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결별, 시대의 탄생 <동경의 황혼>

by 수차미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 영화 속의 결별













오즈의 몇몇 영화에서 ‘이상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그런 느낌도 이상하다. 우리가 몇몇 영화에서 이상함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오즈의 영화를 어떤 틀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틀은 무엇인가. 아마도, 오즈하면 떠오르는 여러 단어가 그것일 테다. 가족의 결합과 결별, 삶과 죽음, 아버지와 딸. 분명 이러한 단어들은 오즈의 후기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테마이다. 그러나 오즈의 영화에는 후기가 아니라 전기도 있으며, 전기 영화에도 이러한 테마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요컨대, 오즈의 후기 테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 초창기부터 태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 오즈답지 않다는 세간의 평은 이것을 오즈의 후기 영화로만 본 것이다.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라거나 해체의 근원을 다루고 있다는 설명은 이 영화를 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오즈의 초기 영화 쪽으로 갈수록 <바람 속의 암닭>,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 <그날 밤의 아내>과 같은 분열의 양상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사실 <동경의 황혼>은 분열이 이루어지는 오즈의 이상한 영화가 아니라, 분열과 이별하여 후기에 들어서는 결별의 영화이다.


어떻게 결별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즈 평생의 숙원이었다. 오즈의 영화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장면보다 만남 후의 이별을 걱정하는 장면이 더 많다. 이를테면, <가을 햇살>에서 딸이 결혼을 망설이는 것은 자신이 떠나고 나면 홀로될 어머니를 걱정해서다. 그러니까 사실은 가족의 탄생이 아니라 분열을 다루는 셈이다. 정확하게는 분열을 막으려는 힘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어머니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딸이 노처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데, 딸은 시대의 요구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걱정한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연대가 깨어지는 순간 다른 한쪽은 분열하리라고 그들은 믿는다.


어쩌면 오즈는 가족이라는 틀이 그만큼 공고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구성원이 어떻든 간에 오즈의 영화에는 꼭 가족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낙제는 했지만>에 나오는 이들은 대학교 동기인데, 동기라는 개념은 거의 가족처럼 보인다. 이때, 이 영화가 1930년에 개봉했고 그로부터 7년 뒤에 중일전쟁이 발발했음을 떠올리면 기분이 묘해진다. 한국식으로 하면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이 문구에서, 나라의 개념이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그것이 다시금 가족의 개념으로 나아간다는 걸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물론 이것이 오즈와 전쟁 간의 연결고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즈가 전전에서 전후를 살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달라지는 시대상의 중심에 전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쟁에 관한 은유가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오즈는 하고 있다. 즉, 시대 속에 전쟁이 있는 것이지 전쟁을 직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즈는 전쟁의 폭력이 아니라 분열을 다루고 싶었을 것이다. 그 폭력은 시대의 흐름이 되어 오즈의 가족에게 스며든다. 그 흐름을 감지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그러나 흐름에 깎여 나가는 오즈의 가족들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결별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오즈에게 이별은 분열 이후에 찾아오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분열은 목격되는 것이고, 목격되는 순간 이별은 확정된다. 그래서 그들은 분열을 외면하거나 떨쳐내려 한다. 분열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별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열의 기조는 감지된다. 이 감지는 영화 밖에서 영화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러니까 사실 오즈의 영화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그 탄생과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동경 이야기>에서, 자녀들은 이미 동경에 있고 노부부는 상경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말이다. 즉, 우리가 오즈의 영화에서 목격한 것은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이다. 오즈는 24프레임으로 분열된 시간 속에서, 흐르지 않고 확정된 순간으로서의 이별을 말한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전쟁이라는 폭탄이 터진 후에 닥쳐올 낙진들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핵분열이 만들어 낸 건 여러 형태의 이별이다. 일본 사회로 보면 전전과 전후를 가르는 과거와의 이별이었고, 오즈의 가족에게는 과거와의 이별이었다. 그러나 이 이별은 의도된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분열에 이별이 뒤따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로서의 일본이다. 그런데 사실을 거슬러 오르면 전쟁의 주체가 일본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가해자로서의 일본이다. 그러니까 피해자라는 이별은 가해자라는 분열에 뒤따른다.


<오차즈케의 맛>이나 <초봄> 같은 영화를 보면, 이미 시작부터 갈등이 터져있다. 그걸 회복하는 게 주요 서사인데, 말하자면 왜 갈등이 터졌는지를 모른다. 오즈 후기 영화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것이다. 오즈 후기 영화에서 인물이 겪는 갈등은 피해자로서의 인식이다. 일단 갈등이 터졌는데 왜 터졌는지를 몰라서 그걸 알아가는 게 가족성의 회복이다. 그런데 영화 밖의 우리는 이미 다 아는 상태로 관람한다. 누가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대략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건 밖에 있기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게 오즈 야스지로라는 사람의 시각이다. 오즈는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르고 멀리 있어야만 깨닫는다고 말해왔다.


전후에 비로소 가족영화의 틀이 확립된 것은 전쟁의 영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오즈 본인부터 세 차례 전쟁이 끌려간 경험이 있다. 세 차례 모두 국내가 아니라 해외 파병이었고 말하자면 오즈는 이때 본토와 단절되었었다. 본토와 단절된 상황에서는 본토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잘 보인다. 물론 정보가 통제되었을 수도 있고 파병 중이었으니 전쟁을 잘 들여다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공간의 단절이라는 개념이 전쟁 이후의 오즈 영화에서 주요한 것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일단 오즈의 전전 영화 중에 공간의 단절이 명확한 것은 <외아들> 정도밖에 없다. 이 영화는 오즈의 첫 유성 영화이기도 한데, 어린 아들을 도쿄로 올려보낸 어머니가 성인이 되어서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온몸을 바쳐 헌신한 아들이 그다지 잘 살지 못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니까 오즈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것(유성)이 바로 경제적인 분열이다. 어머니가 아들과 이별했는데 사실 그게 소용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즉, 이별의 뒤에 분열이 뒤따르는 평범한 서사다. 물론 시대가 사람을 만든 것이지 사람이 시대를 만든 건 아니다만, 이야기상으로는 가족의 붕괴가 경제고를 만든 것처럼 묘사되었다.


이 영화가 1936년에 개봉했고 일 년 뒤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영화 다음 한 편을 찍고 오즈는 중일전쟁에 끌려갔다. 그리고 전후에 그 유명한 <동경 이야기>, <초여름>, <꽁치의 맛>이 등장했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이별과 결합,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그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와의 이별은 남편과의 결합이고, 구시대와의 결별은 신시대와의 결합이다. 이런 경향을 보면 아마도 오즈는 전쟁을 겪으며 단절이라는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보았던 것 같다. 죽음이나 멸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익숙한 사실들과 떨어진다는 것.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익숙한 관계와 잠깐이나마 멀어진다는 것. 평소에는 익숙하게 먹었던 꽁치가 전쟁 중에 문득 먹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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