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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7. 2019

오즈 영화 속의 반복과 차이



1903 ~ 1963

“無”

이 글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바칩니다.

 

 













오즈 영화 속의 반복과 차이













많은 사람이 오즈의 영화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실제로 오즈의 영화는 늘 비슷한 느낌의 장면이 있는데, 대체로 가족과 집안의 모습이 반복되고는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오즈의 자기복제라고도 했고, 더 나아가서는 아이디어가 떨어진 게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즈의 카메라가 한 시대를 품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런 반복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가두어 놓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즈의 카메라는 현실을 보는 하나의 틀로서, 자신이 포착한 순간을 끊임없이 되돌려 보는 비디오였다. 


오즈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가족의 해체를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떠나거나 피하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를 참조하라) 전쟁이 끝나자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장소를 고집하는 일본인들에게 고향이란 돌아와야만 하는 곳이었다. 오즈는 원폭을 맞았던 나라가 재건되는 모습에서 경외심을 느꼈다. 사람들이 떠났던 장소가 다시금 사람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마치, 메마른 땅에서 솟아나는 풀잎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설사 방사능처럼 최악의 결말을 맞았을지라도 말이다. 


오즈는 생명의 순간을 자꾸만 되뇌어 보았다. 오즈의 후기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연보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후기 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계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초봄>, <늦봄>, <초여름>, <늦여름>, <가을햇살>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은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다. 지금 떠나가는 이들(죽음)과, 지금 떠나가야 하는 이들(결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즈는 그들이 떠나가는 게 필연적이라 보았으며,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폭을 맞은 땅에서 새 생명이 피어나듯이, 그곳에는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생명력이 고개를 들어 빈자리를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즈는 사람 간의 관계를 ‘생명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듯, 겨울처럼 차가운 단절에도 끝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끝은 마지막이 아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찾아온다. 이 사계는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오즈가 말하는 사람 간의 관계란 독립적이면서도 영속성을 띤다. 한 생명의 죽음이 슬플 수는 있어도, 눈을 돌리면 어느 순간 새 생명이 태어나 있다. 사람은 죽지만 사람이 죽어도 세계는 흘러간다. 다시 말해 관계의 단절이란 망자와 직접 연관된 이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거대하지만, 가족 전체로 본다면 어느 순간 새 관계가 태어나 있다. 벤야민의 말처럼 과거로부터 뿌려진 씨앗이 현재를 구한다는 이 관점은 오즈의 후기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좋은 해답이다. 


타자 


일반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감독은 여러 각도로 하나의 문제를 들여다본다. 반면 오즈는 하나의 각도로 하나의 문제를 되새긴다. 마치 우직한 소처럼 가족이라는 테마를 여러 차례에 걸쳐 소화해낸다. 대략 필모그래피의 중반부터 시작된 관심은 사망 직전까지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오즈가 처음부터 가족에 관심을 두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즈는 데뷔 이례로 늘 시나리오에 재량권이 있었으므로, 만약 처음부터 관심을 두었다면 처음부터 가족 영화를 찍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오즈는 사람들의 일상에 관심을 두었다. 유랑극단을 다룬 <부초 이야기>나 대학생을 다룬 <낙제는 했지만>이 대표적이다. <부초 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일본의 전통을 보여준다. <낙제는 했지만>은 일본 청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영화는 무성 시대의 오즈가 아직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립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영화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전통극단은 손님이 줄어 멸절의 위기에 처한다. 대학교의 청춘들은 전쟁에 징집될 것이다. 말하자면 후기 오즈의 씨앗은 초기부터 있었다. 이 씨앗이 가족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후기의 오즈가 집과 직장이라는 구도로 가족의 범위를 한정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의 오즈가 말하는 가족이란 좀 더 포괄적이다. <그날 밤의 아내>와 <나가야의 신사록>에서 오즈는 빈곤한 가족에게 타인을 끌어들인다. <그날 밤>에서는 자식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도둑질한 아버지와 그런 딱한 사정을 듣고 검거를 망설이는 형사가 있다. <나가야>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고아를 떠맡게 된 여인도 있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원치 않은 이의 방문으로 갈등을 겪던 이들이, 바로 그 불청객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의 오즈는 외부적인 것을 통해 치유되는 관계, 혹은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마도 오즈는 전쟁의 파괴력을 눈으로 목격했기에, 그들 스스로는 반성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이에게, 누군가 손길을 내밀어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만 비로소 치유된다고 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타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이 가족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상징하는 부모세대와 현재를 상징하는 자식 세대는 갈등을 겪는다. 이때 갈등은 외부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해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경이야기>에서 늙은 부모는 자식을 찾아 동경으로 온다. 그러나 자식은 늙은 부모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가정을 꾸린 자식에게 부모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즉 부모는 가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가족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그날 밤>과 <나가야>에서 주인공에게 갑작스러운 타인처럼, 자식에게 부모란 그런 존재이다. 


가족의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해오는 부모에 반감을 품는 자녀들의 모습은 흡사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신체의 면역기관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거부하는 자식을 보면서 화를 내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이들을 갈라놓은 것은 전통적인 사회의 붕괴 즉 외부적인 요인이므로, 그들이 대항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라는 맥락에서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해를 넘어서 슬픔과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감정은 표면적인 플롯이 아니라 그것이 세워진 기단부를 직시할 때 비로소 떠오른다. 가장 파괴적인 타자인 원폭이 그들 사회, 그들 가족에게 떨어졌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삶의 터전에서 밝은 섬광으로 시간이 고정되어 버린다는 사실, 오즈의 시계는 바로 그 ‘순간’에 멈춰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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