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으로 남거나, 혹은 불완전한 본인이 되거나.

by 수차미

<완벽한 타인>, 완벽한 타인으로 남거나, 혹은 불완전한 본인이 되거나.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문제를 안고 있고, 대다수 사람이 상처받고 살아가죠. 그런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도덕적으로 나쁜 문제를 모두 덮고 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친한 사람일수록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그래서일까. 이 감독은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을 'Intimate Strangers(친밀한 타인)'로 지었다. (연합뉴스. 2018/10/28. "각국서 리메이크한 '완벽한 타인' 모아 영화제 열고 싶어요")


다음과 같은 감독의 인터뷰로 글의 서두를 연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오히려 관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감독의 논지는 이 영화 115분의 간결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제를 완벽하게 뒤집은 것이 이 영화의 제목 <완벽한 타인>이다. 그러나 이때 타인이 지옥이라면, 자신은 천국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과 섞이지 않는 게 천당으로 향하는 지름길일까? 홀로 고립되어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게 천국이라면, 타인과 소통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은 그렇게 묻는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타인을 정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고, 과거와는 달리 혼자서도 잘살 수 있는 현대 사회이기에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타인이 되었노라고.



영화 <완벽한 타인>의 작품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는 타인이에요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철학은 어려우나 이 문장만큼은 어렵지 않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아니라 타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혹은, 내 편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네 편’과 ‘내 편’이라는 진영논리는 그렇게 생겨난다. 이 유치한 판 가르기에 싫증이 난 사르트르는 그 어떤 철학보다 무거운 한마디를 던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르트르의 명제를 영화관에 적용해본다면, 스크린 속 세계는 현실과 분리된 디제시스(diegesis)의 세계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르게 말해서 그(스크린)는 타인이며 그곳은 현실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는 지옥 같은 곳인 셈이다.


영화가 상상력을 품는 곳이라는 ‘꿈의 공장’ 찰리 채플린의 단언이 사르트르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버림을 통탄하며, 우리는 이 영화에 접근해야 한다. 영화에 나오는 네 명의 커플과 한 명의 솔로들은 하나의 탁자에 앉아 신명나게 담판을 벌이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1984년의 겨울 속초 영랑호에서 시작한 이 영화가 34년이 지나서 그들의 중년이 된 모습을 비출 때, 그러나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은 여전히 개기월식이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스크린 안의 시공간은 기본적으로 가상의 공간이라는 점을 상정해야만 한다. 데미안 샤젤의 <라라랜드>가 봄부터 겨울까지를 가정하면서 노래를 부름에도 결국에는 그곳이 영화 속 “LALA, LAND.”임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것을 명심하라. 이 영화도 마지막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이 꿈과 환상이었다면서 본래의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의 내용은 언제부터 ‘월식’이었던 걸까. 혹은, 이 월식은 정말로 끝나버린 걸까. 그들은 스마트폰을 두고 파국에 다다랐던 적이 있는 걸까.


<라라랜드>의 제목을 그대로 읽으면 홍상수의 <하하하>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두 영화의 제목은 몹시 행복한데 실제 영화는 그리 순탄치 않게 끝난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타인>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 준모(이서진)의 아내인 세경(송하윤)이 벗어 던진 반지가 탁상 위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며 이곳이 <인셉션>의 오마쥬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라라랜드> 혹은 <인셉션>과의 교집합을 찾아내 이 영화에 필사적으로 적용하는 게 낫다. 이 영화가 만약 <인셉션>처럼 꿈 속의 꿈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해당하는 ‘꿈 설계자’는 누구인 것이며 꿈의 건축자에 해당하는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는 누구인가.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꿈의 해석자


한여름 밤의 꿈이 찰나로 끝나는 것처럼 이들의 대화는 개기월식의 시작부터 끝까지다. 어쩌면 이 개기월식은 늑대인간의 개화를 부르듯이 인간의 욕망을 겉으로 뒤엎는 단초일 수도 있다. 달빛을 머금은 집안에서 이들은 커튼을 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몸소 받으니, 내면의 욕망을 부글부글 끓어 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들의 분위기가 싸해짐과 고조됨을 반복하며 마치 신체의 오르가즘 패턴을 보여주는 듯할 때마다, 카메라가 그들을 저 멀리 보이는 개기월식 속으로 던져버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면 아마도 조르주 멜리어스의 그 달님이다. 달은 어둠의 장막 뒤에 자꾸만 숨으려 하는데 이들의 싸움은 봄의 산불처럼 번져버리니, 눈에 로켓이 박혀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분위기가 반복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심리는 겉으로 드러나기만 할 뿐 다시금 쥐구멍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아주 수치스럽고, 인물을 학대하는 듯한 이 구성을 보며 과연 이것이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인지를 생각해보았고, 영화의 원작이 이탈리아의 그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릎을 탁치며 납득하게 되었다. 애초에 이들의 눈빛은 달빛을 받는 쪽이 아니라 쏘는 쪽이었던 것이다.


<캐럴>에서 토드 헤인즈가 말했던 시선의 문제는 아마도 이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인물의 관계를 머리속에 정립하고 나면, 다시 볼 때 그들의 시선 교환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저 그들의 관계만으로 시선을 합리화하는 얄팍함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예진과 준모의 불륜관계는 마지막에 가서야 짤막하게 언급되므로, 사실 귀걸이 하나만으로 묘사되는 이것이 정말로 불륜에 대한 근거인지도 모호한 상황에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귀걸이는 히치콕스럽다. 다만, 1회차 관람에서는 인물 사이에서 작용하는 스릴러이고 2회차 관람에서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스릴러이다. 1회차에서 그것은 그들은 알았고 우리는 몰랐던 사실이다. 2회차에서 그것은 우리는 알았고 그들도 알았던 사실이다. 말하자면 정보의 격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작과 끝 사이에 자리 잡은 인물들의 거침없는 폭로전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보란 것을 따로 설정할 수 없다. 꿈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기도 한다. 결국 이 꿈의 해석작업은 우리가 무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데, 카메라가 보여주는 관계의 대학살이 특정 인물에만 편중되어있음을 고려해볼 때 그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를 가정해 보는 몹시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이 자리에 자리 잡는 것은 게이인 영배(윤경호)일 것이고 순대(작중 출연 없음)일 것이다. 순대는 남자들의 모임에서 제외된 인물이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이 게임, 하나의 작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반면 영배는 작품이 진행되면서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비난은 태수(유해진)가 몽땅 뒤집어쓴 채로 자신은 씁쓸함만을 남기고 퇴장한다. 태수는 방패였고 그는 방패 뒤의 창이었다.


“좋잖아요. 우리 행복해져요.” <꿈의 제인>에서 성 소수자인 제인(구교환)은 소현(이민지)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데 소현은 그에 이렇게 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제인이 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보았으며 마침내 소현은 제인을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 제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자 꿈의 작업을 통해 변형된 것이기도 했으며, 소현은 자신이 보고 싶은 제인의 모습만을 빼와 ‘꿈의 제인’으로 재탄생 시켰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태수와 영배의 휴대전화 교환은 ‘이 작은 것에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라는 설명처럼 그들의 삶을 하나로 압축해 놓은 꿈을 교환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꿈을 교환한 이들은 자신의 꿈을 부득이하게 이 자리에 노출하게 되는 불상사를 일으켰고, 그러나 개기월식이 만들어내는 달의 커튼이 이 세계를 꿈처럼 몽루하게 만들었으므로 다행히도 비밀은 지켜졌다. 태수의 그녀와 영배의 그는 그들에게 반성할 점을 심어주고 사라진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완벽함과 친밀함


우리는 집단에 속하면서도 모체를 자신처럼 여기지 않았다. 이 좁은 세상에서 ‘나’라는 마음속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도피도 한계는 있다. 지옥에 맞서 ‘나’의 범주를 좁히던 우리는 발 디딜 곳조차 사라졌다. 마침내, 이 세계에 속한 우리는 애초에 쉴 수가 없다는 논리에 도달하고야 만다. 우리는 ‘타인’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나’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타인’보다도 더 모르는 게 많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탈리아 원제는 <퍼펙트 스트레인져>였으며, 감독이 지은 영제는 <친밀한 타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독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서 이 영화가 어떻게 ‘완벽한’ 타인에서 ‘친밀한’ 타인으로 변모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완벽한 이와 친해지는 것은 힘들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격을 재게 되고, 자신보다 우월하면 기게 되고 아래인듯하면 얕잡아 본다. 그것은 이 사회가 생존의 법칙으로 교묘하게 짜여있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것이며 그 누구도 이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김씨 표류기>의 김씨처럼 사회를 떠나 한강으로 향한다면야 모를까, 심지어 그도 사회의 법칙에서 벗어나 생존의 법칙에 귀의했음을 떠올려본다면 사실상 우리는 법칙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인물 간의 친밀함을 완벽함으로 변환하는 과정이 과연 옳다고 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부자이고 식사자리를 마련하는 이는 성형외과 원장과 정신과 의사인 부유층이다.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 부부의 배경에는 속도위반으로 결혼했고 장인어른이 그것을 반대했다는 말이 나돌지만, 장인어른이 20년동안 석호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결국에는 이 집안 전체가 의사 집안이라는 것을 나지막이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강남에 병원을 개원하기 위해 분양을 받았다고 자랑하는데, 이런 자랑을 중화하려 영화는 석호가 수십억대의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에피소드를 설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에피소드가 과연 이들의 완벽함에 흠집을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는다. 그가 잃은 돈은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돈이지만, 그가 버는 돈 또한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돈이다. 끝내 그들과 우리는 결코 친밀해지지 못한다.


또한, 그 부부의 관계는 어떠한가. 부동산 사기를 숨기며 장인어른에 대한 열등감을 품은 석호는 정신과 의사인 예진을 내버려 두고 다른 의사에게 우울증 치료를 받는다. 동시에 예진은 그런 석호를 다독여 주는듯하면서도 준모와 불륜관계인데, 정작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딸아이에게는 섹스를 소중히 하라며 가방을 뒤져 콘돔을 찾아내는 기행을 보인다. 이때 석호는 자신이 딸아이에게 콘돔을 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딸아이에 대응하는 아내에게 콘돔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섹스는 하고 싶으면서도 아이는 낳기 싫다는 석호의 암시는 피임이라는 점에서 정상적인 부부관계이나, 이들은 사실 섹스를 하지 않으면 치유되기 힘든 갈등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이 콘돔은 관계의 고무막으로 작용한다. 결국 실제로 피임이 어떻든 간에 석호는 예진에게 콘돔을 써야 한다며 말해서는 안되었다.


석호는 예진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정신과 의사인 당신은 가슴 속을 치료하는 것이고 성형외과의사인 자신은 가슴 밖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만 이 대사에 유의한다면 아무쪼록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형외과의사는 가슴을 예쁘게 해주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가슴을 치유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석호와 예진이 일대일로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예진의 치유행위는 정신분석학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치료되었음을 선언하기도 모호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은 치료행위이다. 반면에 석호는 물방울 가슴이라는 말을 자꾸만 강조하면서 자신의 직업이 환자에게 자신감을 돌려주는 것임을 역설하는데, 그렇다면 이 자신감은 석호가 위대한 마법사 오즈(OZ)가 되어 양철 나무꾼의 가슴에 심장을 넣어주듯 한 것인가? 단언컨대 그것은 진짜 심장이 아니라 플라시보를 부르는 헝겊쪼가리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석호의 직업은 물방울처럼 무언가를 불어넣기만 할 뿐, 그것이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전적으로 환자의 몫으로 남겨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타인과 자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타인이 아닌데, 정작 타인이 되어 서로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예진(김지수)이 제안한 ‘진실게임’은 게임으로 시작해 폭탄으로 끝을 맺는 파급력을 보여준다. 부부와 연인 사이인 이들에게 닥쳐오는 가혹한 시련은 타인과 소통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현대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의 문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는 영화에게 묻는다. 과연 이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게임이 자신이 아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이기는 할 텐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진실이 아닌 경우도 분명 있다. 그렇다면 이때 이것은 진실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호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객관의 세계와 주관의 세계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진실을 평가하게 되고, 이 영화에서는 각각의 인물이 서로를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그것을 채택한다.


수현(염정아)과 태수는 부부관계이지만 태수가 수현을 억압하는 쪽인데 그것은 수현이 낸 교통사고의 죄를 태수가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수현은 태수가 고시원 생이던 때부터 줄곧 뒷바라지를 해왔으므로 이번에는 그가 태수의 앞길을 막았다는 자괴에 빠져서 1년 동안 숨죽여 지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가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수현이 소극적인 성격인 것은 태수가 자신의 죄를 대신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태수라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못돼먹었고 그에 협조한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악은 평범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태수라는 가부장적인 악에 동조했기에 자기도 모르게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게이 담론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수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성 그리고 아내의 억압된 위치를 말하고자 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이것이 여성주의로 연결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아주 불안하게도 그녀가 다시금 태수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을 내린다. 이 여성주의의 혁명은 그렇게 꺼져버리고야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결말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기를 역설적으로 원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기보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갈등 봉합의 장이다.


반면 영화에서 가장 희망에 찬 것은 세경일 텐데, 그녀는 개기월식 속에서도 준모를 향해 거친 혁명을 일으켰으며 영화가 결말에 보여주는 꿈의 환상에서도 반지를 매만지고 “나는 살아남을 거에요.”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즐겁게 운전해 간다. 어쩌면 이들이 달리는 도로는 어느 로드무비의 마지막 장면처럼,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에서 두 ‘가짜인간’들이 희망찬 미래를 향해가는 것처럼 자신들이 인간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현재에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세경은 이 꿈의 설계자 ‘아리아드네’로써 반지를 돌리는 역을 맡았으므로 분명 이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영화 밖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물 중, 나이가 가장 젊다는 점에서도 그런 희망이 보인다. 또는 작중 여인들에게 어린 것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는 점도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세경은 남자를 발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다. 작중의 중년들은 모두 섹스 결핍을 겪거나 겪는 중인데 오직 세경만이 전화통화를 통해 수캐와 자동차 안에서 준모를 발기시킬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경은 자신을 타락시킨 준모를 향해, 응당 부당한 것에 불의를 참지 않고 짙은 화장을 통해 다시 일어섬으로써 남성의 발기는 여성의 궐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영화의 도입부가 세경과 준모의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이었던 것은 이 영화 다름 아닌 세경의 영화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영배에 대해서 험담만을 줄곧 늘어놓고 그가 상처란 상처는 모두 받은 다음에, 마치 스크린 뒤에 숨어 그들을 관찰하는 우리를 저격하듯이, 스마트폰 교체를 통해 스크린의 밖으로 튕겨 나오는 그의 마음을 달래주지 않은 채 쓸쓸하게 자동차를 멈추고 운동이나 하는 친구로 묘사해버렸다. 이 영화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받는 다는 점에서는 여성 해방을 말하고 싶다 혹은 말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시대에 응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영배의 자리는 없다. 이 영화에서 결말이 제시되지 않는 인물은 영배밖에 없다. 아마도 그건 영배가 홀로 집들이에 왔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에 그가 이 집에 들어서는 장면부터 관심이 온통 쏠리더니 마지막에는 모두가 외면해버린다. 단지 게이 커플이고 그래서 못왔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영배는 깨진 스마트폰 가격까지 감당해야 한다. 물론 태수가 갚아주겠지만.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들의 관음증


반면 준모는 돈은 많은데 갖은 사업을 다 말아먹은 이상한 친구로 그것이 자신의 잘못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바보이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의 학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한다고 말하는데, 영화만 놓고 보면 오히려 준모가 영배를 따돌리는 것에 주도적이고 또한 실제로 성희롱을 일삼는 등 좋지 않은 언행을 보여준다. 교육의 수준이 인성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 그의 교육수준은 준모의 언행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하므로 그는 그저 자신의 열등감을 성욕으로 치환하고 다니는 불한당일 뿐이다. 심지어 이 열등감은 타인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니 그의 부글부글 끓는 성욕은 보다 본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준모의 행실이 개기월식 그 달빛이 가려지는 타이밍에 밝혀지는 것은 흡사 달빛 아래 강해지는 늑대인간이 달빛을 잃어 힘을 상실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꿈의 설계자 세현과 소심한 영배 그리고 늑대인간 준모가 한데 어우러지는 이 성의 연극에는 석호와 예진 그리고 태수라는 외행성이 겉돌고 있다. 이들은 높은 교육수준의 인텔리로서 혹은 성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딸에게 성을 가르치는 것에 더 열중한다는 점에서 선생님이 더 어울린다. 아주 분명하게 석호와 예진과 태수는 보수적이며 영배와 준모와 세경은 진보적이다. 그리고 수현은 억눌린 여성으로서 무슨 성향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녀의 속옷 색깔은 끝내 밝혀지지 않으며 사실은 억압의 증표를 벗어던진다는 의미의 노팬티였음을 목격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의 노팬티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중단해야 하는 걸까. 이것은 우리가 스크린을 지긋히 응시하듯이 마음속에 풍기는, 나보다는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은 관음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중년의 바람을 다룬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타자’에게 설명할 때 ‘유교’라는 가족의 틀만큼 적절한 것이 또 없기에, 한창 부부금실이 좋아야 할 중년이 바람을 피운다는 건 그다지 보기 좋지 못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단언컨데 중년의 불륜이라는 소재는 그것이 금기시되고 터부시되는 만큼 사람들을 유혹하는 힘이 있다. 금기라는 것은 항상 자신을 깨어달라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히치콕이 <이창>을 통해 관음증이라는 테마를 공공연하게 퍼뜨렸듯이, 극장 안에서만큼은 관객들이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관음증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영화가 19세 제한이 걸려있음에도 삼백만이라는 의미 있는 수치를 달성한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아마도 이 영화의 주요 관객은 중년일 것이다. 등장인물과 비슷한 나이라는 점에서 몰입도가 높다. 이때 그들에게는 어떠한 삶의 아쉬움이 있다. 중년이란 나이는 인생의 허리에 자리한 만큼 돌아가자니 아쉽고 나아가자니 모호하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스크린과의 대화로 끌어들인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최근 증가하는 황혼이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녀를 다 키우고 나서 이혼하는 부부를 황혼이혼이라고 칭하는데, 부모가 없으면 자녀가 곧게 자라지 못할 것을 염려해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함께 살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 값이 아까워 중간에 나오지 못하는 어느 불쌍한 관객에게도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중년 부부와 영화관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함께한 것에 대한 비용이 매몰되어 버릴까 두렵다는 점이다. 부부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염탐이 반복되는 구도일 뿐이고, 영화와 관객의 관계 또한 관객이 영화를 들여다볼 때 다 알거나 다 느꼈다고 생각해 보아도 끊임없이 생각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지독한 관음증은 우리가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그렇지만 대외적인 의무에 얽매여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만 같은 강박감에 시달리기에 생겨난다. 이것을 영화의 제목을 빌려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사이인 <완벽한 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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