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한국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전망이다. 이는 작년에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어서인데, 수치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니 대비가 더 심한 감이 있다. 작년은 판데믹 이후 천만 영화가 나오지 못한 첫해였으며, 이는 곧 ‘천만영화’를 극장가의 회복으로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극장가는 다시 판데믹 시절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다. 판데믹인 2020년과 21년에는 극장의 명맥이 끊겼고, 이런 상황에서 2025년은 극장의 종말이 몸으로 다가왔던 한 해를 ‘다시’ 경험하는 시기였다. 전성기를 마쳤다면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실제로 한국영화사의 천만관객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다. 2003년의 <실미도>가 처음으로 천만영화를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잘 알다시피 이 해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리던 때다. 이후 극장가는 점진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2019년 한해 천만영화를 다섯 편 배출하는 등 정점에 이른다. 여기에 2019년은 봉준호의 <기생충>이 역대 최다 수상을 기록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고점이 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는 대로다.
작년 4분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가에 흥행한 일을 두고서 이야기를 나누던 일은 2021년 한 해 여론과 몹시 닮아있다. 판데믹에 다들 익숙해질 무렵 극장가에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개봉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흥행을 두고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하나는 특정한 영화를 위해 극장에 방문하는 쪽으로의 변화였고, 하나는 한국영화가 없는 곳에 외국영화가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빈집털이라 해도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층 사이에서의 입소문만으로 달성한 관객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젊은층만으로 특정 관객수에 도달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젊은 층에서의 노출도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가령 모든 연령대에 영향을 끼치는 천만영화는 젊은 연령대에 유명한 삼백만 영화와 인지도가 같을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들 영화의 흥행은 우리가 인지하는 ‘천만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인구를 오천만 명이라고 가정할 때 천만영화의 뜻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아는 작품’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또래집단에서만 달성돼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수준이다. 결국 어휘로서 ‘천만영화’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산업적인 면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적용된다. 천만영화라는 수치는 홍보나 실리 양쪽 모두에서 자본이 오가는 통로가 된다. 감독에게는 천만영화라는 메달이 수여되면서 투자를 받기 좋은 여건이 되며, 대중에게는 뒤늦은 분석 대상이 되거나 한다. 특히 천만영화는 흥행에 이르는 과정과 과업을 마친 이후가 서로 다른 작품처럼 다뤄진다. 우선 영화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칭호가 앞장서게 된다. 일종의 명예의 전당과도 같아서 천만영화 이후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랜차이즈가 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특정한 문법이나 경향으로 설명하기 힘든 작품들을 승인하는 절차가 ‘천만영화’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면 이미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하기 때문에 그 어떤 이유도 의미가 없다. 왜 이 작품이 인기를 얻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작품이 흥행했기에 그런 판단을 내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합리화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투자자에게 천만영화는 이미 한번 잠재력을 보여줬기에 이를 새로 기대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천만영화라는 고지에 도착한 감독은 다음에도 천만영화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다. 아무런 근거 없이 흥행한 작품들이 결과만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듯, 천만영화 역시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왕사남>의 흥행에서 짚어두려는 건 이 점이다. 이미 흥행에 성공했기에 판단하는 것과 어떤 판단에서 흥행을 직감하게 하는 것. 같은 말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이에는 낯선 데자뷔가 있다. <왕사남>은 단종의 죽음에서 출발하는 영화여서 많은 관객이 이 사실을 알고 영화에 임한다. 관람이 아니라 ‘영화’라고 지칭한 건 이를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나 콘텐츠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출발한 영화는 항상 죽음 이전의 문제로 회귀하려는 성향이 있다. 영화가 과거를 재현할 수 없기에 영화가 보여주는 ‘이전’은 항상 죽음에 대한 극복불가능성으로 취급된다. 쉽게 말해 영화가 마주한 결론이 영화 안에서는 자신들이 도달하게 될 ‘막장’이지만 영화 밖에서는 도리어 극복가능성을 역산하는 시작점이 된다. 천만영화에 대한 관점이 “왜 관객이 찾을 수밖에 없는지”를 묻는다면, 죽음에 대한 결론에서 우리는 “왜 극복불가능한 결론이 이를 넘어 우리 앞에 도달했는지”를 묻는다. 한 죽음이 시간을 넘어 이곳에 등장했다면 그 원인이나 이유,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그저 무의미하다. 도리어 그 죽음이 어째서 때를 타지 않은 형태로 우리 곁에 도달했는지를 묻게 될 뿐이다.
한 사실이 다시 수면에 오를 때는 시의에 맞는 연관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특히 우리가 오래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시도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평가가 끝났다고 생각하더라도 정작 그런 일이 현실에 등장하면 무언가 당황하게 되는 게 있다. 대개 이야기는 시작에서 끝으로 이어지는데 그렇게 마주한 결말이 어떠한 절차 없이 등장해온다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가며 이해했던 일도 무턱대고 결론부터 받아들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가령 <왕사남>이 다루는 역사는 군사정부 시절 쿠데타를 일으킨 일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일에 동원됐다.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는 극복할 수 있는 부류의 사실이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단종에 대한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근원적 이미지에 고정되고야 만다. <왕사남>도 역사의 큰 틀을 따라가며 몇 가지 변주를 거치지만 기본적인 틀은 유지된다. 단종의 삶은 영화의 시간과 결합해있고 이에 따라 어둔 화면에서 출발한 영화는 그 자신을 출몰의 경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극장’에 등장한 어둠이란 잊힌 죽음이 돌아오는 것과도 같다. 왜 그 죽음은 현실에 다시 돌아와야 했을까? 그것도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스크린을 통해서 말이다.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은 사후적으로 진실을 비준하는 ‘승인’의 과정을 거친다. 죽음이 이미 하나의 이야기를 수행한 결과로서 맞닥뜨린 ‘결과’라면, 이 과정에서 레짐을 작동시키는 건 다름 아닌 시간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결론은 시간을 자신의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이 스크린에 귀환할 때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함께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천만영화의 출몰이 이례적이라면, <왕사남>은 역사에 알려진 단종의 대외적인 모습을 벗어나 자구력과 호소성을 지닌 인물성을 새로 꼽는다.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건 영화 <변호인>이다. 김병규 평론가는 2020년 씨네21에 쓴 「2020년 한국영화는 쓰레기장」이다에서 <변호인>을 “‘법정에 선 보편적 인간’”을 제안한 원형적 영화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왕사남>은 단종이 자기를 변호하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중반, 단종은 관아에 달려가 집행중지를 명하지만 한명회는 이를 거절한다. 관아가 경찰서이자 동시에 판결을 내리는 장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퀀스는 짧은 법정 장면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이후 법정에서 진 단종이 선택한 건 자신을 따라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이들의 의견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왕사남>이 제작된 일에는 궁금함이 앞서게 된다. 법정에서 실패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건 무슨 이유일까? 이 이야기가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시간을 찢고 들어오는 편에 가깝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천만영화는 대개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 공감은 일정한 분열이 아니라 하나의 원본으로 작동한다. 이미 자신의 일을 마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는 일에 대한 판타지를 심는다. 언제, 어디라도 이야기는 열화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채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때 ‘시간’은 다른 이물이 혼합된 게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형상을 취한다. 그야말로, 영화는 회전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영화론의 중심은 돈이 많이 들어왔으니 다시 돈을 많이 들여 작품을 만든다는 순환론에 있다. 천만영화라는 수치는 산업이 잘 되고 있다는 증표니까 제반산업 전체에 활기를 돌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만영화가 작품성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시점에서 ‘천만’은 극장과는 무관한 단어다. 마치 법정에서의 공방이 정해진 결론으로 무마되는 것처럼, 오히려 이 회전은 사람들이 극장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가 인간을 찾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