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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1. 2018

인간이라는 아이러니

이 글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이 왜 달에 가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우리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힘들다. 그 이유인즉슨 우리가 사는 곳이 달이 아니라 지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밤 달을 보지만 그곳이 지구와 너무도 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그런 본능적인 감각은 달과 지구가 서로 바라만 보는 관계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말하자면 이 관계는 일방통행이어서 서로에 대한 반응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구는 달을 그리워하지만 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또한 달도 지구를 그리워하지만 지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모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바라만 보던 달에게 대답을 들으려 여행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헛되거나 돈 낭비라는 말을 던지지만, 영화에서 조지 말로리의 대답이 여행을 옹호해준다. “당신은 왜 산에 오르나요?”,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달에게 한마디 인사를 건네려는 그들의 마음은 아무런 목적과 사심 없이, 단지 잘살고 있는지와 같은 안부를 묻고 싶을 뿐이다. <퍼스트 맨>은 그런 영화다. 


영화 <퍼스트맨>의 작품 포스터 © UPI 코리아



차가운 문명 따스한 집


데미안 샤젤의 <퍼스트 맨>이 닐 암스트롱을 다루는 방식은 여타 미국영화처럼 애국심 고취는 아니다. 이 영화는 냉전 시대의 갈등을 밟고 일어나는 어느 남자 혹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국가를 아버지에 대입해 그의 모습을 미국적 가치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과학의 진보를 다룬 이 영화를 좀 더 따스하게 보고자 한다면, 그 차가운 우주선에 탑승한 것이 따스한 사람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과학을 대변하는 차가운 쇳덩어리들, 이를테면 전투기나 군함 혹은 우주선에 탑승하는 이들이 늘 가족에게 소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냉소적인 삶을 포함한다) 좋든 싫든 간에 차가움을 택한 이들에게는 가족의 품에 안길 시간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 차가움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영 싸늘해지는 게 태반이다. 이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를 수행해야 한다. 당장 기체를 버리고 가족을 찾아가거나, 혹은 이 차가움을 따스하게 만들 것.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여전사 리플리가 여성임에도 다른 남자를 제치고 생존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따스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던 건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콘택트>에서 엘리가 불확실한 기구에 몸을 맡기고서도 귀환한 건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차가운 기체를 품을 따스함이 있었고, 그 따스함이 있는 곳은 어디나 가족의 자리였다. (반면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는 단지 차가움만이 있고 그래서 본질적인 가족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퍼스트맨>은 주인공 닐 암스트롱의 귀환을 위해 차가운 달에 슬픈 온기를 부여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닐(라이언 고슬링 분)의 딸이 죽는다. 그녀는 닐의 마음속에 묻히고 ‘견뎌낸다’라는 각오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닐은 딸의 죽음과 함께 직장에서 해고된다. 말하자면 그에겐 가족을 잃고, 가족을 지켜야만 하는 이중고의 시련이 닥쳐온다. 이때 닐은 불현듯 신문의 한쪽 면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우주인 프로젝트를 발견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프로젝트는 인류를 달에 보내려는 미국의 경쟁심이다. 그러나 닐에게는 대기권을 뚫을 때의 그 느낌을 되새기려는 훈련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대기권을 뚫는 닐의 기체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실수는 그런 고통이 닥쳐왔을 때 자신을 해방시킬 공간이 하늘뿐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닐에게 다가온 시련과 그 잠깐의 고통을 견뎠을 때 나타나는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이, 딸의 죽음은 그저 잠깐이며 이제 곧 우주 너머의 달 즉 ‘죽은 딸’과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달에게 묻는 안부


영화 초반에 죽은 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영화 후반의 달 착륙에서 화면 앞에 던져질 때, 우리는 지구와 달이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각각의 두 쇼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나란히 진열된다. 아마 누군가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던져진 정강이뼈가 우주를 떠도는 우주선의 모습으로 디졸브 되었던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 팔찌는 영화 내에서 떨어진 두 시간여의 시간을 잇는 카메라 소품이다. 닐이 죽은 딸을 그리워하다 찾은 곳은 서랍 아래 그러니까 마음속에는 차마 묻지 못한 채 외부에 넣어두었었다면, 달에 묻힌 그녀는 이제 닐의 마음 밖이 아니라 닐의 마음속에서 영영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달과 지구는 서로 일방적으로 바라만 보는 곳이기에, 닐이 달을 볼 때마다 달에 있는 그녀도 닐을 바라볼 것이라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짐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하루에 한 번 밤의 어둠이 내릴 때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단 한 번의 소망, 어쩌면 견우와 직녀의 만남에 비견될 만한 순간일 테다. 다른 점이라면 견우와 직녀는 일년에 한 번 다만 닐에게는 하루에 한 번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온 지구인에게 공유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닐이 달에 착륙할 때 했던 “나에게는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라는 말은 자신이 극복한 슬픔은 인류에게는 더 큰 슬픔이라며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우주선이 대기권을 뚫는 것이 순간인 것처럼 


그 슬픔에 관하여 논해보자. 영화에선 수많은 죽음이 나타난다. 굳이 죽음을 ‘나타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예상치 못하게 다시 말해 ‘불현듯’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의 성질을 생각해 보았을 때 병사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죽음은 ‘불현듯’ 다가온다. 말하자면 그들의 죽음은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다. 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현상을 관측하고 난 후에 비로소 현실로 받아들이는 기간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주선이 대기권을 뚫고 나가는 중력의 견딤과도 유사하다. 


우주인과 제트기 조종사들이 받는 순간의 충격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영화 내에서도 잠깐 묘사되는 ‘G-Loc’ 훈련은 사람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듯 원심력이 주는 속도의 충격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이 충격은 발사 후 대기권 밖에 나가기까지 잠깐 동안에만 주어진다. 말하자면 순간을 견딘 이에겐 지구에서 달로 가는 사흘의 편안함이 주어진다. 닐 또한 마찬가지로 불현듯 다가온 딸의 죽음이 삶을 압박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눈물을 흘리고 십 년을 버티어 낸다. 다시 말해 프로젝트에 입성해 달에서 돌아오기까지 그가 겪은 시간은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사흘의 어둠을 길게 늘여 놓은 것이다. 영화 속의 시간은 바로 그렇게 흘러가며, 이것은 우리가 네러티브 상에서 느낄 수 있는 편집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데미안 셔젤이 말하는 영화의 성질을 논할 수 있다.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시간은 상대적이다


<인터스텔라>와의 비교를 통해 선전하는 이 영화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지만, 아무래도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라는 부성애보다는 시간에 관한 은유가 더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이를테면 우주 영화가 피해갈 수 없는 시간에 관한 은유가 일종의 ‘웜홀’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는 거대한 시간의 지평선을 넘어 물리적으로 과거 위에 현신하게 된다. 그 인상 깊은 장면, 미래의 쿠퍼가 과거의 동료에게 손을 뻗는 모습은 영화상에서 두 쇼트로 나타난다. 이때 과거의 동료는 웜홀을 통과하며 겪은 그 손길을 ‘우주인의 것’으로 치부하나 사실은 블랙홀 속의 쿠퍼가 그랬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미래가 과거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명제, 정확하게는 미래와 과거는 ‘항상’ 이어져 있다며 가르강튀아라는 과학적 설명을 덧붙였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시간의 축약을 <퍼스트 맨>의 닐에게 적용해 보자. 딸의 사망 후 닐이 겪은 십 년의 시간은 영화 상의 두 시간 안에 요약된다.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상승과 위기 그리고 귀환을 미리 보여주었던 만큼 그것이 영화 전체를 모두 설명하기도 하다만, 잘 생각해보면 그 짧은 시간이 영화 전체를 은유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 영화적으로는 여기저기를 끊어놔도 자연스레 전개를 납득하게 되는 ‘편집’의 마술이다.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데미안 샤젤의 리듬


아마 착시일 수도 있겠지만 데미안 샤젤의 영화는 항상 그런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위플래쉬>에서 앤드류가 치는 드럼의 리듬과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추는 댄스의 리듬이 영화 전반의 편집과 공명한다는 점을 우리는 느낀 바가 있다. 그래서 앤드류는 영화가 하이라이트에 다다를수록 더욱 세게 고음을 내야만 했고, 세비스찬과 미아는 하이라이트까지 상승하는 탭댄스를 거쳐 그 절정부에서는 고음에 어울리는 ‘노래’를 부른다. 마찬가지로 <퍼스트맨>의 데미안 샤젤은 두 영화가 그러했듯 영화 초반에 이 영화에서 사용할 리듬을 미리 보여준 후에, 그 리듬에 맞추어 서사를 진행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편집이 어딘가 짧고 명료하다 혹은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그 느낌을 받았다면 적어도 우리는 감독의 눈을 잠깐 들여다본 것이다. 이 방법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그들의 감정에 동조하기를 감독은 애타게 원한다. 말하자면 데미안 샤젤의 영화는 인물을 통해 인물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는 히치콕과는 정반대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특성은 극을 이끄는 게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을 의미하며 이러한 특성이 우주인 닐 암스트롱의 서사와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감독을 알고 있었는 듯하다. 


영화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인간이라는 아이러니


잘 생각해보면 이런 점은 ‘이런’ 소재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극을 이끄는 게 사람이라면 다르덴의 영화처럼 그들이 언제나 상황 속에서 상황을 선택하는 주체가 되어야 마땅한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며 몹시 유명하기에 관객 누구도 그의 선택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생방송이 아니라 각본으로 촬영되는 것이기에 인물의 선택이 미리 결정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아폴로 11호의 착륙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인물이 이끌어 나가는 서사란 그들이 겉으로 표현하기 전까지 베일에 싸여있다. 즉 어린 왕자가 받아 든 상자처럼 속에 든 내용물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납득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선택한 것은 “그곳에 달이 있다”라는 조지 말로리의 현명한 대답이다. 달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그곳에 달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닐 암스트롱이 고뇌하고 또 고뇌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그곳에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뇌는 늘 항상 있었고, 늘 항상 가고 싶었지만, 늘 가지 못해 슬픔에 빠진 이가 바로 닐 암스트롱이다. (소련에 대한 질투로 가득 찬 나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갖는 혹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감정이라고 숱한 우주 영화에서 로봇과의 비교를 통해 말해왔다. 이때 인간이 아니라 로봇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는데, 그건 바로 시간을 견뎌 내는 것이다. 로봇에게 주어진 수명은 사실상 무한하여서 머나먼 우주를 항행하기에 적합한 바, 이것은 보통 영화가 인간과 로봇을 비교할 때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것으로 시간의 넓이를 대변하고는 한다. 슬픔에 빠진 이에게 시간은 그 당시에 머무른다는 점이, 마치 우주선에서 오래도록 동면하는 우주인 혹은 로봇의 성질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새까만 우주가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그들의 심정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예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감정에 대한 묘사가 아닌 이유는 닐 암스트롱이 향하는 게 ‘달’이라고 명확하게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항해는 단지 ‘언제’ 가느냐의 문제일 뿐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언제’가 눈 앞에 펼쳐질 때까지 살아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의지가 동료들의 죽음 사이에서도 꿋꿋이 살아남게 하는 원동력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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