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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5. 2019

그 사이, 눈앞에 선명하게 <고하야가와의 가을>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 영화 속의 계절













오즈의 근심 죽음의 무게 


혹자는 이 영화를 전통적인 일본 사회의 붕괴를 염려한 오즈의 근심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 영화는 가족을 다루는 기존의 오즈 영화와는 다르게 몹시 차갑고 냉정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족상을 바라보는 오즈의 시선이 비관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기 때문만은 아닌데, <동경이야기>에서의 죽음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그러하다. 그러니 분명 이 영화가 차가운 것은 영화 내적인 요소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우리가 아무래도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그 추상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오즈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지만, 외부에서는 찾기가 쉽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 오즈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있고, 또한 일본의 신세대 영화감독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는 점도 있다. 말하자면 오즈는 인간으로서의 죽음과 시네아스트로서의 죽음이라는 내외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즈가 세 차례 전쟁에 참전하며 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왔고 영화사와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몹시 시달렸음에도 일관적인 영화적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벌어진 변화는 그에게 주어진 시련이 그만큼 압박이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젊은 날의 오즈와는 달리 말년의 오즈에게 다가온 죽음은 다소 직관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장의 포탄이 신체 외부를 갈라놓는 것이라면 암이라는 존재는 내부에서부터 인간을 잠식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 죽음과도 맞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투병생활 중에 ‘목격’하고야 만다.)


역전된 오즈의 세계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의 마음이 세계이고 세계가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전된 구조라면, 이 영화의 어둑어둑함은 인물의 검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이전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어둠은 등장인물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오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관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그 속의 미묘한 태도변화를 드러낼 방법을 찾은 셈이다. 시네아스트로서의 그는 1.33:1이라는 스크린과 가족에 대한 탐구가 여전했으나 인간 오즈 야스지로는 일본 영화의 죽음과 자신 신체의 죽음과 늙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골목길에 봉착해 있었다. 그런 힘든 시기에도 ‘겨울’이라는 계절이 아니라 그 이전의 ‘가을’에 애써 걸터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우리는 몹시 애처롭게 느껴질 뿐이다. 


인생을 백 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것을 사등분하면 사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봄은 25년까지 여름은 50년까지 가을은 75년까지 겨울은 100년까지일 것이다. 그리고 오즈가 60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삶은 여름과 가을 중간에 끝나버린 셈이다. (여름의 끝과 가을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려 보자) 그래서 추측건대 ‘여름의 끝’이라는 이 영화의 영제는 60세에 죽은 오즈가 50살이라는 여름 끝을 바라보는 회상적인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약 십 년 전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기 차를 생각해보면 61년도에 개봉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10년 전에는 53년도의 <동경이야기>나 51년도의 <초여름>과 49년도의 <만춘>이 있었다. 말하자면 오즈가 이 사계절 연작을 세 편 만들고 마지막 편을 만들게 된 것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지난 십년 세월을 되돌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즈는 삶에 대한 의지가 명확했기에 마땅히 제목을 여름이라고 붙이지 않고 ‘가을’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과도기에 자리 잡은 고하야가와가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평소 같은 색조와 화면비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절제된 조명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톤은 어둡고, 그들의 집안에는 이전처럼 햇살이 깊게 내리쬐지를 않는다. 햇살이 거두어진 집안에는 어둠이 깃들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의 아버지는 <부초>와 <동경이야기>에서처럼 나이가 들어 외면받는 퀴퀴한 선대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생을 한량으로 살아온 존경받지 못할 바보일 뿐이다. 말하자면 고하야가와가(家)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존경조차 받지 못한 채로 (어린 시절의 동경도 없이) 현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때 고하야가와가 집안의 그림자가 마루 깊숙한 곳까지 닿지 못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의 활동을 제약하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만이 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면 외부와 내부를 잇던 유일한 전령사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듯 힘든 시기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들의 사업은 잠시나마 어려워질 것이나 다시금 봄이 오기 때문에 아무쪼록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오즈는 말한다. 즉 계절은 순환할 것이라고 삶 또한 그러하다고 오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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