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해피 포에버>(2024)
<슈퍼 해피 포에버>는 호텔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실물 센터의 폐점을 다룬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종말을 묘사하는 듯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는 문주화 평론가의 말처럼 상실과 애도보다는 일을 마친 후에 이들을 추모하는 ‘제의’에 가깝다. 가령 감정이 희석될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사건에 대해, 당시에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기억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제의의 성격이 “형식으로 가둔 ‘당시’”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호텔에서만 당시를 추모할 수 있음은 그만큼 기억이 희미해져 감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영화 안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감정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 이 공간에 돌아와야 한다. 일종의 봉헌이라고나 할까. 봉헌의 기능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흩어지는 감정들을 찾아올 수 있도록 명확한 지리 좌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이 채 기억나지 않는 조부님과의 추억도 봉헌의 장소를 방문함으로써 ‘기억 가능한 것’으로 지정된다. 이때 실제로 방문객이 그걸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간의 지리적인 좌표가 열린 외부에 대항해 ‘닫힌 내부’로 기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가 닫힌 내부로 이해되는 일은 이런 점에서 한 사회가 지닌 공통의 기억에 저항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항상 공통에 대항하는 위치에 머물면서 자신이 놓친 것은 무엇일지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뜻이다. <슈퍼>의 유실물 센터는 그런 점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것이든 간에 영화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라도 지금 필요한 게 그곳에 있을지 모르니 잃어버린 게 없더라도 한번은 가보고 싶다. 그런 마음들이 그곳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현재를 현실에 연결한다. 이런 뜻에서 영화의 내러티브를 살펴보면, 호텔이 현업이던 때와 업황이 쇠락한 현재가 교차하는 일은 감정이 물질 자본이 된 게 아닐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3.11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도 보아도 무방한 게 아닌가. 영화가 낡은 레코드판이라면 이는 소리와 음성을 표면에 기록하는 기술을 거친 결과다. 그렇다면 감정 또한 어떠한 표면을 갖고서 여기 이곳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장르는 감정이 기록된 표면을 긁어냄으로써 쉴 새 없이 당시를 재생하려고 든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할 건 이러한 기록의 성격이 평자들에게 하나의 ‘증언’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증언의 힘이 “억압된 감정이 이야기의 한 흐름에서 빠져나올 때를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상실과 애도의 공간적 감각에서, 어떠한 사건의 당사자로서 당시를 진술하는 일은 자신이 겪었기에 일상에 속해있는 것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적인 흐름에서의 분리를 요구한다. 이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추론 하나가 등장한다. 일상의 흐름에서 특정한 사건을 분리한다면, 이때 들여 올려진 곳을 채우는 흐름은 무엇인가? 이미 벌어진 곳이 회복됐다면 증언의 가치는 일종의 적출이나 대체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이를 따르자면 증언의 행위는 이를 수행하는 단위에 어떠한 이후를 남기지 않는다. 한 주체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이야기의 수행 능력을 얻는다면 반대로 이에 벗어난 것들은 더는 진행을 이루지 않는다. 따라서 증언의 행위는 주체와 사건을 분리해 바라보는 속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가 시간을 따라 움직일 때 증언은 언어를 통해 시간을 절개하고, 들춰올린 장막에 새 감정들이 들어차기를 고대한다. 주체의 생리적인 회복능력에 기대는 것이니까 면역력이 약하면 살이 곯아버리는 일도 흔하고 이를 위해서는 항생제와 같은 병리학적 조치가 수반돼야 한다. 문제는 영화에 위생학을 적용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내부에 자체적으로 재현하는 사건들이 우리가 인식하는 언어 일반의 것과 상등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다. 그것들은 어떠한 ‘이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으니 비교가능한 대조군이 없거나 한정적이다. 내부를 엄격하게 소독해야 한다면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외부에 오염되거나 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게 본연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이질적이다. 증언의 행위가 끝내 세계에서 자신을 배제하는 일로 이어지는 일에는 그런 과정이 있다. 그러니까 영화를 증언의 행위 자체로 이해하는 건, 외부에 존속하는 주체가 그 자신을 하나의 기록으로 다룸으로써 그러한 직접 수행의 대상 없이도 이 세계가 다시 흘러가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 증언과 기록은 사진에서 출발하지 않는 영화와 순간에서 방출된 기억들에 마련된 처방인 셈이다.
연장선상에서 동시대 일본 영화들을 보면 ‘치유’나 ‘회복’이 키워드로 딸려오는 일이 흔하다. 이 말은 대부분 3.11이라는 외적 시기와 연결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그런 것이기에 연결을 목적으로 채택된 ‘근거’에 가깝다. 특정한 감정을 의인화하면 이런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 경우 3.11은 하비에르 바르뎀이나 앤소니 홉킨스를 보며 ‘싸이코패스’를 떠올리는 것과 유사하다. 배우는 특정한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이들 영화에서는 3.11이 그런 역할을 한다. 3.11은 특정한 시점과 지리를 갖고서 활성화된 ‘감정’이다. 바꾸어 말해 이처럼 특정 가능한 시점은 현실 세계에서 좌표를 갖고 움직이는 육체에 비견돼, 배우로서 3.11이 어떠한 ‘활극’을 연기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건 배우론이다. 배우들은 좋든 싫든 간에 특정한 이미지를 안고 살아간다. 소위 ‘스타’는 어떠한 역할이기보다 자체로 기억되는 일이 잦으며, 그로 인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배우의 이미지 자체에 잡아먹힐 때도 간혹 있다. 많은 제작자가 이 점을 경계해서 자신의 영화에는 스타를 채용하기보다 신인 배우 위주로 채용하고는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본영화의 평자들이 3.11을 언급하는 일은 무언가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감정이 3.11의 이미지에 잡아먹힌다면 그것만큼 의미가 퇴색되는 일이 또 없지 않을까? 물론 3.11은 기념할 만한 사건이지만, 이 사실이 3.11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잊지 않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기에는 이 사건에 부여된 인과가 없다. 그래서 3.11에 대한 시선은 대개 도쿄전력과 원자력발전소라는 인재의 영역에 겨냥되는 경우가 많으며 재난 자체에 관해서는 거진 침묵에 가까울 만큼 담론이 오가지 않는다. 책임을 질 사람도 없고, 막을 수 있을 범주에 속한 사건도 아니었으며,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3.11은 생각의 측면으로 보면 결론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킬 뿐인 사건이고, 영화를 마친 후에 복기하는 숏이었으며, 무대를 끝낸 후에 내려온 배우의 뒷모습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3.11이 어떠한 활극을 연기한다고 가정할 때, 이들 영화는 불이 꺼진 무대를 보여주는 쪽에 가까워서 “무대가 배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배우가 존재하는 건 무대가 있어서인데 그 반대라니, 다들 이상함을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영화가 특정한 좌표를 육체에 각인할 수 있다면 이는 일종의 변화를 긍정하는 게 아닐까. 혹자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도 말하지만, 더 많은 ‘불변’을 찾아낼 때 이 관점은 생각을 달리할만한 가치가 생긴다. 외부와 접촉하는 신체 표면을 바꿀 수 없는 건 맞지만 이를 감각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발판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경우 인체는 생각보다 더 기하학적인 곡선을 그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일반적인 것보다 더 큰 힘을 낼 수도 있다. 하나의 고정점은 그저 가림막에 불과하지만 변위를 끌어낼 수 있는 지점이 늘어날 때 운동의 총량은 커진다. 같은 의미에서 영화가 하나의 무대라고 가정할 때, 인간의 몸이나 감정이 더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이들 영화의 기능이다. 정해진 각본이나 시간으로 구성된 시공이 아니라 정확한 지점에서 카메라가 특정한 시간을 지속하는 일은 관객에게도 시간을 감각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통상 무대에서 배우가 극이 부여하는 정동을 수행하는 주체라면, 영화라는 ‘무대’는 그 가르침을 바깥에서도 이어갈 수 있게 카메라를 비롯한 숏의 구성으로 이를 수행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의 낮은 면에 시선을 보내, 더 많은 층위로 몸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몸은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한 개인이 세계를 수행하기 위해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을 위해서만 주어진다. 무대 위에서 개인은 다른 무언가도 아닌 자신을 연기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자신이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라는 점을 자각하기 어렵지만, 영화가 전하는 건 우리가 사로잡은 세계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사로잡은 시선들에 관해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고민하는 건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시작 지점에 서는지를 논하는 것과 같다. 소위 말하는 복선은 뒤를 돌아보지만 반대로 시작점에 설 수 없는데, 그럼에도 영화는 매체의 형식 안에서만큼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즉, 복선이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아마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서로 다른 감정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세’에 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