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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8. 2019

등대 옆에 맥주 한 병 <부초>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 영화 속의 아버지













등대 옆에 맥주 한 병


오래도록 떠돌던 아버지가 극단의 형태로 찾아온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한 몸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건 쇼트가 감정적인 탓도 있다. 오즈는 이 영화의 바로 전에 <안녕하세요>를 만들었는데, 카메라의 동선과 쇼트 구성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세트장 구도가 그려질 만큼 정교하게 짜여 있다. 그런데 <부초>에서 카메라는 이따금 앞서 나가기도 한다. 오즈의 쇼트 구성은 분과 초과 매번 일정한데, 그 리듬을 깨고 나와 고개를 들이미는 지점이 몇몇 있다. 마치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듯, 카메라는 스크린에 가까워지려 한다. 요컨대 대화 장면을 예로 들면, 보통은 말을 거는 쪽을 먼저 보여준 후에 응답하는 쪽을 리버스 쇼트로 찍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오즈는 응답해야 할 이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한다. 즉, 조연들이 주연의 자리에 침범한다. 말하자면 주된 서사에 부가서사의 침입, 아들과 단원의 사랑에 단원과 이발소 딸의 사랑이 끼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순간 오즈의 리듬이 깨지는 공포를 느끼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쇼트는 마치 파도처럼 구성되었다. 파도가 순간 육지를 침범해도 다시금 돌아가는 것처럼, 이들의 감정과 대화도 그렇게 울먹인다.          


영화가 시작하면 등대 옆에 맥주 한 병이 놓여있다. 이 쇼트는 오즈의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답다. 단언컨대, 이 쇼트를 보았다면 당신은 영화를 꺼도 된다. 영화를 계속 보면, 누군가는 범작인 이 영화에 실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를 계속 보다 보면 오프닝 쇼트가 영화 전체의 축약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닐 것만 같은 맥주병과 거센 파도에도 우직한 등대의 모습이 공존하는 이 쇼트는, 아버지가 등대이고 아들이 맥주병일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분명 우리는 그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은유는 정말로 이상해진다. 이 은유는 반대로 교차하는 것도 아니다. 아들이 등대이고 아버지가 맥주병이라는, 가만히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과 바다를 떠도는 아버지라는 뜻도 아니다. 오즈는 맥주병과 등대를 나란히 두었다가, 극단이 탄 배가 항구에 진입하는 쇼트에서 배와 등대를 나란히 일치시킴으로써 그 둘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항구에 배가 진입하면서 등대를 집어삼킬 듯할 때 우리는 조마조마해진다. 저 등대를 집어삼키는 모습에서 폭풍이 떠오른다. 폭풍 치는 바다의 일렁임이 등대에 부딪힐 때 그것은 조난도 구출도 아닌 난파이기 때문이다. 


파도가 치는 방파제 위에서는 누군가의 삶이 흘러가고 있다. 영화의 제목처럼 구름도 파도도 늘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두고 오즈는 아버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야. 변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그리고 오즈는 반박한다. “세상이 변하는데, 당신 운이 그대로일 것 같아요?” 이 말은 방파제 위에서 등대를 뒤로하고 아들과 함께 낚시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매치된다. 자신을 삼촌으로 속이며 아버지 역할을 대행하는 그의 모습은 가짜 아버지이면서도 가짜 아버지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등대지기에 비유하면서 바다가 끝없이 변한다고 말한다. 위의 대사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곧바로 반박된다. 세상이 변한다고 오즈는 말한다. 세상이 변하는데 세상 속의 당신은 변하지 않을 것 같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파도를 맞는 등대도 언젠가는 무너질 테다. 삼촌과 조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불안함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고 오즈는 말한다.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순간, 이별은 시작되고 만남은 찾아온다. 


실망스럽게도 이 영화는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갔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 실망스럽다. 자녀를 항상 지켜보는 게 부모이고, 다만 안정과 반성을 찾게 된다는 점이 다른데, <부초>의 인물은 안정도 반성도 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과 북의 갈등 속에서 제3국으로 떠나버린다. 요컨대 이 영화는 아들도 아버지도 주목받지 않는다. 아버지가 찾아와서 아들이 얻은 건 예쁜 새색시뿐이다. 그런데 새색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새색시와 전 부인과 애인이 한데 어울리는 난장판이 된다. 영화의 절정에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화해하지 않는다. 화해하지 않고 이별한다. 대판 싸우고 다시금 떠나간 아버지가 있고, 그런 아버지를 쫓아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그녀는 아들에게 말한다. “그대로 가게 내버려 둬. 네 인생에서 다른 사람이 되겠지만.” 즉,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만 남는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다. 여태껏 삼촌이라고 불렀지만 어렴풋이 아버지 같다고 느껴왔던 그 감정을 마음에 품은 채로 떠나버린다. 지금 떠나면 만남을 기약할 수 없음에도 그들은 헤어진다. 이전과는 다르게 그들의 가정은 완전히 찢어져 버린다. 전 부인을 질투하던 애인은 아들에게 의도치 않은 새색시를 점지해주고는 새 가정을 꾸려서 떠나 버린다. 이때 아버지는 애인을 인정하는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묘한 관계는 어떻게 논파될 것인가. 이별도 있고 만남도 찾아왔지만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나 아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부모 자식이 닮듯이 그들은 서로를 이방인 취급하는 걸 닮았다. 그래서 <부초>는 유랑극단인 아버지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영화의 시야는 넓은 곳을 본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오즈는 말한다. 떠나가야 하는 가족이 아니라, 찾아오지 않는 가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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