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사랑에 관한 ‘시선’이 닿는 곳

by 수차미

장률 작가론 : 죽음과 사랑에 관한 ‘시선’이 닿는 곳, <군산>


<경주>(2014)를 통해 장률에 입문하면서 그의 초기작을 찾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경주>에서 느꼈던 설렘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장률의 초기작 다수가 해외에서 촬영되었을 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따스함이 없다고 느꼈다. 단지 카메라의 냉소 때문만은 아니다. <경주>가 죽음을 이겨내는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그의 초기작은 죽음이 사랑을 지배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우연하게 <군산>에 관한 장률의 인터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찍은 영화는 낯설게 보인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2018.11.05. ‘군산’ 장률 감독 “영화엔 일상이… 뒤죽박죽 삶과 같아”.) 이 부분에서 나는 <군산>이 반으로 분절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찾아냈다. 아니, 느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장률을 말할 때 논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죽음이 지배하는 사랑


먼저, 장률이 말하는 죽음의 계보학을 살펴보자. 장률의 초기작은 죽음을 양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다. <두만강>(2009)은 빈곤에 허덕이는 북한과 중국 사이의 두만강을 보여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조선족 소년 사이에서 피어나는 우정, 그런데 그 사랑은 죽음으로 끝난다. 성욕을 품은 탈북자에게 강간당한 조선족 누이의 모습은 사랑보다는 죽음에 가깝고, 그 오해에서 촉발된 두 소년의 갈등이 해소되지만, 조선족 소년이 지붕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만다. 빈곤으로 촉발된 생존의 고투에서 시작된 사랑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던 것이다.


<이리>(2008)는 과거에 이리였던, 익산에 사는 남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병을 앓는 진서(윤진서)와 그녀를 부양하는 태웅(엄태웅)의 이야기다. 이 삭막한 도시에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나마 남은 것은 남자들의 탐욕스러운 ‘성욕’이고, 주인공 진서(윤진서)는 이웃 사람에게 강간당한다. 태웅이 사랑하는 동생 진서조차도, 이리역 폭발사고에 놀란 어머니가 그녀를 조산했기에 장애가 생겼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에 이리의 죽음이 묻은 결과가 진서다. 이때 어머니는 사망하고,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삼켜진 모성애(母性愛)는 태웅과 진서 남매의 삶이 그리 통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반면 <경주>에서 박해일은 경주에서 얻은 사랑을 포기한다. 능으로 가득한, 그의 초기작처럼 죽음이 서린 공간에서 피어난 죽음 같은 사랑, 왜냐하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바람’이기에.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본능을 ‘사랑’이라는 의도가 이긴다. 여기까지는 그의 초기작과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같다. 장률의 초기작에서 친구와 남매간의 ‘사랑’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경주>에서는 박해일과 신민아의 ‘사랑’이 그들을 ‘구원’한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려면 박해일이 타지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초기작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타자’이다. 그래서 박해일은 ‘경주’라는 공간의 법칙에 휘둘리지 않는다. (않을 수 있다.) 이때 그의 상대역인 신민아는 보다 본능에 충실한 인물로서, 박해일을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아마도 이 유혹은 경주라는 공간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녀의 남편은 이곳 경주를 떠났고, 반면 박해일은 이곳 경주로 떠나왔다. 그래서 박해일에게 경주는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의 공간이고, 신민아에게 경주는 일상을 사는 공간이다.


즉 이 영화는 박해일의 일탈이자 신민아의 일상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은 맺어질 수 없다. 장률은 일상에서만 사랑이 맺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해일의 일상은 중국에 있으니 신민아를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이는 장률이 초기작에서 제시했던 것과는 다르다. 장률은 초기작에서 일상은 ‘죽음’이 서린 곳으로 보았었다. <두만강>과 <이리>가 그들의 터전이었고. 그래서 일상이었고,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났었다. 결국 <경주>는 장률의 필모그래피에서 변곡점일 수밖에 없다.



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의 작품 포스터 © 트리플픽쳐스


필모그래피의 변곡점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장률이 한국에 정을 붙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천안문사건으로부터 중국을 떠나 한국에서도 조선족이라는 멸시를 받았던 그는, <당시>(2004)라는 영화의 후반 작업비를 구해 떠돌다가 한국인 제작자를 만난 것을 인연으로 한국에 정착하였다. 이후 <망종>(2005)은 한국의 자본으로 만들었고, <경주>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4년에 나온 영화다. 어쩌면 장률은 이제 한국이 ‘일상’이 되었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과거의 그가 살던 ‘일상’이 ‘천안문’이라는 ‘죽음’이었다면, 지금의 ‘일상’은 다소 갈등이 있더라도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장률은 자신을 ‘타자’로 인식했던 슬픔에서 벗어났다. 중국에서의 고된 삶은 조선족인 그에게 ‘이방인’의 인식을 심어주었으나, 한국은 그런 장률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영화인인 그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따스한 ‘것’이었고, 그래서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그는 여전히 ‘타자’였으나, 차가운 ‘죽음’에서 따스한 ‘사랑’으로 정체성이 변화했다. 그런 모습이 <춘몽>의 예리(한예리)에게 담겨있다.


<춘몽>에서 예리는 조선족으로서, 세 남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늘 함께하던 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는 갑자기 세 남자를 제거한다. 일행이 사라지자 예리는 ‘당황’하고, 화면에는 ‘춘몽’이라는 글자가 올라온다. 맥락상 세 남자는 예리의 ‘꿈’에 불과하다고 읽혀진다. 반면 영화의 마지막에는 예리가 사라지고 세 남자가 ‘당황’한다. 전과는 달리 이제는 예리가 세 남자의 ‘꿈’에 불과하다고 읽혀진다. 다시 말해, 영화는 ‘춘몽’이라는 제목을 통해 ‘누구’의 꿈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작품이 아니라 장률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영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꾸는 꿈이 아니라 ‘장률’이 꾸는 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춘몽>의 인물들은 조선족인 예리를 포함해 사회에서 겉도는 타자인데, 다른 표현으로는 이방인이다. 이때 영화의 결말 둘 중 무엇을 택하든, 그들이 이방인임은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장률이 가진 두 가지 정체성, 중국과 한국 중 무엇을 택하든 그는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칭호는 ‘조선족’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조선족인 장률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도, 조선족이라고만 말할 뿐 국가를 특정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누구’ 혹은 ‘어느’라는 선택의 기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의 꿈이라기 보다는 ‘무엇’도 택할 수 없다는 고뇌만이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반전이 있다. ‘무엇’도 택할 수 없으나 ‘무엇이든’ 사랑스럽다. 영화에서 한량으로 나오는 네 사람 모두 밉지가 않다. 용서받지 못하는 윤종빈과, 사경을 헤매는 박정범과, 똥파리 같은 양익준과, 최악의 하루를 사는 한예리가 있다.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싸우지만 금세 화해한다. 즉 사랑스러움이 죽음을 이겨낸다. 영화의 흑백 톤조차 이들의 사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칙칙한 현실을 표현하는 흑백 속에서, 사랑만큼은 ‘칼라’다. 우리가 ‘흑백’을 먼저 보든 ‘칼라’를 먼저 보든 간에, 사랑의 기운에서 슬픔을 느낄 시간은 없다. 분명 슬픈 공간이지만 따스하다는 점에서 꿈만 같고, 그래서 제목이 ‘춘몽’이다.



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의 한 장면 © 트리플픽쳐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네 사람이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특이했다. 장률의 초기작에서 일상은 죽음이 가득한 곳이었고,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다. 척박한 땅과도 같아서 사랑이 결코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곳이었다. 반면 <경주>에서 장률은 신민아의 ‘일상’ 속에 박해일을 초대한다. 말하자면 장률은 자신의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일탈’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률은 ‘일상’과 ‘일탈’을 보여주기만 할 뿐 연을 맺어주지 않는다. 박해일과 신민아는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의 자리로 돌아간다. 즉 장률은 무엇도 택하지 않았다.


‘이방인’ 장률은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둘 중 무엇을 택해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그저 그렇게 살아가도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장률에게 풍경은 그저 풍경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다. 다시 말해, 풍경은 변하지 않고 사람은 변한다. 단지 사람이기에 마음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경주’라는 공간은 하나의 기표로서, 각자에게 ‘일상’과 ‘일탈’이라는 기의로 독립한다. 박해일에게 경주는 ‘일탈/죽음’이고, 신민아에게 경주는 ‘일상/사랑’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설명할 때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한자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춘몽>에서 예리라는 ‘기표’를 두고 세 남자의 ‘기의’가 각각 달랐듯이 말이다.


죽음과 사랑에 관한 단상


<경주> 이전의 장률을 이방인, 죽음,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면, <경주> 이후의 장률에게는 ‘이방인’이라는 키워드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무엇인지 깨달은 장률에게 그 키워드는 사라졌다. 장률은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관찰자’로 내세운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건, 어디든지 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죽음과 사랑에 관한 단상들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이번에 개봉한 <군산>은 그런 영화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군산’이다. 원래 목포에서 촬영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사정상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그리하여 <군산>이 되었다. 두 도시의 공통점은 일제 강점기에 주요 항구였다는 것이다. 장률은 도시 전체에 남은 적산가옥이 지금에 와서는 ‘사랑스러운’ 곳, 관광지로 변모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역사와 정서가 맞닿은 곳”이라는 그의 설명, 그러면서도 “공간을 목포에서 군산으로 바꾸니 영화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씨네 21> 1176호)


장률은 목포와는 달리 군산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서 “군산은 목포보다 훨씬 부드러웠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영화의 모든 것이 달라진 이유는 ‘연인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즐겨 찾는 군산은 그들의 사랑이 듬뿍 담긴 도시이다. 이곳은 자동차 공장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산가옥이 있는, 현재와 과거가 존재하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공장의 차가움 그리고 가옥의 따스함. 바로 그렇게, 이곳을 방문한 연인들은 도시의 분위기를 순환시킨다. 신도심에서 구도심으로 파고들면서, 현재의 차가움을 과거의 따스함으로 덥혀낸다.


이것을 장률식으로 번안하자면 죽음이라는 현재/현대, 사랑이라는 과거/일제일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현재)은 사랑(과거)으로 덥혀(덮여)진다. ‘죽음이 지배하는 사랑’이 장률의 초기작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죽음(현대) 속에 자리한 사랑(일제)이라는 이 영화는 장률이 다시금 초기로 돌아간 게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장률의 위치가 ‘관찰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관찰자’ 장률이 <경주>에서 ‘일상’에 뛰어든 ‘일탈’을 보여주었고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영화는 ‘사랑이 지배하는 죽음’이었었다. 나는 이러한 차이, <경주>와 <군산>이라는 한국의 지명을 딴 두 영화가 장률이라는 사람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의 한 장면 © 트리플픽쳐스




뒤바뀐 사랑의 자리


두 영화는 ‘지배’라는 단어를 두고 ‘사랑’과 ‘죽음’의 자리가 뒤바뀐다. <경주>가 죽음 속에 뛰어든 박해일이라면, <군산>은 사랑 속에 뛰어든 박해일이다. <경주>에서 박해일은 신민아에게 관심 있으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군산>에서 박해일은 민박집 주인(정진영)과 대화하는 문소리를 ‘질투’한다. 즉 ‘경주’는 죽음이고 ‘군산’은 사랑이다. 요약하자면 사랑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경주>, 죽음에서 사랑으로 향하는 <군산>이다. 이때 두 박해일은 원래 자리로부터 ‘도피’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박해일이 도피해온 이유. <경주>에서 박해일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경주로 온다. 영화의 시작부터 박해일은 담배 좀 끊으라는 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군산>에서 박해일은 형수(문소리)와 함께 군산에 내려온다. 영화의 시작부터 박해일은 여기 왜 왔느냐고 그녀에게 물어본다. 두 박해일은 지인의 장례식(죽음) 그리고 형수와의 여행(사랑)이라는 이유로 도피해왔다. 또한 공교롭게도 ‘경주’는 왕릉이라는 ‘무덤’으로 가득한 곳이고, ‘군산’은 ‘커플’들이 자주 놀러 오는 곳이다.


이처럼 장률은 두 영화를 도치했다. 도치해서 말하려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잠시 미루어 두고, <군산>에 대해 말해보자. 영화의 큰 줄기는 형수를 만난 박해일이 군산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바뀌어서 영화로 ‘제시’된다. <군산>은 122분이라는 러닝 타임의 ‘정 중앙’을 두고 분할되었다. 60여 분까지는 군산에 도착한 두 사람이 산책하고 헤어지는 이야기이고, 중간에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타이틀이 뜬 다음, 비로소 그들이 군산으로 향하게 된 이야기를 보여준다.


장률은 여행의 기억은 늘 혼재하기 마련이라며 “사실과 기억의 순서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위와 동일 기사.) 그럼에도 이런 구성은 다소 의문이 든다. 아마도 추측건대, 장률은 <경주>의 박해일처럼 영화의 시작을 낯선 곳으로의 ‘도착’으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군산에 남겨진 기차 건널목의 이미지가 영화 초반에 ‘사진’으로 제시되듯, 우리가 열차가 처음 도착하는 시오타 역에서 놀랐던 것처럼, 박해일이 ‘군산’으로 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님을 장률은 말하고 있다. (반면 민박집 주인의 취미는 ‘일상’을 찍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탈’에 해당하는 문소리를 찍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군산’이라는 ‘사랑스러운’ 공간이 ‘일탈’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다. <경주>에서 보았던 ‘일탈/죽음’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잊고 있었다. 즉 장률이 허리를 절단해 양쪽을 도치시켰던 이유는, <군산>의 도입부를 <경주>의 도입부와 ‘일치’시키기 위해서다. 정반대인 두 영화를 ‘일치’시키려면 이런 수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군산>이 선형적인 이야기 흐름이었을 경우, 그러니까 전반부와 후반부를 도치시키지 않았다면, <경주>처럼 ‘일탈/죽음’이 된다.


<군산>과 <경주>가 ‘일탈/죽음’으로 공명한다는 가정도 흥미롭지만, 이것이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아주 명료하다. 선형적인 흐름의 <군산>은 <경주>가 보여주지 않았던 ‘전반부’가 붙어 있어서, 박해일이 떠나온 공간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산>을 선형적으로 보면 군산에 내려오기 전 서울에 있던 박해일은 ‘백수’ 취급받는다. (그렇지만 효자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일상’은 일거리의 ‘죽음’인 셈이다. 그런 그가 군산에서는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즉 도치된 <군산>은 ‘시인’ 박해일이 ‘백수’가 되는 흐름이다.


도치된 <군산>은 ‘시인/군산’에서 ‘백수/서울’이 된다. 선형적 <군산>은 ‘백수/서울’에서 ‘시인/군산’이 된다. 또한 군산은 ‘일탈’의 공간이고 서울은 ‘일상’의 공간이다. 이때 서울에서 군산으로의 이동, 그리고 그 반대의 이동은 모두 형수를 ‘사랑’하기에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장률이 <군산>을 도치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만약 박해일의 이야기가 서울에서 시작했다면, 그것은 ‘백수/일상’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일상’은 ‘사랑’스러워서 굳이 ‘군산’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 군산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형수를 사랑하기에는 서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서울에서 시작한 <군산>은 애초에 출발할 수가 없는 영화다.


반면 <군산>의 앞뒤를 도치할 경우, 박해일이 군산으로 온 이유는 ‘사랑/군산’이라는 기표를 통해 ‘일탈/죽음’이라는 형수와의 ‘불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즉, 그는 ‘군산’에서 직업을 얻어 ‘시인/사랑/군산’이라는 기표의 행렬을 완성한다. 박해일은 ‘군산’에서 사랑과 직업을 얻었고, 장률은 ‘군산’이 아무리 사랑스럽더라도 결국엔 ‘일탈’이기에 그들은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경주>에서의 박해일이자, <군산>에서의 박해일이다. (이 물음에 대한 장률의 대답은 부제목에 있다. 서울에서는 거위가 꽥꽥거리는데, 군산에서는 박해일이 ‘거위’를 노래한다. 군산을 영화의 도입부로 도치할 경우, 꽥꽥거리는 거위를 노래하는 박해일이 된다. 그래서 방점은 군산에 찍힌다.)




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의 한 장면 © 트리플픽쳐스



군산에 닿은 시선


‘군산’은 박해일과 문소리의 일탈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에 결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는 <경주>에서 그 기억을 끌어온다. 그래서 사실 <군산>은 작품 하나로 보았을 때와 ‘장률’의 이름으로 보았을 때가 다른 영화다. ‘작품’ 별개로의 <군산>은 다른 평자가 밝혀주리라 생각하고 이 글은 장률이라는 감독에 대해 줄곧 나아갈 것이다.


일탈이란 건 일상에서 파생되므로, ‘일탈’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일상을 먼저 전제하는 게 맞다. 이야기란 그런 방식으로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란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이탈해 ‘일탈’이 될 때, 그것은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즉 작은 차이가 ‘거대하게’ 변하는 게 ‘일탈’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률은 이미 거대해진 ‘일탈’을 영화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박해일과 문소리의 우연한 만남은 ‘작은’ 사건이었으나, 점점 커져 ‘군산’이라는 거대한 ‘일탈’이 된다. 즉 <군산>은 일탈에서 일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지닌다.


장률은 ‘일탈’이 ‘사랑’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해일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이미’ 군산에 있다. 그런데 영화의 도입부는 사실 결말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영화의 본래 이야기는 서울에서 군산으로 가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일탈’은 정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으로써 ‘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친한 선배와 결혼했던 여자를 취한다는 건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으나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박해일과 문소리의 사랑은 비정상적인 것으로써, ‘일탈’조차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일탈’도 사실은 ‘정상’적인 것이므로 그것이 사랑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 또한 ‘정상’이다.


이런 흐름으로 영화를 줄곧 보면 어딘가 미묘한 지점이 있다. 영화의 앞뒤를 도치했을 때와 도치하지 않았을 경우에 박해일은 ‘일탈’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의 앞뒤를 도치했을 때는 박해일이 ‘일탈/군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반면 영화를 본래의 흐름으로 보면 박해일이 ‘일탈/군산’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소리는 ‘일탈’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박해일이 문소리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이므로, 박해일의 심정이 ‘일탈’쪽으로 변화할 뿐 문소리의 마음은 줄곧 ‘일상’이다. 즉, ‘일탈/군산’이 ‘사랑/군산’을 합리화할 수 없으므로 이 영화는 ‘박해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박해일은 말은 하지 않지만 문소리와의 ‘성적 일탈’을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소리는 그것을 칼같이 쳐낸다. 함께 ‘군산’으로 ‘일탈’했던 건 박해일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박해일은 각방을 쓰자는 문소리의 말에 토라져서는 식음을 전폐한다. 그러면서 민박집 주인과 오순도순한 문소리를 질투한다. 그러나 문소리는 민박집 주인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 문소리는 항상 ‘일상’을 살고 있었다. 장소는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군산에 오기 전에도, 술을 마신 문소리는 모텔촌에 자신을 데려온 박해일을 일갈한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문소리는 박해일이 ‘일탈’을 허락하고자 부른 그녀의 전남편을 ‘옹호’한다. 함께 떠돌던 낮에도, 문소리는 전남편의 가게에 찾아갈 행패를 부릴 뿐 박해일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결국 <군산>에서의 사랑은 박해일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사랑/군산’이라는 기표는 ‘일탈’로 이어지지 못한다. ‘일탈’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이 경우 문소리는 철저하게 죽음을 방어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군산>에서의 문소리와 <경주>에서의 박해일은 서로 같은 캐릭터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제시한 가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군산>과 <경주>는 ‘일탈/죽음’으로 공명한다. 그 공명의 대상은 문소리이며, 장률의 초점은 박해일에 맞춰져 있다. 이때 박해일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선형적인 흐름에서 박해일은 ‘백수/서울/죽음/일상’이고, 도치된 <군산>에서는 ‘시인/군산/사랑/일탈’이다. 그러나 영화는 문소리를 중심으로 ‘분절’되기에 둘 중 어느 흐름을 따라가도 무방하다.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장률을 말할 때 논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의 이야기가 선형적이든, 도치되어있든, 메시지는 명확했다. 박해일이 군산으로 온 이유는 ‘사랑/군산’이라는 기표를 통해 ‘일탈/죽음’이라는 형수와의 ‘불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는 ‘가정(<경주>)’은 합당하다. 또한 <군산>에서의 박해일이 <경주>에서의 박해일과 동일한 <군산>에서의 문소리를 사랑하는 건, ‘경주’를 닮고 싶은 ‘군산’이라는 가정도 합당하다. ‘일제/군산’ 그리고 ‘왕릉/경주’라는 두 공간은 과거에는 죽을 곳이었고 지금은 사랑스럽다는 점에서, 현재를 이겨내면 사랑스러운 미래가 올 것이라는 박해일의 마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군산>은 구질구질한 미래의 군산에서 사랑스러운 과거의 서울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한국에 정착한 장률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중국에서 미래의 한국으로 온 그에게, 한국은 모호한 곳이다. 그는 이제 이방인은 아니지만 관찰자이다. 그에겐 여전히 선택할 권한이 없다. 죽음과 사랑 사이에서 그는 망설인다. <군산>에서도 마땅한 결말이 선택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박해일은 구박받는 백수인가 사랑받는 시인인가. 그럼에도 나는 <군산>의 문소리에게서 장률의 확고함을 본다. 일상은 늘 견고하며, 일탈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즉 일상과 일탈은 분명하게 둘 다 존재하지만, 서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으니 그저 관찰만 할 수 있다. 장률은 관찰자로서 이 두 세계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분할되어 있다. 군산은 일제라는 구도심과 현대라는 신도심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경주는 왕릉이라는 과거와 문화재라는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죽음과 사랑은 공존하지만 섞일 수는 없다. 그런 모호한 태도는 아마도, 작품 속에서 줄곧 언급되듯 ‘빨갱이’라는 정치적인 이분법으로도 이어진다. ‘가짜’ 조선족을 옹호하면서도 ‘진짜’ 조선족은 싫어하는 문소리. 장률의 시선은 그래서 군산으로 향했고, 우리도 그러하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찍은 영화는 낯설게 보인다고 그가 말했는데, 우리의 일상은 이미 낯설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일상이지만, 잡음이 많아서 ‘항상’ 일탈스럽다. 이에 대한 장률의 대답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인용문에서 강조표시는 필자다.


“어떻게 보면 자폐란 소통의 통로가 막힌 것이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친구(민박집 주인의 딸)는 누구보다 더 소통을 갈망합니다. 윤영(박해일)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위로가 돼죠. 우리 삶이 그런 것 같아요. 불화의 시대엔 누구나 자폐증을 앓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중앙일보. 2018, 11,08. 옌볜 윤동주는 좋아하면서 왜 중국동포는 싫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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