 파트너로 활용하던 시절은 아니라, 리허설 시간이나 밴 하차 장소 등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상당한 시간에 걸쳐 상당한 노력을 들인 편이다. 공연이 저녁 7시 시작이면 리허설은 대략 4시 넘어 시작되고, 참가자들은 리허설과 저녁 식사 후 정식 공연에 임하는 일정이 대부분이었다. 엑스트라와 조연들이 먼저 도착하는 편이었지만 주인공 장학우가 4시 이전에 올 가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3시 정도부터 홍콩의 뙤약볕에서 대기를 한다. 대개는 어제 공연의 감동,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관찰한 스타의 표정과 몸짓에 대해 복기와 공감을 끝없이 나누다, 아는 연예인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부터 긴장 모드로 변신한다.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장학우뿐 아니라 다른 연예인들의 팬클럽 관계자들이나 기자단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인기 없는 연예지 기자의 인터뷰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왔음을 자랑스레 알리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국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홍보해,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어쨌든 스타에게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드디어 그가 나타나면 광란의 함성과 선물을 안긴다. 다른 스타의 팬클럽보다 더 많은 해외 팬이 와서 더 큰 함성과 더 많은 선물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래서 내 스타의 사기를 올리고 기쁜 마음으로 공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한다. 일부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최선이다. 스타를 들여보낸 후에는, 그가 리허설 연습을 하는 동안 저녁을 때우고 공연장에 입장한다. 여러 차례 관람하여 내용과 노래를 다 알기 때문에 적절한 함성과 싱얼롱을 병행하며 관람한다. 공연 종료 후 다시 체육관 밖에서 대기하고 스타가 나올 때 감사와 작별의 소리를 지른다. 숙소로 돌아와 사진과 감상을 공유하다 새벽에 잠든다.
나는 다른 극성팬들과 달리 개별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에, 일정 내내 저런 날들을 보내지는 않았다. 빅토리아 피크에 가서 트램도 타고 해양공원에 가서 놀이기구도 탔으며 딤섬도 먹고 야시장도 갔다. 팬클럽 멤버들이 머무는 침사추이 어딘가, 좁고 지저분한 숙소에 들르기는 했다. 에너지를 소진하여, 더 큰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숙소에서 그들은 거의 내내 잠자고 있었다. 무비자 체류 기간에 걸려 잠깐 마카오에 건너갔다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엄청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후에 다시 이와 같은 여행을 가지는 않았다. 2010년, 내가 주재 근무하던 베이징에 50세를 맞은 장학우가 Half Century 전국 순회 콘서트를 오기 전까지는 그 옛날 홍콩 직관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다시 만난 현장의 아이돌은, (반 세기의 연륜이 묻어났지만) 30대의 목소리를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추억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지금은 연예기획사에서 조직하고 서포트하는 팬클럽이 공식적으로 활동하며, 앨범이나 싱글 출시 전후, 예능을 비롯한 티브이 프로그램 출연 전후, 기타 모든 활동에 있어 일정을 공유하고 협업하여 인기를 만들어간다. 굿즈 마케팅 역시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있어, 동일한 곡이 수록된 앨범이더라도 다른 사진을 선별 삽입하여 시리즈성 소장용으로 구매하게 하거나, 다양한 캐릭터와 함께한 매력적인 디자인의 굿즈를 계획적으로 생산한다. 해외 활동에도 응원단을 조직해 이동시키고 콘서트 좌석 배치나 티켓 블록 등을 세심히 안배한다. 사전 공유되는 항공 이동 일정을 참고하여 같은 항공편, 같은 블록에 탑승하는 하이 레벨 팬층도 존재한다. 배용준 배우가 한참 일본 중년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던 당시, 욘사마가 탑승하는 국적사 일등석이 순간 매진된 일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욘사마가 자리를 잡은 후 매니저 등 함께 움직이는 동반자도 같은 블록에 타게 마련인데, 잠깐 사이에 몇 석 안 되는 일등석이 다 팔려 버린 것. 듣기로는, 당시 욘사마 측에서는 일본 팬클럽에 난감함을 표시하고 협조를 구했고, 욘사마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매니저와 함께 해야 함을 충분히 이해한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좌석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기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좋아하는 스타와 함께 숨 쉴 수 있는 기회도 좋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스타의 편안한 여행과 일정을 배려하는 성숙한 팬 의식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출국 심사 후 공항 라운지 입장 및 휴식까지의 과정을 함께 하고, 스타가 항공기에 오르는 시점, 자신의 항공권은 환불하고 역사열 후 재입국하는 팬들도 있어, 각 항공사가 골치를 앓은 일도 있다. 이들 때문에 발권과 환불 규정도 변경된 기억이 있다. 극성팬의 에피소드는 별나고 엉뚱하다.
지금과 다른 옛날 옛적, 여권 발급과 해외여행 자유화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 홍콩까지 출정하여 똑같은 뮤지컬을 이틀 연속 관람하고 돌아온 극성팬의 여행은 내 젊은날의 이색적인 추억이다. 1997년, 홍콩 반환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