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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북강녕 Jul 06. 2021

아무튼, 왕가위 #2

#2. 모든 이가 사랑에 빠진 꿈속의 연인 - 중경삼림


왕가위의 영화는 두 가지로 나뉜다. 그나마 볼 만한 영화가 『중경삼림』, 타락천사, 열혈남아, 일대종사, 화양연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이고, 보기 힘든 영화가 아비정전, 동사서독, 2046, 해피투게더이다. 볼 만한 영화로 분류했지만 화양연화도 상당히 어렵고 지루한 영화이고, 일대종사는 너무 긴 일대기이다. 보기 힘든 영화로 분류했지만 해피투게더는 지루한 영화가 아니며 슬픈 사랑 이야기이지만, 화면을 보는 데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된다. 말 그대로 매우 힘이 든다. 동사서독은 보는 내내 시험에 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지, 어디까지 기억나는 거지, 저 여자는 아까 나왔던 게 맞는 거지 등등 혼잣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잣말도 하지 않으면 잠이 든다. 아비정전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1987년 영웅본색이 개봉하고 수많은 홍콩 액션 누아르가 터져 나왔는데, 1990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아비정전 역시 장국영과 유덕화가 나오는 액션 영화로 알려졌다. 아비와 수리진이 같이 시계를 보며 너와 내가 함께한 1분 운운하고, 발 없는 새의 고사가 등장하자 분노한 관객들이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 유리문을 깨부수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중경삼림은 다르다. 감성이 날아간다. 내용도 쉽고, 달달한 사랑 얘기가 이 영화는 두 가지로 나뉜다. 임청하 금성무 주연의 전 에피와, 왕정문 양조위 주연의 후 에피다. 전 에피는 철딱서니 금성무가 오글 멘트를 많이 날리기는 해도 임청하가 중심을 잡아 주지만, 후 에피에서는 발랄한 왕정문의 쨍쨍한 발성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살린다. 'California Dreamin'으로 엉덩이를 들썩대다, 'Dreams'로 구름 위를 사뿐히 난다. 영화를 보다 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뮤지컬 고전 『메리 포핀스』 이후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두 곡 모두 Mamas & Papas나 Cranberries의 원곡보다 왕정문의 음성이 영화에 딱이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마약밀매단을 조직하다 인도인들의 배신으로 인해 약을 통째로 털린 금발녀 임청하와, 파인애플 깡통을 좋아하던 여친에게 차여 한 달간 유효기간이 일정한 깡통을 사모으며 사랑의 유효기간을 셈한 경찰관 223 금성무의 이야기다. 비가 올까 봐 레인코트를 입고 해가 날까 봐 선글라스를 끼고 주도면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임청하는 중국 대륙과 대만에서 사용하는 보통어를 쓰지만, 의사소통 가능한 간단한 영어도 구사하며 인도인들을 상대한다. 자주 가는 바의 서양인 사장은 그녀를 원해 같은 금발 가발을 쓴 호스티스와 관계를 갖지만, 마약업에서의 배신으로 인해 임청하의 총에 사살된다. 금성무는 대만에서 왔으므로 보통어를 쓰지만 홍콩어와 일본어에도 능하다. 90년대 우리나라와 달리, 교환원에게 비번을 말하면 전달된 메시지를 읽어주는 홍콩식 삐삐를 활용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배신자에 대한 마지막 살인을 앞둔 임청하는, 여친이 돌아올 맘속의 기한 한 달이 지난 자신의 생일날 새 사랑을 찾아나선 금성무와 바에서 만나 만취하여 호텔에서 잠든다. 실연의 눈물 대신 온몸의 수분을 쏟아 버리기 위해 조깅을 나서던 금성무는 임청하의 지친 하이힐을 벗겨 준다. 702호의 임청하는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두 번째 에피소드)


스튜어디스를 유혹해 한시적 연애를 하다 차인 경찰관 633 양조위와, 사촌오빠의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하지만 캘리포니아 여행을 꿈꾸는 자유 영혼 왕정문의 이야기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전 여친의 체취 외 모든 것에 무심한 양조위는, 깊이 없는 관계 후 집 열쇠를 돌려준 그녀의 편지를 읽지 않은 채 패스트푸드점에 맡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왕정문은 양조위의 집에 찾아가 청소부터 음악, 옷장 정리와 인테리어까지 자기 취향대로 그(의 집)를 리스타일링한다. 발랄하고 유쾌한 왕정문과의 몇 차례 조우 후 양조위는 전 여친을 떨쳐내고 새로운 데이트를 계획하지만, 만나기로 한 캘리포니아 바 대신 왕정문은 리얼 캘리포니아로 날아간다.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다.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그랬듯 백색의 상하의 속옷을 입은 양조위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패스트푸드 점이나 바를 비롯한 곳곳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인물, 배경이 겹치는 부분이 재미있다.


영화 속에 보이는 홍콩의 모습은 현실적이다. 거리와 집들은 지저분하고 사람들은 후진적으로 보인다. 남의 편지를 뜯거나 의미 없는 오지랖을 부리고,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으며 땀을 흘리고, 다국적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언어와 국적들이 글로벌한 듯 보이지만, 실제 모습은 촌스럽기 그지없다. 97년 중국 반환을 앞둔 초조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에, 유효기간과 숫자를 신경증적으로 붙인다. 57시간 후에 사랑에 빠지고, 30개의 깡통을 먹어치우며, 다시 6시간 후에 사랑에 빠지는 식이다. 보이지 않는 심오한 고독이나, 인간 본성의 소외라기보다는, 코앞에 닥친 위기에 직접적인 초조함을 표출한다. 수위가 낮은 키스신, 폭력성이 낮은 살인 씬이 등장하여 더욱 조악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의 일상은 풍요롭지 않고, 번잡하고 산만하며 불안정하다.


왕정문이 일하는 패스트푸드 점 외부 매대 앞에서 경찰 양조위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유명하다. 실제로 양조위는 아주 천천히 연기를 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가는 모습을 찍어 재편집했다고 한다. 양조위의 작은 키나, 왕정문의 빈약한 몸매 등을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양조위나 임청하에게는 이 작품이 소품이었겠으나, (당시의 다른 중화권 연예인들과 달리 영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왕정문에게는 두말할 것 없는 대표작이다. 마약밀매가 이루어지는 구룡반도 침사추이의 '청킹' 맨션에서, 서양인을 가장한 금발 가발의 중국인 임청하는 영국인 배신자를 죽인다. 날씨를 예측 못한 불안함에 늘 트렌치 코트를 입던 그녀는 높은 구두를 벗고 휴식을 취한다. 홍콩섬 센트럴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던 짧은 머리 소년 같던 왕정문은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머리를 길러 온 세상을 다니는 스튜어디스로 변모한다. 전 에피에서 삐삐 메시지로 가진 희망은 후 에피에서 재회로 구체화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 통속적이며, 흥미로운 누아르와 이해가 쉬운 달달한 연애가 한데 있는 작품이다. 고구마 캐릭터들뿐인 그의 배우들 중 왕정문이 유일하게 사이다를 뿜어 준다. 모두가 사랑에 빠지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고, 꿈속의 연인을 만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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