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백색 남성 속옷의 로망은 여기서부터 - 아비정전
"속옷에는 패션이 없다는 걸 발견했어요. 소비자들의 감각은 앞서가는데 흰 팬티만 만들고 있었던 거죠."
1994년 10월, 당시 파격적인 광고와 강렬한 색상 및 디자인을 앞세운 '제임스 딘'이라는 속옷 브랜드로 주목받던 주병진 '좋은사람들' 대표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화려한 줄무늬 트렁크나, 브랜드 네임이 선명해 청바지 안쪽에서 슬쩍 드러내던 허리 밴드 등, 패셔너블한 남성 속옷을 대중화한 당사자답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감각에 뒤처진 흰 팬티라니?! '흰 팬티'하면 떠오르는 것은 뒤처진 감각이 아니라 장국영이다!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싹 발라 넘기고, 그 당시는 뭔지도 몰랐던 '맘보' 춤을 추며 섹시하게 회전하던 그 모습을 보고도 순백색 남성 속옷의 로망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를 앞세운 『열혈남아』는 그래도, 어느 정도 홍콩 누아르 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었다. 이때는 조폭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마피아라 할 만큼 거창하지는 않은, 말 그대로 건달 영화가 대세였다. 당구장이나 음식점에서 건들거리며 돈을 뺏고, 형님이 최고인 줄, 지질한 복수와 명예가 최고인 줄 아는 영화들이 멋을 부렸다. 『열혈남아』의 성공으로 놀랍게도 다음 작품의 예술적 통제권을 전 권 위임받고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의 캐스팅까지 거머쥔 왕가위는 『아비정전』으로 이에 보답한다. 한없는 지루함, 친절하지 않은 설명,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복잡함은 홍콩 관객들로 하여금 '머리를 써서 깊은 생각을 하며 영화를 봐야' 하게 만들었다. 영화에는 인물들의 '등'과 각종 상징이 계속 등장한다. 배우와 가수를 겸한 연예인들의 눈요깃거리 쇼비즈니스에 익숙했던 홍콩인들에게 장국영, 유덕화와 같은 잘생긴 배우들의 등을 보라는 것은 불통이었다. 아비가 필리핀에 가서 울창한 열대 숲을 배경으로 '발 없는 새' 운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플롯을 기본으로 한 무뇌 코미디나 이유 없이 비장한 조직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심한 무리수였고, 그 결과는 흥행 외면, 작품성 인정이었다. 끝까지 졸지 않고, 인물들의 외로움을 완벽 이해하며 본 사람이 없을 듯한데, 홍콩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을 받았고 해외에서도 수상했다.
흰 속옷을 입고 흔들흔들 혼자 춤을 추는 남자 외에도, 『아비정전』의 마지막에는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만지는 또 한 명의 남자가 나온다. 『중경삼림』에서 순백색 속옷 씬의 계보를 잇는 양조위가 바로 그다. 『아비정전』의 후편을 계획하고 전편 마지막에 등장했다는 설명은 나중에 돌았을 뿐, 영화를 보면서는 저 배우는 왜 마지막 장면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한국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도 마무리 부분에 갑자기 에릭이 총을 들고 등장하여 배우의 인지도 대비 다소 생뚱맞은 역할이라는 느낌을 주었지만, 양조위의 한 컷은 비교할 수 없이 생뚱맞았다. 지금처럼 후편에 대한 설렘 제공의 실마리로 쿠키 영상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유튜버들이 해석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왕가위 유니버스 따위 알 수가 없었던 때다.
장학우는 유가령을, 유가령은 장국영을, 유덕화는 장만옥을, 장만옥은 장국영을 그리워한다. 장국영은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주인공들의 사랑은 엇갈리고, 모두 고통받는다. 시계를 같이 바라보는 1분, 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찰나적 아픔 때문이라 생각하니 왕가위의 멋짐이 폭발하는 느낌이다. 물론 폭발의 핵에는 장국영의 순백색 속옷이 있다. 나도 장국영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