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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2. 2019

오마주 투 오즈 : 허우 샤오시엔 <카페 뤼미에르>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라는 이름의 열차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기를 맞이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즈 야스지로를 찾으려 한다면 고배를 들게 될 테다. 이 영화에 오즈의 흔적은 없다. 만약 이 영화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것은 허구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은 곧 죽음이 아니라 탄생을 기리는 행위고, 탄생을 기린다면 삶의 발자취가 아니라 미래의 씨앗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말하자면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 살아있으며, 그렇기에 이름을 불러서 끄집어낼 수가 없다고 말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오즈 야스지로를 발견하는 이들은 오즈의 죽음을 보는 셈이다. 반대로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의 생(生)을 보았던 셈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오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영화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면, 그들 내면에는 오즈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일 테니까. 그 익숙함에 젖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오즈의 영화이기도 했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에서 그들이 건네는 인사를 보았다. 집에 돌아오거나 집을 떠날 때 그들은 말한다. <안녕하세요>라고. 그러나 그 한마디로 설명될 수 없는 묘한 관계의 알력이 오즈에게는 있다. 그게 바로 오즈 영화의 침묵이다. 이 침묵은 일종의 눈치싸움이기에 눈치가 없다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나 오즈는 오즈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눈치챌 수가 없다. 따라서, 오즈의 세계는 오즈의 것으로만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오즈를 오마주한 영화에서 오즈의 느낌을 받는다는 건 정말로 거짓이다. 우리는 단지, 오즈의 발자취가 아니라 오즈의 탄생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주의 파편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파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흐르는 물은 늘 다르다고. 이른바 흐르면서도 흐르지 않는 것. 강물을 지칭할 때 그것은 강이지만 동시에 순간으로 지칭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다른 시간을 체험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 있다. 이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흐르는 물에서 부초를 떠올린 것과 마찬가지다. <솔라리스>의 그 유명한 장면. 같은 도로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같은 곳이지만 다른 곳이기도 한 집에 돌아온 남자가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오즈 야스지로에 응답하여 그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허우 샤오시엔의 답변. 오차노미즈 역에서 교차하는 삶의 지향점이 화두로 던져진다. 누군가는 그 열차에서 오즈의 열차를 본다. 오즈의 영화에서 열차는 인물을 싣고 시간을 관통하는 도구였다. 이를테면 <동경의 황혼>, 그 영화에서 어머니는 열차에 올라서면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예지한다. 이때 우리는 뤼미에르가 시간의 본질을 말했던 게 시오타 역의 열차였다는 점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열차가 시간의 도착이었다면 오즈의 영화는 시간의 교차이다. 그래서 오즈는 늘 플랫폼 위에 인물을 세워두었다. 그 플랫폼은 인파가 몰려들면서도 몰려들지 않는 곳, 이른바 교차로이다. 


우리는 오즈의 플랫폼에서 장 피에르 멜빌이 선택한 혁명의 역사를 보거나 (<그림자 군단>), 지아장커가 말하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기도 한다 (<플랫폼 2000>). 말하자면 우리는 오즈라는 이름의 시간을 보고 있다. 여기에 모두 다른 시간을 살기에 개인의 시간을 지칭하려면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시간의 주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스스로 칭할 수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들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이름이 타인에 의해 불린다는 점과 개인과 타인을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타인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이름으로 당신을 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우 샤오시엔은 이 영화에서 오즈를 지우고 자신을 드러내었다.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와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칭했다. 


허우 샤오시엔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오즈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자신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갔을 뿐, 지금 이 시대에 공존하지 않더라도 어렴풋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틱스 강을 건넌 이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보다는, 그 샘물의 발원지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에 있다는 점을 허우 샤오시엔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망각의 샘물이 영화장치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았고, 그래서 열차는 도착하지 않고 교차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요코(히토토 요)를 데려다 놓은 열차가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여러 역을 호명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플랫폼의 모습에서 인생이란 게 결코 정해진 틀이 없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영화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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