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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8. 2018

<마녀>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히어로물?

<마녀>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히어로물?

영화 <마녀>의 작품 포스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녀>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히어로물?


한국형 히어로물 혹은 여성 주연 영화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 영화에서 <아키라>와 <킥애스>를 떠올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아키라>는 버블경제의 붕괴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영화쯤으로 여겨지고, 우리에게 <킥애스>는 평범한 얼간이 세 명이서 우스꽝스럽게 우스꽝스러운 적을 물리치는 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는 여기서 언급된 두 영화가 <마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어두컴컴하고 새까만 영화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것들을 마침내 찾아내고야 만다.  


평범함으로 극의 끝까지 달려가는 과정


삼부작으로 기획되어 첫 번째 순서를 맡은 이 영화는 이후의 틀을 닦아 놓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딘가 모르게 만듦새가 좋지 않아 보인다. 삼부작 전체를 기승전결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 영화가 자리 잡는 건 ‘기’ 혹은 ‘기승’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이유로 작품의 주요 볼거리가 뒷부분에 몰려 있고 그곳까지 관객을 인도하는 과정이 장르처럼 ‘미스터리’하지 않았다는 건 몹시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평범한 반전요소임에도 평범하게 재밌는 액션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그것이 평범한지 아닌지는 관객마다 다를 것이지만 영화 문법으로 볼 때 평범하다고 가정해보자.  


상업영화 중에서도 상업 영화에 가까운 이 영화가 평범함 하나만으로 극의 끝까지 달려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극의 도입부에 어두운 과거가 묘사되고 아이는 그곳에서 탈출한다. 어둠으로부터 도주한 아이는 갑작스레 기억을 잃고 십 년 후의 소녀(김다미 분)가 된다. 십 년 후의 소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숙명, 늙은 (자신처럼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살피려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전해 상금을 타낼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갑작스레 다가온 ‘어둠 속의 사람들’에게 “저에게 왜 그러세요.”하고 되묻는다. 분명 이때까지 소녀는 기억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으니 딱히 이상할 게 없는 대사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악당(서로 다른 그룹들이)과 소녀는 다섯 번 정도 마주하는데, 그때마다 소녀의 같은 물음에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묻기만 할 뿐 딱히 그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녀가 스스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를 빌면서도 소녀에게 행동력은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미로 속에 갇혀 출구를 알아내는 것을 강요받는 실험실의 생쥐처럼 보인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후반부에 그녀가 ‘마녀’임을 드러낸다는 것이 대략 암시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물음은 정말로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미스터리’를 표방하는 <마녀>에서 주인공이 무언가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 ‘반전’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고편에서 대놓고 드러나는 것을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혹은 힘을 가진 이들이 그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중요한 역을 맡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고편을 보지도 않았고 영화문법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더라도 관객들을 대신해 친절히 “기억 안 나?”하고 물어보는 것을 보며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저에게 왜 그러세요.”라는 정체성 찾기다.  


말하자면 평면적인 서사와 평면적인 인물이며, 눈치가 빠르지 않은 관객이라도 이것이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함이 어쩌면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이 영화가 가진 특성들 때문인데, 이를테면 ‘여성 주연’이나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두 가지 단어들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화두가 되고 있음을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소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악당들의 모습은 그들이 묻는 물음만큼이나 덧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소녀에게 “기억 안 나?”라고 묻고 나면 “어차피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그 말인즉슨 선천적인 폭력성이 후천적으로 덮어질 수 없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성악설, ‘선천적으로 만들어진’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지는 상황에서 그들은 소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그들은 ‘왜’ 소녀에게 덤비고 ‘왜’ 자꾸만 정체성을 확인하려 드느냐는 것이다. 무척 폭력적인 소녀가 근본부터 바뀌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주변 인물을 위협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칭하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가 양부모와 친구에게 발목을 붙들릴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소녀에게 “어차피 평범하게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작품의 본 의도를 벗어날 수도 있는 지점에 안착하게 된다. 그에 대한 진행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녀를 탄생시킨 사회는 소녀에게 정체성을 강요한다. 둘째, 소녀를 탄생시킨 사회는 내면에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 셋째, 사회는 소녀로부터 붕괴를 맞이하고 (부모살해) 영화는 새 시대(후속편)를 예고하며 끝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폭력적인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폭력성이 온화한 이들에게 ‘폭력성’을 인정받고 확인받는 서사다. 그것은 마치 이 영화를 한 편의 신화처럼 보이게 한다.  


신화답게 그 거친 이의 자리에는 물음을 강요받는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지만, ‘여성 주연’인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성들의 자리다. 그렇다면 “저한테 왜 그러세요.”라는 정체성의 확인은 그녀를 억압하는 동시에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저’는 누구이고 ‘왜’ 그러는지에 대한 복합적인 물음, 말하자면 기억을 잃은 (그렇게 주장하는) 그녀에게 자꾸만 기억을 요구하는 악당들의 모습은 흡사 ‘각성’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최근 한국 사회의 실황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불특정다수를 끌어들여야 하는 상업영화가 그들에게 던지는 물음, 어느 한 편에는 목소리가 있고 어느 한 편에는 평범함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이 영화의 소녀도 그렇다. 그리고 그 소녀는 이념적인 것으로 내면의 갈등을 겪으나 끝내 생존을 위해 이념을 덧씌워 행동한다. 자신은 폭력을 품고 태어났기에 생존을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고, 사람에 가깝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폭력성을 감추지 않는 (어차피 죽일 것이라는 대사) 그녀의 행동은 자신을 살릴 시약을 구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폭력’이라는 이념은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의 것이었기에 살려둘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생존을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만 했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때, 우연에 불과하다지만 감독의 전작인 <V.I.P>가 어떤 영화인지를 떠올려 보면 이것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마녀’는 단지 폭력적이지만은 않고 온화할 수도 있다는 ‘탈 프레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선천적이거나 강압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 이 영화에 있고, 그것이 평범한 서사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혹은 당연하다는 것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쯤에서 다시금 불려 오는 ‘평범함’의 역할, 한국사회에서 평범함이란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모나 보이게 됨을 뜻한다. 말하자면 무난함,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비상식적 논리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중에서 악당이 “너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물음을 던지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를 뜻하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이것은 폭력적인 성향 탓이 아니라 너무 우수한 능력들을 고루 갖추고 있어서, 평범하지 않으므로 사회로부터 온갖 질투를 받을 것이라는 ‘마녀’를 암시한다. 그들은 소녀의 친구(고민시 분)에게 “얘가 공부하는 거 봤어? 노래면 노래 공부면 공부. 한 번만 보고도 다 따라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시기와 질투를 유도한다. 소녀와 친구는 평소에 사이가 좋았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 발언은 멀쩡한 관계에 생채기를 내는 발언이다. 말하자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고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심판하고 살해하려 드는 ‘마녀사냥’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명 의지에 의해서든 질병에 의해서든 자신의 진짜 능력을 숨기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생존의 문턱에 들어서야 원칙을 깨부수고 악당들을 자신의 눈앞으로 불러들인다. 그 악당들이 소녀에게 하는 것은 마녀사냥이며 그제야 마녀는 비로소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말하자면 그녀가 스스로 마녀임을 자청했고 스스로 심판대에 선 후 악당들을 단죄하게 된다. 그 자청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내면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래서 <마녀>에서 마녀는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마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혹은 그 현상을 받아들인 단어다. 질병의 악화대로라면 언젠가 마녀임을 밝혀야만 했고 또한 그것을 역으로 이용한다는 시도야말로 마녀가 더는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 논리적 모순이 지금 우리 사회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회가 요구해서 만들어진 마녀가 사회를 깨부수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을 살해할 칼날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찾아온다. 그리고 이 귀신 같은 상황은 <아키라>에서 힘의 상징인 네오도쿄가 무너지고 다시금 재건되어 새 실험체를 찾는 것과 유사하다. 사회적 필요가 욕심으로 바뀌고 통제되지 않은 욕심이 그들 사회를 붕괴시키는 일련의 과정에는 ‘당위성’이 있다. ‘네오’라는 단어에는 ‘무조건’ 무너졌다가 ‘다시금’ 재건되어야 한다는 ‘환생’의 판타지가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한번 무너졌던 네오도쿄가 테츠오에 의해 다시금 무너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환생’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스물스물 기어 나오던 제국주의의 냄새는 스스로를 제국으로 지칭해 저항세력으로 하여금 격파의 빌미를 제공한다. 물론 가만히 앉아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그 환생은 그들로선 몹시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파멸을 알면서도 환생을 택한 것이 된다. 영원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은 최선이라 생각되는 힘에의 의지를 실현할 것이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아키라>에서 파멸되어야 하는 건 네오도쿄나 테츠오나 매한가지다. 네오도쿄가 행하는 수직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불쌍한 테츠오는 네오도쿄 그 자체에 다름없게 된다. 이때 테츠오가 카네다에게 품는 열등감이 사회에 대한 파괴욕으로 변환되는 과정(아마도 수직적 구조에 관한)을 이해하기는 힘든데, 네오도쿄가 테츠오와 아키라에게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구태여 이유를 붙이자면 선천적으로 카네다보다 약하게 태어났고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 때문일테고, 자신의 계급으로는 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파괴욕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떠올려 볼 때, 자유방임의 상징인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니 그들의 폭력성이 사회로부터 도달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테츠오와 친구들이 사회가 아니라 ‘구조’에 대한 반발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들이 ‘마녀’를 자초하는 이유는 단지 사회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니 만약 <마녀>에서 <킥애스>가 떠오른다면 작은 꼬마 아가씨가 나쁜 사람들을 헤집어 놓기 때문만은 아니다. <킥애스>는 얼간이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착한 일 하려 거리로 나갔다가 정말로 ‘히어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어이없는 영화다. (그 부분이 재미있다.) 말하자면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히어로를 자칭했다가 정말로 사회의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고, 이는 <아키라>와는 정반대다. <아키라>는 이유 없는 분노가 자신으로부터 힘을 준 사회를 핑계 삼아 사회를 때려 부수는 이야기이고, 사회의 부름을 받은 이가 히어로를 자칭하게 되는 이야기다. 물론 <킥애스>의 가련한 남자 주인공 (에런 테일러존슨 분) 또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가정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했으니 <아키라>의 테츠오와 별반 다를 바는 없다. 그렇지만 두 영화의 히어로들이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에 히어로가 된 것인가? 혹은 히어로로 태어났기에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인가? 말하자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그 유명한 논제, 이것은 히어로의 숙명으로 여겨지는 진입관문이다.


농담 삼아 말하자면 힘을 가진 인물이 사명감으로 나머지 모두를 때려눕힌다는 점에서 ‘반영웅’이든 ‘영웅’이든 세 영화 모두 ‘히어로’ 장르라고 볼 수 있는데, 히어로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아니라 능력에 관한 가치관이 성립되는 과정이다. 그 가치관은 사람을 살린다거나 범죄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도덕에 관한 것이며, 말하자면 ‘당위성’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도덕이라는 게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보았다면 그 당위성이라는 게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게 도덕이라면 그것이 곧 당위성인 것이며 원리원칙대로인 명령 때문이었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되물어 보는 질문, “저에게 왜 그러세요.” 이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방향으로 들려온다. 이유를 모르고 정해진 답이 없는 이 물음에 답하려면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저’는 누구이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사회가 자신을 그렇게 ‘프로그래밍(유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행동은 자신의 것이지만 사회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유체이탈 화법의 전형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는 현상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영화가 던지는 것처럼 ‘왜’라는 물음을 자꾸만 던져보아야 한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 물음에 대한 답변. 사실 구조를 극복하고 사회를 변혁한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 가능성이 백 퍼센트에 수렴하기 위해선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사회적 담론을 영화로 말하고자 하는 작품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영웅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초라하게 유행하는 효도 계약서와 <신과 함께>의 귀인 김자홍(차태현 분)은 아무래도 대비가 확연하다. 혹은 그 반대로, 히어로 영화를 만들고 싶으니 사람들이 원하는 영웅상과 그것이 등장한 배경을 채용하게 된다. 이를테면 19금 딱지를 달고 혜성같이 흥행한 <킹스맨> 시리즈는 동네 불량배를 데려다가 멋진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키는데, 매번 국내 및 국외 정세를 반영하여 영화를 보는 재미를 준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의 화려한 폭죽 쇼에 스탠리 큐브릭의 오묘함 한 스푼, 그리고 많은 사람이 <킹스맨 : 골든 서클>에서 트럼프 시대의 개막을 보았을 것이다. 혹은 10년 넘게 흥행해온 마블 영화가 조금씩 내용 면에서 바뀌어 가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녀>와 <아키라>, 두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혹은 말하기 어려운 분노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이유를 소거해버리는 행위의 이유가 무엇일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 영화는 주인공을 테제 삼고 반대 인물을 안티테제 삼아 대화형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만약 우리가 그들 대화에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외부로 눈을 돌려 사회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녀>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이 영화에는 시나리오의 불완전함이라고 표현할 구멍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대화를 통해 진행되는 ‘연애 시뮬레이션’식 전개, 그렇지만 그것을 일일이 따져 묻는 것이 과연 좋은 행위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미흡한 부분이 어쩌면 감독이 남겨둔 관객의 자리가 아닐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올 불이익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 내 정체가 탄로 나 보금자리로 귀향할 수 없음에도 그를 구해야만 하는가. 아이언맨은 당당하게 밝혔지만 스파이더맨은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처럼. 물론 아이언맨은 돈이 많고 스파이더맨은 돈이 없다. 같은 명제로 <마녀>에서 소녀는 누구를 위해 사회에 반기를 든 것인가. 자신을 위해서인가 혹은 보금자리를 지키려 한 것인가. 그래서 <마녀>는 새 시대에 부응하기보단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한 건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며 몸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상황을 이해하기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일단 행동하고 나서 지금 상황을 이유로 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대응을 ‘먼저’ 행동한다는 자구권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시대가 요구하기에 진심이 아닌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여성 주연인 것은 단순히 ‘여성’이라는 공석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것은 <아키라>가 멸망한 세계와 사회를 다루는 것, <킥애스>가 관심을 끌기 위한 소동극에서 출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이미 멸망한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상상,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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