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 <B컷 드로잉>
얼마 전 코엑스에서 열린 일러스트 페어에 다녀왔다. 그런데 뭐랄까. 왠지 모르게 매끈한 디지털 일러스트에는 정감이 안 가더라. 반대로 쓱싹 손으로 그린 듯한 이미지에는 귀신같이 끌렸다. 이게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 건지, 북적거리던 분위기 탓인 건지 헷갈리던 중 무심코 들른 금호미술관에서 힌트를 찾았다.
<B컷 드로잉>이라는 제목에서 전통적인 드로잉 전시를 기대했다면 아마 첫 공간에서부터 놀라게 될 것이다. 흰색의 종이 위에 연필과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 흔히 생각하는 '드로잉'은 쉽고 빠르며 가볍다. 동시에 고요하고 평면적이다. 그래서일까, 시시각각 바뀌며 우리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영상이나 설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주춤하곤 한다.
그렇지만 금호의 'B컷 드로잉'은 우리가 봐왔던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종이가 아닌 공간에 선을 그리고, 디지털로 수백 장의 그림들을 겹치며 살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이정민, 허윤희의 월 드로잉은 작품이 있는 벽 전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제시함으로써 평면이라는 한계를 돌파했다. 회화와 조형, 설치의 경계를 무색하게 하는 백현진 역시 그래피티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이들이 3차원으로의 탈출을 시도했다면, 다른 쪽에서는 회화를 위태롭게 만든 원인을 적극 수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혁오의 앨범 재킷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노상호는 온라인 상에 돌아다니는 이미지들을 자신의 시각적 언어로 '번역'한 다음 다시 SNS에 업로드한다. 무한히 복제되는 드로잉들은 누군가의 스마트폰, 누군가의 PC 화면을 액자 삼아 스스로를 전시한다. 여기에 박광수와 심래정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낱장의 그림들을 엮어 불연속과 연속 사이 그들만의 독특한 영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더 많은 장르들을 '드로잉'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비장한' 비전을 담은 그림들 사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평면 드로잉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고 고백하겠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나열된 이미지들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공간에 놓여진 모든 자극들을 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게는 전시장에 감도는 빛과 공기부터 작품의 크기, 붓 자국, 그림자, 심지어는 액자까지. 물질성은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해민선을 '질감 컬렉터'라고 부르고 싶다. 3차원의 입체를 평면으로 옮겨오면서 사라지는 물질적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질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그림에서는 질감이 두드러진다. 매끈한 우드락 표면에 그려진 돌의 우둘투둘함, 비닐의 흘러내림, 흙의 푸석함. 받침대의 역할을 하는 회색 스티로폼은 구멍이 뽕뽕 뚫려 보는 이의 시각을 예민하게 만들도록 돕는다. 재미있었다. 선택적인 재현, 이런 게 회화의 맛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문성식. 그 디테일함은 글을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에 답을 주었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 속 장면들을 흰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낸다. 머리카락 한 가닥, 수염 한 올,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 하나까지 묘사한 그의 손 그림에는 시선을 붙잡아두는 힘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걸까. 우리는 그가 그은 선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보는 과정을 통해 더 오랜 시간 작가의 손과 머리, 마음이 지나친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은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을 모아놓고, 감각적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린 전시였다. 드로잉의 확장 가능성을 살펴보았다기에는 글쎄, 크게 새로울 건 없었다. 이미지의 디지털화나 공간 드로잉 모두 주위에서 익히 접했던 것들이었다. 게다가 모 잡지에서도 언급했듯 이미 검증받은 A컷 작품들을 가져다 놓고 B컷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실험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하지만 안정적인 브랜드로 잘 차려놓은 (한 발 늦은) 편집샵 같았다.
하지만 유혹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끌릴 수 밖에 없는 전시였다. 그 이유를 바로 손그림이라는 장르 자체의 매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드로잉의 가치를 다시 보게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회화의 재현은 단순히 똑같이 그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그리는 이가 무엇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을 '체감'시켜주어서 좋았다. 다시 말해, 드로잉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드로잉 전시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완성된 설치 작품과 함께 스케치를 전시한 경우, 여기서 드로잉은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동시에 관람자에게는 작품의 밑그림을 보는 것이 어떤 맥락으로 다가올까? 또한 노상호와 박광수처럼 이미 온라인으로 잘 알려진 이미지를 원화로 감상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왜 하필 드로잉이었을까...?
※ 본 게시글에 사용된 사진은 모두 금호미술관의 페이스북에 게시된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아쉽게도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이 없어 이해를 돕고자 빌려왔는데, 앞으로는 되도록 직접 찍은 사진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kumhomuseumofart/)
<B컷 드로잉> ~1월 28일까지. 금호미술관.
http://www.kumhomuseum.com/designer/skin/02/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