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북강녕 Jul 06. 2021

아무튼, 왕가위 #3

#3. 무림고수 토너먼트 대배틀  - 동사서독


무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씩은 해봤을 상상이 있다. 바로 무림고수들끼리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것이다. 무공을 겨루는 외에도 사실, 다른 모든 분야에서 이와 같은 상상이 가능하긴 할 것이다. 베토벤과 존 레넌, 누가 더 작곡을 잘할까? 피카소와 김홍도가 미술대회에 나가면 누가 우승할까? 이런 대결은 정성적인 것이라 승자를 가릴 수 없다 치자. 자전차왕 김복동과 벤허가 레이스를 하면 누가 빠를까? 주력 종목이 달라 결정하기 어렵다 치자. 무하마드 알리와 마동석이 맨손으로 붙으면 어떻게 될까? 점점 무림고수의 무공 대결과 가까워지는 격투기 종목이다.


실제로 많은 무협지에서는 고수들끼리의 대결을 다룬다. 패턴은 다양하면서도 단순하다. 흔한 패턴 중 하나를 보자. 의도하지 않게 강호에 나오게 된 신인 주인공이 간단한 대결에서 패하고 모욕을 당한다. 어찌어찌 금전적 관계나 은원과 복수에 엮여 큰 대전을 앞둔다. 정해진 시간 내에 뿌려진 씨앗을 다 주워 담아야 했던 프시케처럼, 하지만 동물들의 도움을 받았던 신데렐라처럼, 무림계의 신입은 그 순수한 영혼을 보답받듯 우연한 기회로 비급, 또는 대사부를 만나게 된다. 예상치 못한 짧은 시간에,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특수 무공을 지니게 된 그는, 사파의 무공을 익힌 상대 고수를 물리치고 원한을 갚는다. 또 다른 패턴은 토너먼트식 배틀이다. 『신의 물방울』식, 절대강자 2인의 다회전 단계별 배틀은 흔치 않다. 미스터 초밥왕』 또는 장금이의 꿈에서 등장하는 요리 배틀처럼 같은 주제를 놓고 여럿이 싸우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트와일라잇』 시리즈 최종판인 브레이킹 던에서처럼 한쪽 파와 다른 파가 단체 배틀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개인 토너먼트 형식을 취한다. 호기롭게 등장하는 신진 세력이 있는가 하면, 이름과 살기만 알려졌을 뿐 얼굴을 모르던 신비의 마수도 중간중간 등장한다. 알고 보니 저런 소년이! 아니, 실제로는 여자였다니! 하며 놀라는 중급 고수들도 등장한다. 결국 주연급 묵직한 대결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 과정에서 반전이나 역전은 필수다.


이렇게 다루어지는 대결들은 대개 답이 정해져 있다. 정파의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사파, 마교, 원수, 기성 고수의 대결이 최종전인 셈이다. 내가 상상해본 대결은 이와 같은 범주가 아니다. 소림사 주지와, 화산파 수제자 영호충, 무당파 탁일항과 천룡팔부의 교봉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수준의, 나이, 시대, 문파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마구잡이 싸움 대결의 승자가 누구일까 하는 수준이다. 북맥신공과 흡성대법이 싸우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능파미보로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다.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에 모아 놓은 것은 천하오절이다.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지흥, 북개 홍칠공, 중신통 왕중양이 원래 천하오절인데, 『동사서독에서는 이 가운데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북개 홍칠공이 등장한다. 그 외에는 황약사를 사랑한 모룡연, 눈이 먼 살수무사와 완사녀, 도화살수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무술을 이용해 싸우지 않는다. 대신 사랑 타령, 엇갈린 사랑 타령을 한다. 사랑하는 여인 대신 강호를 주름잡는 검객의 꿈을 좇은 장국영, 떠나간 장국영을 그리며 그 형과 결혼한 장만옥, 친구 부인과의 불륜 관계 후 복사꽃이 필 때만 찾아오는 양가휘, 해당 불륜녀의 남편으로 눈이 멀어가면서도 청부 일을 자청하는 양조위, 양가휘와 불륜을 저지르는 양조위의 아내 유가령, 장국영에게 복수의 살인을 의뢰하는 임청하와 양채니, 양채니의 복수를 해주는 장학우 등은 모두, '무협'보다는 '정'에 핵심을 두고 있다.


김용의 원전 『사조영웅전에서 동사 황약사는 괴이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닌 무학 종사다. 무공은 초절한 수준이며, 문학, 음악, 그림, 병략, 바둑, 서예, 천문, 수학, 의술, 점술, 기문오행술, 심지어는 기술이나 경제 등의 실무적인 분야까지 못하는 게 없는 인물이면서도, 놀라운 지식과 지성 위에 개차반같이 더러우면서 어떤 일이라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성격을 장착했다. 자신의 잣대가 매우 강하고 세속의 번다한 예의범절이나 인의도덕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데다 다혈질에 괴팍한 방면으로 특히 행동력이 강한 절세고수다. 서독 구양봉은 또 어떠한가. 노독물(老毒物)이라 불릴 정도로 독을 잘 쓰며, 천하오절 중 유일한 악당이자 사조영웅전의 메인 빌런이면서도 최종 보스다. 본래 지나가던 행인을 급습하던 마적단 두령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하며, 사람을 해치는 데에는 그야말로 정통하여 기괴한 무술을 구사하는데,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의 뱀 장식에 강력한 독을 가진 독사들이 살고 있어서 암습에 종종 사용한다. 독사와 독충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고, 엄청난 수의 독사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황약사처럼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무공과 독술을 빼면 황약사의 마이너 카피로 불리기도 한다. (일부 '나무위키' 참조)


이런 인물들이 모여서 사랑 때문에 복수나 의뢰하고, 복사꽃 아래 앉아 기억을 지워 준다는 술이나 마신다. 사막 바람을 맞으며 남녀 모두 머리를 풀고 고뇌 가득한 표정으로 끝도 없이 아파한다. 후회와 미련, 상실과 죽음이 날리는 영화가 『동사서독이라는 이름 아래 지리하게 새로 났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튼, 왕가위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