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멸하고 주체를 회유하기

<왕과 사는 남자>(2026)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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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가장 흥미로운 상상이 가능한 구역이다. 실시간으로 모든 게 기록된 게 아닌 이상, 사건의 한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의 전반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는 진실과 허구가 섞여 있기에 사건이기보다 하나의 ‘이야기’에 가깝게 이해되며 이 과정에서 플롯과 시퀀스, 숏의 자유로운 창작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에 대한 견해차, 사건의 개연과 정당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며 이를 종합해서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창작물이 된다. <왕과 사는 남자>도 이런 부류의 이야기 중 하나로, 단종이 상왕이 된 이후 노산군으로 강봉된 시점을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와 ‘정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자유로운 상상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장항준 감독이 말하듯, 작품의 초반에 엄흥도가 마을에 ‘유배지’를 유치하는 과정은 오늘날 기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몇몇 설전들의 양상에 가깝다. 특히나 마을에 ‘화’를 대신 가져가 주어서 고맙다는 옆 고을 촌장의 언급은 인천에 쓰레기직매립이 금지된 지금 시점(2026)에서 유달리 와 닿는 감이 있다. 쓰레기매립지가 들어서면 주변에 ‘당나귀’가 아니라 위험천만한 5톤 트럭이나 분진, 다이옥신 같은 오염물질이 펄펄 날릴 테니 말이다.


이런 시점에 더해 작품 안에서 연상되는 사건 하나가 있다. 마을에 유배를 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노산군은 죽을 결심을 하며 절벽에 오른다. 엄흥도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이 장면은 상왕이 유배를 온 상황에서 절벽에 올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아픈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공교롭게도 단종 이후에 즉위한 세조는 군사정권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까지도 즉위과정은 비정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정치는 잘했던 왕으로 바라보아지고는 했다. 이후 2010년대 후반부터 세조에 대한 평가는 급격하게 바뀌는 바, 이 일련의 과정에는 알다시피 정권교체라는 사건이 자리한다. 예컨대 정권이 바뀐 후에 단종과 세조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건, 단순히 단종(노산군)을 절벽으로 가게 한 것 이상의 판단이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에서 왕은 사적인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노산군의 죽음은 많은 경우 타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자살기도에 실패했던 왕이 타살에 이르는 일은 당대 정치 시스템으로의 복귀이자. 그와 같은 상왕의 죽음을 자살이 아니라 타살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과 주변에 이끌린 것, 둘 중 어느 시점을 택하는지에 따라 이 이야기는 달리 보인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가 선택한 건 전자로서 적어도 단종을 무기력한 어린 왕으로 보던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여기서 장면을 전환해 영화가 다루는 계유정난을 떠올려보고 싶다. 정난의 성격은 군사 쿠테타이므로 무겁다면 무거운 내용이지만 이미 조선을 ‘이전’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사건의 무게는 얕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정난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기보다 미디어나 매체에서 접한 ‘게임’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상황이 결코 가볍다는 게 아니라, 쿠테타와 같은 정황을 묘사하는 일에서 이를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비슷한 군사 쿠테타를 다룬 <서울의 봄>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던 감각으로, 역사의 전환기를 묘사함으로써 사건의 전개와 과정, 이후 결과를 미리 인지하게 한다. 그 결과 관객은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추론하기보다 이를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흘러가는 ‘장’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시나리오는 다음 단계로 이행해,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혹시라도 결과가 어떤 것으로 대체되거나 하는 기대심리가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의 시선에 자기를 대입하는 플레이어의 심리가 자리한다. 즉 일종의 수행자로서 캐릭터가 자기의 삶과 현장을 통과시키는 통로가 되어주는 셈이다. 이른바 ‘게임’’으로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의 효과란 독자나 관객이 이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는 것, 진리를 멸하고 주체를 회유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으로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위에서 언급한 사례 말고도 여러 다른 시각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해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전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노산군이 처음으로 유배지에 도착할 때 뗏목이 엎어지는 장면을 언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후반에 사형을 인도받은 노산군에 엄흥도가 “강을 건너지 말라”고 말하는 일을 생각하면 강 중간에 빠지는 일은 삼도천을 건너는 도중에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흥도의 실수로 뗏목이 부서졌기 때문에 이후 자살을 택하려던 노산군이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엄흥도가 직접 나서 노산군의 타살을 집행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엄흥도 개인을 하나의 인물이기보다 죽음에 대한 집행장치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가 항상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면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온갖 복선들을 수집한다면, 엄흥도와 노산군의 동행은 이미 복선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내려진 하나의 결말처럼 보인다. 가장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클리셰는 유구한 전통이 아니던가. 적어도 작중의 인물들은 역사에 개입하기보다 있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신체로서 작품 안에 독자를 안전하게 결말로 인도하는 역할에 가깝다. 그 덕분에 작품은 어떠한 허구나 왜곡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 현실을 바꾸지 않은 채로 다음 목적지를 향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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