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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8. 2019

영화 안에서의 인간 주체와 영화라는 주체

 <블랙미러 : 밴더스내치>(2018)

영화 <블랙미러 : 밴더스내치>의 작품 포스터 © 넷플릭스

<블랙미러 : 밴더스내치>는 넷플릭스가 제작해 인터렉티브 무비라는 이름으로 절찬리에 홍보 중인 영화이다. 여기서 인터렉티브의 뜻을 한글로 풀면 ‘상호소통’ 정도가 되는데, 이 개념을 어느 시각으로 바라볼지에 따라 그 용어의 속뜻은 달라진다. 직접적으로 콘텐츠나 프로그래밍과 같은 제조의 영역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가 그곳에 명령을 투입하는 식의 소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아는 기존의 영화 담론으로 재현해낼 때에는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화 담론 중에서도 현대 영화에서 주류가 되는 것들은 대체로 스크린이 관객의 욕망을 반영한다던가, 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결국 어떤 경우에도 스크린이 대상으로 칭해진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터렉티브 무비라는 개념을 영화의 관점으로 접근할 때 이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물론 우리가 방금 언급한 사실은 본 영화를 관람함에 있어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학문의 장으로만 제시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대상성의 개념은, 본 영화에서의 관객의 선택이 밖에서 안으로 행해지는 방식으로 운용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이 영화가 관객을 작품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관객을 작품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


넷플릭스에서 영화 관람을 시작하면 관객은 눈앞의 선택지를 마주하게 된다. “본 영화는 시청자가 선택지를 선택하는 인터렉티브 무비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Yes or No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제시된다. 당연하지만 이때 No를 택하면 영화로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영화가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게 바로 <밴더스내치>가 기존의 영화와 다른 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테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최초의 영화는 갑작스레 눈앞에 도착했다. 시오타의 열차는 어느 순간 왔고, 공장 앞의 노동자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다. 이때 위의 두 가지 필름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와서 갑작스레 떠나간다는 점이 시간의 성질과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선형적인 흐름으로서의 시간이 인간의 삶에 대입되는 것은 몹시도 간단한 일이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유년 시절부터 그 끝에는 단절되어 너머를 넘볼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 철학의 테제로 우리를 뛰어들게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를 품은 시간에 우리를 대입하면서, 시간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을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치환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리는 그것을 시간의 편린 혹은 박제라고 칭했었다. 잠깐의 시간이 갇혀버린 그곳에는,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회귀성이나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탈육체화의 지점이 담겨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움직이는 사진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결국 우리가 필름을 부러워하게 된 것은 시간의 그러한 기능을 인간의 실존에 대입했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시간 안에 살며 시간에 조종받던 인간은, 카메라를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시간을 벗어날 수가 있던 셈이다.


<밴더스내치>의 도입부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이 그러한 대목이다. 기존의 영화가 우리에게 해당 시간으로 빠져든다는 사실을 부단히도 지워내려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이 영화의 도입부는 그것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도입부의 선택지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시간으로 참여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 선택지를 거부하면 우리는 영화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권을 포기하고서 영화의 환영에 몸을 맡길지 아닐지에 관해 고민해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요’를 선택하면 영화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이데거식의 존재론과도 닮아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하이데거 철학에서의 시간 개념과 영화의 존재론


하이데거 철학에서의 시간 개념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존재 이해의 지평이자 근거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세계 안으로서의 자신만을 인지할 수 있고, 그러한 인지에는 세계라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그 주장의 요지이다. 따라서 세계 안의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세계 안에 속해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세계 안에 흐르는 시간이다. 세계 안에 흐르는 시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선형적 시간 안의 필멸자임을 인지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은 죽음을 넘볼 수 없다는 지평선을 설정하게 되며, 이에 따라 인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에도 이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밴더스내치>라는 영화에 어떻게 절합될 수 있는지를 논해보자. 우리는 앞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조종받던 인간이 카메라의 의식을 통해 그러한 시간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논했었다. 이러한 바는 우리에게 익숙한 <트루먼 쇼>와 같은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있다.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 과정에서 존재 인식의 매개가 되는 것이 바로 카메라이다. 그는 자신을 관찰하는 카메라가 있음을 인지하고는 자신은 그저 세계 안에서 대상으로 지칭되는 피사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인식의 지평 너머로 잠시 은폐되어있었을 뿐이라는 점 또한 깨닫게 된다.


작품 내에서 죽은 아버지가 그저 단역배우에 불과했고 그러한 죽음은 연기에 불과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주인공 남자가 존재를 인식하게 되자 일상적으로 겪어왔던 것들이 이질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행태는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에 세계의 지평선을 넘보게 되는 것, 즉 탈시간화(탈육체화)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밴더스내치>에서 바깥세상에서 자신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주장하는 주인공 남자의 주장을 보면서, 마치 <트루먼쇼>처럼 이것이 기존에 흔히 언급되었던 영화 내의 존재론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밴더스내치>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그런 생각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밴더스내치>의 도입부가 형식상으로라도 관객에게 영화로의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트루먼쇼>가 주인공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다름 아닌 스크린 밖의 우리라는 점을 서사를 통해 주입하려는 반면에, <밴더스내치>는 도입부에서의 선택을 통해 스크린 밖의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고 결정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설정한다. 따라서 <트루먼쇼>가 하이데거식의 선형적 시간 안에서의 존재론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면, <밴더스내치>는 그와 반대로 선형적 시간 자체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을 따라가면 그러한 존재의 물음은 영화 안에서의 인간 주체가 아니라 영화라는 주체에게 던져지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영화 안에서의 인간 주체와 영화라는 주체


선형적 시간에서 우리 삶의 마지막 지평선은 죽음의 순간 바로 그곳으로 설정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의 시간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이유 또한 바로 그곳에 있다. 영화 안에서의 인간 주체가 우리 현실에서의 관객과 죽음의 지평을 공유하는 가운데, 영화라는 주체는 비선형적 시간 안에 자리하면서 그러한 지평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바라볼 때 어느 주체에 이입하는지에 따라 영화를 바라보는 관문이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는데, <밴더스내치>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이 인간 주체에 이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고 거의 강박에 가까운 목소리로 절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아마도 이러한 절규는 영화 밖의 관객에게 (어떤 은유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달되는 목소리일 텐데, 이러한 부분은 이 영화가 그리 기술적으로는 탁월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렉티브라는 사명 아래에 관객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착각하게 하는 이 영화의 서사 흐름은, 기존의 영화처럼 그저 여러 시간을 적재적소에 적당히 분배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기존의 영화가 쇼트 단위로 그것을 이어 시퀀스를 완성하는 것에 반해서, 이 영화는 여러 시퀀스를 가정하고 그것을 대강 거시적 흐름으로 이어버리는 단편적인 구성을 취한다는 점뿐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본작의 시퀀스 구성은 평행세계라는 이름의 동일한 순간과 그곳에서의 다른 선택을 끌고 오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의 수많은 중복을 거치다 보면 (2x2x2…) 그 모든 경우의 수를 보살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영화가 갖는 단편적인 구성을 현실적인 문제로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할 문제의 지점은 그러한 엉성함이 아니라 영화를 주체로 설정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던 영화의 설득력에 있다. 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심미성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라도 잘 알 것이다. 이 영화가 인터렉티브 무비라는 점이 심미성이 없어야 할 이유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인터렉티브 형식을 취하면서 심미성이 아니라 담론의 형성에 중점을 두기에 그러한 지적은 유효하다.


그렇다면 어떤 담론인가. 그것은 영화 밖의 우리가 영화를 조종한다는 소통의 지점이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조종하는 게 주인공이 아니라 영화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논의를 따라 인간 존재를 세계 내에서 시간 안에 종속된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영화 밖의 우리가 선택하는 시간에 따라 영화 속의 서사는 종속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의 주체는 서사가 아니라 서사를 품은 영화라는 형식이고, 그러한 형식에 따라붙는 것은 시간이기에 그 영화가 인간 주체에 비견될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할 수가 있다. 여러 번에 걸쳐 우리가 살펴본 것들에 의하면, 이 영화에서의 시간은 영화 서사를 결코 따라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영화라는 주체가 시간을 나아간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다.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영화


이때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물음 중에 하나는 인간 주체를 영화 주체에 대응시키려는 시도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일 테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에 인격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주체라는 것은 일방향으로 지칭되던 스크린의 대상성에서 그것을 탈피시키려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앞서 우리가 인터렉티브 무비라는 용어에서 상호소통성이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에는 이러한 시도가 뒷받침되고 있다. 또한 영화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때야 비로소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호소통성을 담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요구된 현실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영화적인 접근을 통해 미학에 관한 비평을 한다는 것에 대한 시도를 제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비평의 시점에는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었고 그것은 서사와 이미지라는 두 가지 층위의 구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타자와 소통하는 물리적 방식 중에 대표적인 세 가지 사항에 빗대면 다음과 같다. 말하기 듣기 쓰기. 서사는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것이고, 이미지는 시각적 요소를 통해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마지막 자리에 올 것은 듣기일 테다. 다시 말해서 영화와 우리가 소통하는 방법 중에는 듣는다는 것의 역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최종 단계에 돌입했다. 말하기와 쓰기라는 것이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향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발화는 입에서 귀로 전해지고 쓰기는 손에서 눈으로 전해진다. 말하자면 말하기와 쓰기의 소통은 주체가 대상으로 전하는 피상적인 소통방식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투과이며 대상으로 지칭하는 행위이고, 어쩌면 우리가 스크린 안의 것들에 일방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무비판적인 영화 관람의 경험이거나 혹은 로라 멀비가 말하는 스크린의 타자화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듣기라는 것이 맥락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장치, 귀와 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밴더스내치>의 도입부에서 인간 주체로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영화 주체를 보다 잘 이해하려는 열린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우리는 여태까지 본다는 것의 방법만을 알고 있었을 뿐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거나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인터랙티브 무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자 한다면, 영화적 접근이나 콘텐츠 분석의 시선보다는, 그에 전제된 세계와 세계 내존재로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영화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인간 존재와 영화 존재의 세계를 설정하고, 우리의 시간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물음을 영화의 시간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입함으로써 두 세계를 평행하게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밴더스내치>가 강조하는 평행의 개념일 테다. 이곳에서 있는 내가 저곳에서도 있다는 같은 시간 선상에서 작동하는 동조화(Coupling)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입구와 출구는 따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세계 내 존재로서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By 브런치 X 넷플릭스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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