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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9. 2019

오마주 투 오즈 : 야먀다 요지 <동경 가족>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의 현대를 그려본다는 것













오즈 야스지로 사망 50주기를 맞아 제작된 이 영화는 <동경 이야기>를 오마주했는데, 전체적으로 방향이 다르다. <동경 이야기>에서 그들은 마치 척력으로 공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동경 가족>에서 그들은 하나의 자장 안에 있는 듯 보인다. 오즈의 아버지가 쓸쓸하게 홀로 남는 것과는 달리, 야마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둘 다 동일하다. 그러나 <동경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던 배가 <동경 가족>에서는 노부부를 동경에 데려온 페리선으로 설명된다. 즉 <동경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쓸쓸함이 물 위에 흘러가는 것이라면, <동경 가족>에서 아버지의 쓸쓸함은 자신의 삶 위에서 흐른다. 


요컨대 야마다 요지는 오즈를 동정한 것 같다. 다른 시대를 살았으나 비슷한 고민을 할 나잇대인 그에게, 오즈의 영화는 단순히 관객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영화가 개봉할 때 야마다 요지는 만 82세였고 삶으로만 보면 오즈보다 22년을 더 살았다. 두 사람은 시대도 나이도 결혼 여부도 다르지만 영화라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리고 야마다 요지는 오즈를 존경했으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오즈의 시대가 현대에도 유효하다고 보았다. 어쩌면 야마다 요지가 그 시대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야마다의 오즈 해석방식은 답습하거나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등의 관용이었다. 


두 개의 동경


이 영화가 오즈의 오마주이기는 하나, 두 영화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오마주가 오마주인 이유는, 원본을 알면 더 재밌는 것이지 원본을 알아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영화는 제목에서 ‘동경’이라는 단어만 일치할 뿐, 다른 영화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영화의 비교는 몹시 흥미롭다. 오즈의 팬들에게 이 영화는 만약이라는 상상의 산물이다. 과거의 가족이 현대에 옮겨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단상. 그들이 찢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괴. 스크린이라는 허구가 꿈으로 다가오기만을 우리는 빌어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이 환상을 우리는 쥐어본다. 


야마다는 과거의 가족을 재현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저런 구닥다리 가족이 아직도 남아있느냐고 화를 낸다. 분명 오즈의 시대에도 그런 가족은 희미했고, 요즘 같은 현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찢어졌지만 노부부를 극진하게 모시는 자녀들의 모습은 핵가족이라는 개념을 지나 1인 가구로 발전했다. 영화에서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취업준비생)로 나오는 쇼지(츠마부키 사토시)가 그렇다. 그런데 쇼지는 <동경 이야기>에서 전쟁 중에 실종된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런 일로 앞가림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조차 할 수 없는 게 <동경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야마다는 전쟁으로 사라진 개념을 현대에 들어 다시금 살려냈다. 그러나 이건 변주가 아니라 관용이다.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피고자 했다. 즉, 죽음의 필연성이 있는 곳에는 삶의 필연성도 함께하노라고 야마다는 말한다. <동경 가족>에서 야마다가 오즈를 동정한다고 느껴지는 게 그 부분이다. 


동경으로 기수를 돌려라


야마다가 오즈와 대화하려 했던 시도를 느낀 장면이 있었다. 영화 후반에 어머니가 죽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례식 신(Scene)이 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세 개의 구도로 분할되는데, 아버지의 양옆과 그 시선이 닿는 부엌이다. 여러 명이 앉은 만큼 쇼트와 리버스 쇼트가 오가는 가운데, 몇몇 쇼트는 인물이 아니라 인물 사이의 허공을 바라본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허공은 인물 사이의 공간 아마도 이 자리에 부재한 어느 인물이 자리해야 할 곳이다. 분명 그곳에는 죽은 아내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양옆에서 출발하는 시선이 닿는 곳에는 가문의 여자들이 있고, 그렇다면 아버지를 중심으로 뭉친 아들들처럼 어머니를 중심으로 뭉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뒤편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창이 있고 어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부엌이 내다보인다는 점도 영화를 설명하는 단서가 될 것 같다. 부엌을 등지고 선 이 빈자리에는 가정의 공백, 아내의 공백, 더 나아가서는 동일본대지진에서 겪었고 비롯되었던 모든 상실감이 자리할 수 있다. <동경 이야기>에서 쇼지의 빈자리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듯이, 쇼지라는 공백은 시대가 품은 모든 불화를 영화상에서 탈출시키는 도구였듯이, 반대로 이 영화에서 아내라는 공백은 시대가 품은 불화를 영화 안으로 들여오는 장치다. 이것이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요컨대 이 신의 앞부분에 죽은 친구를 찾아가 조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삽입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오즈는 가족의 문제에만 집중하려 했고 야마다는 가족은 곧 시대의 문제라고 보았다. 오즈가 어쩔 수 없이 시대에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는반면, 야마다는 그런 슬픔은 따로 지정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이 다가올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리코가 1시 배를 타고 떠나기 전에 바닥에 떨어진 검은 옷을 의자에 걸쳐두는 장면이 있다. 이 검은 옷은 장례식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모두가 입고 있었다. 그전에도 대사를 통해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노리코가 검은 옷을 올려둔다는 건 대상을 잃은 죽음이 그곳을 떠돈다는 뜻이다. 꼭 육체가 있어야만 죽는 것은 아니라고 그 공간은 말한다. 오히려 육체 없는 죽음이야말로 더 비참할 수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언제나 죽음의 인식 아래에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동일본대지진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웃들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그들에게, 육체는 살아남았어도 정신만큼은 그 순간에 다 함께 죽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부분은 오즈보다 부정적인 것 같다. 적어도 오즈는 그들이 살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 야마다의 가족은 노리코에게 아내의 시계를 물려주는 모습이 마치, 시간을 멈춤으로써 죽음의 인식을 없애려는 강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때 야마다는 신의 한 수를 던진다. 노리코와 쇼지가 섬을 떠나는 것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우리는 위에서 <동경 가족>은 시간의 파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새로운 창조라는 점에서 긍정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니까, 야마다는 그 시계를 통해 자살하면서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게 틀림없다. 이는 죽음이 꼭 비극적이고 비참한 것만은 아니라는, 같은 동경에서 기수를 돌린 야마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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