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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0. 2019

배려와 과잉보호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형체 없는 목소리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작품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가면을 두고 교류하는 중간지대로서의 사회, 배려와 과잉보호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형체 없는 목소리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비틀즈의 음악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 영화를 말할 때 그 음악의 가사에 빗대어 해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릇 예술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추상은 곧 개인의 감상에 맞추어 최적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비틀즈의 노래 가사에 빗대는 것은 아마도 크나큰 무리수일 것인데, 그렇기보다는 아마도 그 제목에서 작품의 전반적인 심상을 추론해낼 수가 있을 듯하다. 새라는 것이 만약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존재를 뜻한다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기 전에 부르는 찰나의 찬송가라는 건 삶에서 다가올 수 있는그런 찰나의 유희일 테니 말이다.


나는 방금 발언이 어딘지 모를 문학적 감수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느 청춘의 이야기를 목도하게 되고, 그들이 잘나거나 못나지도 않은 채로, 말하자면 그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자체에서 위로 혹은 안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십 년의 간극이라는 평행세계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한국의 청춘들이 자신과 그들을 하나의 타임라인에서 두 개의 차원에 빗대어보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요컨대 이것은 동시대에 벌어지는 현재와 과거, 그런 비교에서 오는 즐거움이 주된 감상이리라.


청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


여기에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의 여자도 있다. 그런데 작품 내에서 오가는 사랑의 정분은 단지 그들의 삼각관계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다. 그 여성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는 자기가 일하는 가게의 점장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여기서 다시금 점장의 아내가 쇼트 하나를 통해 확인되며, 그런 사치코는 점장과 연애하면서도 동료직원인 ‘나(에모토 타스쿠)’와 이중연애를 하는 중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네 명의 인물이 세 개의 관계를 벌이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놀라지 마시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관계로 시작한 영화는 사치코에게 ‘나’의 친구인 시즈오(소메타니 쇼타)를 소개하면서 다시금 그 두 명을 연인으로 이어버린다. 말하자면 영화의 결론에서 사치코는 세 명의 남자를 거치게 되는 셈이고, 그녀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정육각체는 영화를 보면서 관계를 계산해보려는 우리의 의지를 팍 꺾어버린다.


그러나 카메라라는 것이 보여주는 초점화의 경향은 그러한 관계에서 어디를 보아야 할지에 관한 문제다. 요컨대 이것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면서도 어떠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 영화가 카메라의 시점을 응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는 ‘나’에서 사치코로, 사치코에서 시즈오로 오가면서 자신의 시선이 어디까지나 사치코를 통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그러니까 시즈오와 사치코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 ‘나’는 늘 항상 시즈오와의 쇼트를 나란히 놓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관계가 이각에서 삼각으로 진입하게 될 무렵부터 카메라는 이미 시즈오를 ‘나’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영화의 도입부에서 ‘나’와 시즈오가 친구로서 등장하는 쇼트에서는 그들의 관계는 하나의 화면 안에 있거나 혹은 병렬한 쇼트로 제시된다. 어쩌면 이 쇼트가 동거라는 그들의 상황을 제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동거가 진행되는 와중에 자신(정확히는 그들)의 집에 사치코를 데려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두 가지 갈래로 나아간다. 집에서는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가운데 그런 집으로 향하는 시즈오를 쫓는 트래킹 카메라가, 그들의 집으로 올라서는 계단 입구에서 외화면의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서려고 한다. 여기서 관객에게 도달하는 문제, 이 카메라는 이제 돌아가는 시즈오를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젊은 청춘을 조명할 것인가. 이때 카메라가 선택하는 것은 단언컨대 그 안의 청춘들이다.


이런 맥락을 잘 따라가다 보면 관객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관계의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는 한 붓 그리기이다. 영화의 언어로 말하면 그 붓이란 건 카메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쇼트와 쇼트를 넘나드는 그들의 관계가 다소 뭉툭하게 그려진 듯 보여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쇼트 너머로 이어지는 시선의 응시, 감정의 삼투이다. 이 영화에는 그러한 도형과도 같은 관계의 설정 속에서 시선이 향하는 것이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것이 감상 포인트라 보아도 좋다. 그러나 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야케 쇼 감독이 그려내는 영화의 배경이다. 인물의 얼굴 쪽에 집중되어있던 포커스가 갑작스레 뒤로 물러나서 그 두 가지 쇼트를 하나로 이을 때 우리가 받는 것은 일종의 점프, 그러한 당혹감으로부터 배경으로의 물꼬가 트이고 우리는 배경에서 밀려오는 심상을 몸으로 받게 된다.


장면 하나를 예시로 들어보자. 영화의 마지막에 사치코에게 충격적인 발언을 듣고 나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나’의 얼굴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갑작스럽게 그다음 쇼트로 점프하여 붉은 노을 혹은 파란 도시가 한자리에 모여 정제된 모습을 자아낼 때, 그것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자리한 어느 혼란스러운 청춘의 얼굴이 된다. 생각해보건대 이 장면에서 그러한 영화 테크닉의 조화가 다름 아닌 부유하는 색들의 침투로 여겨지지 않을만한 이유는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 관계의 저편에서, 인물을 보조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던 도심의 모습이 인물의 외향에 비견되어 그들의 관계에 알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바로 그러한 물음을 던져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랑과 청춘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말이다.


낮과 밤 그 어느 사이에 자리한 푸른 어둠,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배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사치코 역을 맡은 이시바시 시즈카는 최근에 국내에서 개봉한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에서도 연애하는 청춘으로 등장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자아내는 기묘한 기시감에는 <도쿄의 밤하늘>을 본 관객으로 한정해서 그런 이유가 연료로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나는 먼저 전제해두고 싶다. 왜냐하면 <도쿄의 밤하늘>은 제목에서부터 예고되듯이 푸른 도쿄의 밤하늘이 주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이며, 그 영화에서 두 명의 청춘은 한 개의 청춘이 되기 위하여 하나 되는 보름달을 바라보게 되므로 그러하다. 요컨대 그 영화에서 도쿄의 푸른 밤하늘은 전반적으로 차가운 인상을 주는데, 그들의 삶이 그러하면서도 정작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또한 일정한 냉기를 품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 따라서 비유를 해보건대, 차가운 관계 혹은 차가운 사회 속에서도 따스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인간의 측면과 도시의 측면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번갈아 제기되는 셈이고, 이 영화 <너의 새는>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영화와 이 영화는 다르므로 직접적인 비교분석이 유효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도심의 색상이라는 방법론을 해당 영화에서 빌려오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떠한 색상이 어떠한 관계를 그들 영화와 맺고 있는가. 나는 이 대목에서 위에서 말해왔던 관계의 색상을 영화의 측면으로 돌려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독해의 방식은 영화의 배경이 그들의 관계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나는 쇼트 간의 단절감을 두고서 그러한 균열 속으로 감정 같은 것이 물 밀듯 밀려온다고 표현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정에서 더 나아가면 그런 균열이 아니라 그 위에 자리한 도심의 풍경이 있을 테고, 어쩌면 <도쿄의 밤하늘>처럼 청춘들이 살아가는 곳은 늘 푸르고 푸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표현을 지지하고 싶은 것은 분명 이 도시에는 푸른 것과 붉은 것들, 원채색과 유채색의 어울림이 마치 그들의 이상한 관계 속으로 침입해 균열의 조짐을 막아주는 것만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이것을 두고 남과 여라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일 테고 사실상 이것은 냉정과 열정이라는 두 개의 코드에 잠입하는 게 맞다. 또한 냉정과 열정이라는 관계의 중의성이 그동안 일본의 청춘 영화에서 얼마나 자주 원용되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본적 감성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있고, 학문적으로는 일본성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가면을 두고 교류하는 중간지대로서의 사회, 배려와 과잉보호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형체 없는 목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일본의 영화에서 연인 간의 단절, 썸타는 이들이 침묵하면서도 간질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말도 행동도 아니라 오로지 배경만이 그들의 관계에 접착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는 낮과 밤 그 어느 사이에 자리한 푸르른 어둠 속을 기어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재미난 가정 중에 하나는, 그런 푸르른 어둠이 어느 순간부터 인물의 속마음처럼 보인다는 것이고 또한 정작 해야 할 말이 그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다는 역전의 발상이다.


우리 곁에 배경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비로소 우리의 앞으로 몸을 드러내게 될 때


이 영화에서 줄곧 번갈아 제시되는 푸르른 것과 불그스름한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것에 일단의 규칙조차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냥 어둑어둑할 땐 푸르르고 낮이나 건물 안에서는 조금은 붉은 기가 돌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것이 색채나 공간과 같은 이분법으로 나아가게 될 여지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면서 노래방 안의 시즈오의 얼굴에 두 가지 빛이 한 번에 내리쬐게 될 때, 그의 얼굴은 아수라 백작의 그것처럼 흑백이 아니라 붉은 색과 파란색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바로 이때 우리는 지금까지 영화가 제시하던 관계의 접착제로 응용된 배경이 바로 이곳, 그것도 시즈오의 얼굴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면에서 이러한 모습이 그동안의 이야기가 시즈오의 얼굴로 흘러들어온다고 표현할 수 있겠고, 여기서 다시금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을 도출해낼 수 있다. 첫 번째로 왜 하필 그런 결집지가 시즈오의 얼굴인지에 대해서고, 두 번째는 그런 시즈오의 얼굴에 흘러들어간 게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왜 그 장면인지에 대한 물음은 이 글에서 던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의 쇼트가 이어지는 것이 영화라는 점에서 그것들을 각각의 인격에 부여하게 될 때 벌어지는 관계에 대해서 말하게 될 테다. 쇼트가 영화라는 도막의 편린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것들이 우리가 이루는 관계 중에서 어느 순간의 얼굴에 빗댈 수 있다면, 그 장면은 그들의 관계 중에서 어떤 편린 혹은 순간일지를 지적할 수가 있겠고, 이때 이 글에서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그런 잘린 면에 붉고 푸른 두 갈래의 색상이 제시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이것은 잘린 전선처럼 시작 부분에서 종점까지 달려갈 힘을 공급하는 감정들을 송출하던 무언가라고 나는 가정하고 있다.


그것이 냉정과 열정이라는, 전통적인 인간 감정의 두 가지 면모가 그들 사이의 관계에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만, 그 무엇보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은 영화의 얼굴, 그것이 잘 드러나 있는 시즈오의 얼굴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영화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정말로 일본 청춘의 이야기 또는 한국의 청춘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러한 영화의 환영 속에서 갑작스레 맨살을 드러내는 쇼트가 우리 앞으로 다가올 때 이것은 가히 영화의 속살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관계와 관계로 얽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사치코라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던 우리 앞으로 도착하는 것은 영화의 중반과 후반에 어울리는 붉고 푸르슴한 속살이다.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시즈오라는 인물을 통해 영화의 힘줄이 지나가고 있다는 점, 이른바 ‘나’로부터 출발해 사치코에 도달하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러티브에는 너와 나라는 여러 관계의 모음집이 아니라 따스한 것이 단박에 차가운 것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매정함이다. 요컨대, 도심은 분명 하나의 공간인데 그 속의 색상은 두 가지로 어울리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 말하자면 냉정과 열정, 그런데 그 중간은 있는 걸까.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찰나의 가치는 바로 그런 부분에 적용되는 게 아닌가 한다.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들에게는 그 속에 들려오는 멜로디 한 구절이 있고, 멜로디가 당신의 귀에 꽂히는 바로 그 순간을 찰나라고 칭할 수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의 쇼트라는 이름의 멜로디 중에 갑작스레 도달한 어느 쇼트가 바로 그 찰나일 테다. 또한 이 영화가 그러한 쇼트의 연속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선택의 순간, 그중에서도 우리 곁에 배경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비로소 우리의 앞으로 몸을 드러내게 될 때야말로 우리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일 것이다. 또는, 별다르게 생각되지 않았던 이가 갑자기 당신의 전면으로 다가올 때 그런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런 찰나로부터 배경에 있던 것들이 우리의 지금과 연결되어있는 방식을 목격하고 이해하고 그에 따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q0aeEYLkIE&list=RDUq0aeEYLkIE&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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