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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5. 2019

우리라는 행성이 속한 인생이라는 우주

<준하의 행성>(2018) 

영화 <준하의 행성>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

떠다니는 천체를 마음의 눈으로 기록하다


우주에서 들려오는 음악이란 행성들이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 발생하는 일련의 백색소음이라는 요하네스 케플러의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현대가 아닌 과거에 등장했던 천체 관측의 역사를 재현하는 듯하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물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하늘을 조금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의 우리는 하늘에 빌었고 우주의 소리를 느꼈으나, 현대의 우리는 별들의 모습을 사진기와 같은 것으로 포착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진기가 리얼리즘의 혁명을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반면 그림의 혁명은 떠다니는 천체를 마음의 눈으로 기록했다는 점에 적용된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것을 두고 “하늘의 음악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며, 지성으로만 이해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건 굉장한 아이러니인데, 과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오히려 마음으로 하늘을 보는 게 더 중요시되는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러하다. 왜냐하면, 과학이 미진했던 과거에 피타고라스와 케플러가 “마음으로 별을 보지 말고 지성으로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라”고 말했다는 점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이라는 핍진성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우리 앞에는 사진과 그림이라는 두 가지 갈래가 생겨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영화의 두 가지 갈래는, 상업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 갈래가 아니라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이라는 핍진성(Verisimilitude)의 문제를 관통한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위의 맥락으로 비유해볼 때, 다큐멘터리는 리얼리즘으로서 사진에 대응하고 극영화는 그림으로서 마음의 눈에 대응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리얼리즘과 같은 게 아니다. 또한 천체 기록의 역사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이 영화가 사람을 들여다보는 방법론으로 우리의 세상을 우주로, 그 우주 안의 행성을 하나의 개인에 빗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행성이다. 문학적인 누군가는 백색왜성이나 적색거성 같은 인생의 황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설정하는 것은 마을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마을은 영화라는 울타리가 품은 따스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일 수도 있고, 또는 실제로 영화가 촬영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자임이 틀림없다. 후자의 물음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에 우리가 지금 그걸 들여다보면 훗날의 재미가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이 단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영화의 물음은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점이다.)


별명이라는 방식으로 저항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를 잘 알게 되는 만큼 오히려 소홀해지게 되었다는 역설이 위에서 말한 사진과 그림에 대응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이 실시간으로 서로를 이어준다는 것이 약속을 잡기 편하게 되었다는 점과 반대로 약속을 취소하기 쉽게 되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학의 발전이 불러온 것은 행성 간의 교류는 쉬워져도 우주의 음악이 음소거됨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과학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마음을 요구하는 사회로 바뀌는 순간에는, 영화라는 기술적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을 애타게 갈구하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요컨대 우리는 바로 그것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띠는 성격 중에 하나라는 점을 알고 있다.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도입부로 해서, 준하의 모습을 정지된 소음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달리기는 어른들의 힘겨운 눈치싸움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른들은, 정확하게는 준하의 어머니와 학교 관계자들은 준하의 공격적인 태도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면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혹은 행성의 목소리가 정말로 그곳에 닿을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다. 이때 그들을 소개하는 영화의 CG는 그들이 정한 별명과 실명을 나란히 보여주는데, 비유하자면 실명은 ‘객관이라는 이름의 과학, 혹은 학술적이어서 딱딱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별명은 ‘자신이 정해 주관성을 띠고, 그래서 더욱 따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려볼 수 있는 건 앞서 말해보았던 사진에서 그림으로의 이동일 테다. 또한 그런 면에서, 그들이 서로를 잘 알게 됨에 따라 벌어질 수 있는 소홀함에 별명이라는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테다. 


우리라는 행성이 속한 인생이라는 우주


자폐라는 이름의 과학적 병명이 마음이 아픈 아이라는 따스한 목소리로 바뀌게 될 때, 우리가 영화에서 찾아내는 하나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태도도 아니고 동네주민의 친절도 아니며 오히려 아이들에게 틀어주는 교육용 비디오이다. 다큐멘터리 속에 들어있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에서, 어딘지 모르게 현실 속의 현실이라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영화와 우리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또한 기술의 힘을 이겨낸 것이다. 만나게 되기 쉬워진 만큼 서로에게 소홀해진다는 말이 마치 영화를 보기 쉬워졌다는 접근성의 문제로 들리게 된다면, 준하와 우리의 만남은 <준하의 행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가 아니라 이것을 보기 위해 극장 안에 들어선 순간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테다. 


오즈 야스지로는 <외아들>에서 “인생의 비극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맺어짐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다음처럼 바꾸어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크린 밖에서 안으로 이야기가 투입되고 그곳으로부터 담론이 나온다는 전통적인 환류의 관점으로 볼 때, 부모가 현실이고 자식이 스크린 속의 현실이라면, 우리라는 행성이 속한 인생이라는 우주에는 그런 비극이 매 순간 맺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관이라는 소우주에서 하나의 행성으로 존재하는 우리에게, 스크린이라는 소우주에서 하나의 행성으로 존재하는 준하에게, 극장에 떠도는 소음이 귀를 타고 뇌간을 직격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준하의 행성>을 머리와 심장 모두로 이해할 수가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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