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는 일본이 전쟁하던 시기와 그 후를 살았고, 그가 다루는 영화 속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오즈의 영화에는 전쟁에 관련된 기억이 없다시피 하다. 말하자면, 오즈는 동시대에 베인 전쟁의 향기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면이 있고 부정하고 싶기도 하다만, 부정하기에는 너무 명료하다. 오즈의 영화에서 전쟁에 관한 기억, 혹은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어쩌면 오즈는 정말로 전쟁을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막연하게 동일시될 수만은 없다는 걸 안다. 오즈가 일본의 전쟁 세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작품 속에 전쟁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오즈가 홈드라마를 찍었다는 사실은 동시기의 시간을 필름 속에 불러들였다는 의미이기에, 그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오즈가 해체되는 가족상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들이 사는 시간 또한 재현되어야 했을 것인데, 영화 속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전쟁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즈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배제한 게 아니냐고 말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전쟁의 파편을 끄집어내, 영화의 어법으로 편집한 게 오즈의 홈드라마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을 재고해 보아야만 한다. 만약 오즈가 그리는 것이 동시대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영화 속의 시공간이 동시대가 아니라면 위의 의문은 해소된다. 우리는 오즈의 영화를 ‘당대의 가족해체’라고만 보았을 뿐, ‘가족해체’만을 두고 논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오즈에게서 ‘당대’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부여했고 그에 수반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폭력과 슬픔으로 점철된 것이기에, 어쩌면 오즈가 눈을 돌려버린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해보았던 것이다.
노스텔지아
영화 속에서 오즈가 그리는 시대는 불분명하다. 그곳은 분명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듯하지만 영화라는 점에서 우리 현실과는 분리되어 있다. 말하자면 오즈의 영화는 우리 현실과 닮았을 뿐 현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역사적 담론이 빠졌다기보다는 현실을 온전히 옮겨오지 못한 불완전한 세계이다. 완벽하게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제한된 감정의 실험대가 더 나은 선택이다. 이때 오즈의 카메라가 인물을 정면으로 비춘다. 그들의 표정은 어색하고, 이는 이곳이 불완전한 세계임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인물의 표정에서, 대화하는 이에게 보내는 감정을 읽어낼 수는 있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이 범인에게 보내는 분노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오즈의 인물도 상대방을 바라보지만 우리에게 감정을 전한다.
오즈가 공간을 따라 카메라를 진행시킬 때마다 감정이 묻어나온다면, 그 감정이 분출되는 곳은 정면을 향한 얼굴이다. 중간중간에 자주 등장하는 이 정면 쇼트는 영화 내에서 감정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우리는 그들이 관객석을 바라보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 감정만큼은 온전히 전달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을 영화 속에 다시 투입할지 아닐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만약 감정을 이입하지 않은 채로 작품을 본다면, 그 감정은 영화 속에서 줄곧 맴돌다가 라스트 씬에서 인물의 시점을 통해 빠져나갈 것이다. 말하자면, 오즈의 카메라는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감정의 통로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이것은 감정의 대화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안이다.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자. 물 위에 떠가는 배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류 치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물 위를 떠가는 배로 이어진다. <동경이야기>에서 감정의 통로가 류 치슈를 향한 것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식들이 눈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운 시신을 둘러싼 채 각기 다른 시선을 한 자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고, 그런 상황에서 집안을 맴돌던 감정은 발원지인 류 치슈로 향한다. 그러나 류 치슈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렇게 영화 속의 감정은 창밖으로 흘러간다. 즉 우리가 감정을 외면할 시에 그것은 영화 속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오즈가 말하는 현실
만약 우리가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혹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영화 속으로 남겨져 그곳이 현실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꽁치의 맛>에서 늙은 류 치슈와 친구들이 일본 해군의 ‘군함행진곡’을 열창한다고 해서 그곳이 현실 세계의 반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영화 속에서도 그들이 사실만을 인정할 뿐 추억은 하지 않을뿐더러, 1962년이라는 시대 맥락으로 보면 전쟁 당시 지겹도록 들었던 음악이 생각나지 않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군함행진곡은 시대를 특정하는 기표이지만, 오즈는 그곳에 의도적으로 감정을 흘려 넣지 않았다. 감정의 통로를 중시하는 오즈에게 이와 같은 의도적인 회피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가 전쟁에 대해 평소 품은 생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시대의 광기가 배출되는 곳이 전쟁이라는 기표였다면, 그것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 중요할 뿐 거쳐 가는 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즈가 관심을 둔 것은 전쟁의 광기가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의 문제였다. 전쟁터 한복판은 마치 지하철 플랫폼 혹은 속이 빈 공허한 곳이었고, 그렇다면 양측에 있는 대화의 주체를 찾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고 오즈는 말한다. 말하자면 전쟁에 동원된 개인이나 공간은 단지 계류지에 불과할 뿐, 전쟁의 책임은 군부에 있고 피해의 자리는 신민들에게 있다. 정확하게는 그런 대화가 오가는 감정이 중요한 것으로, 오즈에게는 전쟁의 책임도 배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허탈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이 시작과 끝, 대화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공허함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즈가 말하는 당대의 현실이란 주체(가해자)도 없고 객체(피해자)도 없는, 어중간한 상태의 일본일 뿐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각각의 쇼트는 반드시 짝패를 가진다. 인물이 공간에 진입하고 떠나는 것, 술집 골목의 밤과 낮, 혹은 유사한 필로우 쇼트의 반복. 중앙에 공간을 둔 리버스 쇼트의 사용. 이러한 쇼트의 사용은 의도되었고, 그 사이에는 언어가 오고 가는 플랫폼이 있다. 언어라는 이름의 기차를 얻어탄 것은 바로 감정, 그는 영화 내부에서 올라탔을 수도 있고 혹은 영화 외부에서 올라탔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오즈가 축조한 감정의 통로에 올라타는 것이 내러티브인지 혹은 우리인지에 따라서 영화는 흘러간다. 그것은 가족의 해체이거나 시대의 외면이다. 그러나 시대를 외면한다는 것이 도피는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 또한 시대를 외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