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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2. 2018

동굴은 과연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의 한 장면 ©Arte


몸을 웅크린 카메라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위로는 드넓은 강가가 펼쳐져 있다. 이윽고 카메라는 강 위에 놓인 거대한 다리를 넘어 하늘 높이 떠오르는데, 이곳이 수만 년 전에는 얼음 덩어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유유히 미끄러지며 높은 암벽 위를 흩어본다. 이내 카메라는 암벽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그 틈새의 세월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만 가고, 역사를 가로지르던 카메라는 곧 인류가 꾸었던 꿈의 원류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잊혀진 꿈의 동굴, 쇼베 동굴이다.


베르너 헤어조크가 감독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엄밀하게 말해서 다큐멘터리라고만 칭할 수는 없는데, 다큐멘터리의 성질이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러하다. 이 영화는 ‘본다’라는 기록이 아니라 ‘느낀다’라는 영혼의 떨림에 더욱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 영혼의 떨림을 만들어 낸 이들, 기존에 알려져 있던 가장 오래된 벽화보다 두 배나 오래된 이 동굴에는 인류 최초의 시네아스트들이 벽화를 그려두었다. 이른바 ‘호모 스피리츄얼Homo Spritual’이라 불리는 그들은 손끝의 영혼이 벽 위에 흘러나온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현대의 영화감독이 자신의 영혼을 카메라라는 펜 끝으로 필기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손이라는 펜 촉으로 영혼의 흐름을 바로 그곳에 새겨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벽 속에 갇혀버린 그들의 숭고함을 다시금 살펴보며 무언가를 따지기보단 그 자체로 거대한 울림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간을 가두어 놓으려 하는, 과거와 현대의 사이를 이으려 하는 시간의 통로 역할을 자청하는, 일종의 활동사진이다.



활동사진, 시네마토그라피


쇼베 동굴 속의 그림 중에는 다리가 여덞 개 달린 소 그림이 있다. 동굴 입구에서 머지않은 곳에 그려진 이것은 아마 추측상으로, 태양이 드나들며 드리우는 명암에 의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기 위함이리라. 그리고 영화의 나레이터는 이 그림을 최초의 영화에 비유하면서, 원통을 돌리면 말이 움직였던 모션픽쳐를 언급한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Eadweard Muybridge는 18세기 초의 사진가였는데, 말이 달리는 모습을 12개의 카메라를 통해 촬영한 후 그것을 이어 최초의 ‘활동사진’을 만들어내었다. 그 이름 바로 ‘주프락시스코프 Zoopraxiscopr’라 붙여진 이것은 뤼미에르가 시오타 역에 열차를 도착시킨 것보다 반세기를 앞지른 인류 최초의 필름인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가 만든 것과 동일한 ‘활동사진’이 쇼베 동굴 속에 있었다. 그래서 쇼베 동굴은 인류 최초의 시네아스트들이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는 어쩌면 이 동굴이 보여주는 영혼의 떨림은 우리 영화가 해야 할 책무를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동굴의 우상을 통해 동굴을 하나의 거대한 시네마로 만들었듯이, 이 동굴 속에 들어온 탐사대는 한결같이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동굴에 전해지는 신비로운 역사의 연장선일지도 모르는 이 느낌은 플라톤이 말했던 동굴 너머, 이데아의 짙은 향수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 동굴의 벽은 단순히 석회질의 돌덩어리가 아니라 그 속에 오래된 영혼을 품은 시간의 편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우리 인류가 살아오면서 쌓아 올린 여러 예술의 총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굴에 들어온 이들은 단지 무언가를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자꾸만 그려보게 되는 일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다. 영화라는 것이 스크린이 끝나고 나서도 관객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그러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영화 속 어느 인물은 이 동굴에 처음 탐사하던 일주일 동안 밤새 동굴 사자의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말로 마음속의 이데아를 이 동굴을 통해 탐험하게 된 것일까?



사실 이 동굴 위의 벽화가 인류 최초의 회화라는 점에서는 영화의 미쟝센에 관해서 언급을 피할 수가 없다. 미쟝센이라는 영화 용어가 연극에서의 사물 배치를 지칭하는 것이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그리고 그 배치라는 게 구체적으로는 회화의 구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이 쇼배 동굴의 시네아스트들은 영화의 이미지에 관해 탐구한 최초의 사람이다. 과연 어느 이미지가 관객에게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많은 감독들이 던져왔고, 타르코프스키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그것을 실천했으며, 그들이 찍은 이미지 안에서는 늘 어떠한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이 영혼이 바로, <공각기동대>의 인형사가 네트워크 안에서 태어난 생명체임을 주장했듯이, 스크린 속에서 태어난 영화적 생명체이다.


영화는, 동굴은 과연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쇼베 동굴 위의 벽화가 영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명확하게 그것을 그린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점에서는 그 신비성이 조금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와 우리의 시간이 약 삼만여 년을 뛰어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영적인 속성을 발휘하는 그 이미지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것이지만 사실 감독이 영적인 것을 만들어 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맥락에서의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신으로부터의 간택을 받은 것이 되므로 그러하다. 어쩌면 그것은 사진작가들이 포착하는 찰나에서 가끔은 신성함이 비롯되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찰나의 순간이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카메라의 본질에 대하여 깊게 토론하게 될 것이다.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 이 활동사진에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이다.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의 한 장면 ©Arte


쇼베 동굴 속에는 인간의 흔적은 하나 없고, 남겨진 99퍼센트는 사자와 소의 뼈가 흩어져 있고, 마지막 1퍼센트에는 늑대의 뼈 한 점만이 남아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학자들은 이 동굴이 거주용이 아니라 의식을 위한 장소였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때 카메라는 동굴 안에 있는 어느 동물의 두개골을 조명하면서 그 위에 쌓인 이만여 년의 석회질 덩어리가 이 뼈를 몹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 화면에 보이는 석회 기둥들은 원시인들이 거주할 당시에 없었고, 그래서 이 동굴은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결국 이 쇼베 동굴의 이미지는 단순히 순간을 포착한 활동사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낡은 필름의 푼크툼까지도 포함한 영혼적인 속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 쇼베동굴은 그야말로 삼만여 년을 묵은 필름인 셈이다. 그만큼 낡았지만, 그만큼 빛이 바래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 셈이다.


다시금 이 쇼베동굴의 지리적인 위치를 되짚어 보자면 본래의 입구는 낙석으로 인해 막혀버리고 뒷편의 우회로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이 동굴의 정문에는 본래 해가 높게 뜰 때 빛이 들어왔었다. 그래서 호모 스피리츄얼은 그 태양 빛에 맞추어 동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벽화들을 남겨 두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어쩌면, 영사기가 스크린 위에 뿜어내는 그 빛 속에 남겨진 이미지를 피해 달아나려는 최초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이 쇼배 동굴의 벽화가 영혼적인 울림을 품고 있다면, 그 영혼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직사광선을 피해 더욱 깊숙한 곳으로 도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쇼배 동굴은 단순히 활동사진에 불과한게 아니라, 영화에 이야기와 의미를 부여했던 현대 영화로 곧바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계보학은 그 쇼배 동굴에서 일부러 빛을 피해 달아났다는, 자연이 선사한 최초의 풍경을 거부하고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받은 횃불로 인간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활동사진에는 말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염원의 이미지가 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그것이 본래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남겨진 것들로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 추측이 본래의 역사를 알아낼 수 없다는 통한을 품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관객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의 한 장면 ©Arte



이른 새벽의 영화관 분위기


오래된 침묵을 깨고 인간의 진입을 허락한 쇼베 동굴이 주는 느낌은 마치 투탕카멘의 무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곳이 파라오의 저주라는 이름과 복잡한 구조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거부했다면, 이 쇼베 동굴은 우리 인류보다 훨씬 이전에 살던 다시 말해 조상님들이 우리와 ‘영화’라는 것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동굴 안과 밖의 시간이 수만 년을 두고 봉인되어있었다는 그 느낌을 지우는 것은 다름 아닌 벽화이다. 동굴 밖의 세계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대라면 이 동굴 안은 횃불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만이 있을 뿐인, 정지된 시간의 이데아일 뿐이다. 이때 동굴 안에 찍힌 어느 누군가의 손바닥에는 손가락 하나가 온전하지 않으며 그 사람의 손바닥은 동굴 깊숙한 곳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벽 위에 손바닥을 남긴 사람이 주변의 벽화를 보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면 그 벽화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현대 영화를 보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이 동굴이 일종의 웜홀과도 같은, 타임머신과도 같은 게 아닐까 하고 곰곰이 침묵을 지키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이 올라가면 우리는 영화 속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속에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크레딧이 끝나고 불이 켜질 때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다. 그 영화가 주는 마음속의 떨림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스크린이라는 상상계, 스크린 위에 영사기가 만들어내는 온갖 그림자의 향연이 사실은 이데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영화와 관객의 동일시는 바로 그렇게 영혼의 입맞춤을 위해서 존재하는 개념이고, 클로즈업이 가지는 의의는 그 영혼의 눈 마주침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쇼베 동굴은 그런 맥락에서의 스크린과 객석을 매개하는 중간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 라깡의 말대로 실재계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두리뭉실한 이곳을 지칭해, 어느 원주민은 영화 속에서 타인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굴 안의 벽화는 한 순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시네아스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동굴 속의 벽화가 희미하게 지워졌다면 그것이 어느순간부터 시네아스트들로부터 잊혀졌다는 것, 또는 더는 시네아스트가 없다는 이 시대의 절망, 혹은 시네아스트가 왜 만들어지지 못하는 가에 대한 깊은 자괴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언제부턴가 이 거대한 인류의 이데아 속에 벽화를 남가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고민해볼만한 일이지만, 현대의 영화가 다시 그것을 부활시킴으로써 지금 우리는 스크린과 영혼의 교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불이 꺼지면, 우리는 영화에 빨려 들어가고, 영화의 현신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거친 암벽 속에는 우리가 아는 인류 최초의 활동사진이 오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크 오몽은 영화의 얼굴이 주는 영혼의 울림이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나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의 얼굴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논했고, 바로 그렇게 말했다. 영화의 얼굴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해체되어 버린다고. 그리고 이 쇼베 동굴의 오래된 벽화가 횃불에 일렁이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어느 시네아스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과연 이것은 이제 와서 누구와 눈을 마주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네아스트의 모습을 반영한 그 거울상인 벽화 속에 있는 어떤 얼굴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전해질 수 있을까?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의 한 장면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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