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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5. 2019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순간에는

<하나레이 베이>(2019) 

영화 <하나레이 베이>의 작품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1.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에는 어느 여인이 썬베드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사치(요시다 요)로, 그녀의 아들은 이 해변에서 서핑하다 상어에 물려 죽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아들이 죽은 이국의 해변을 매년 이맘때쯤 찾아온다. 그리고는 품 안에 담긴 아들의 사진을 꺼내어보곤 한다. 그 사진에는 해변에서 서핑보드를 나란히 세워놓고 웃는 아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요컨대 누군가에게는 낭만과 청춘의 상징인 해변에서, 사치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죽어버린 아들인 것이다.


이때 카메라가 포착하는 이미지는 액자 속에 담긴 한 편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순간은 사치가 들여다보던 죽은 아들의 사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른바 ‘사진의 노에마’이다.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노에마’란 개념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진은 나에게 이상한 영매, 새로운 환각 형태이다. 지각의 차원에서는 허위이지만, 시간의 차원에서는 진실한 환각의 형태다.” 여기서 지각의 차원을 사치가 몸담은 해변이라고 가정하고, 시간의 차원을 아들이 몸담은 해변이라고 가정한다면, 영화에서 죽은 아들의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이중성을 담지한 것, 즉 상반되게 ‘존재하는(노에마)’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2.


죽은 아들이 해변에 뛰놀던 장면을 떠올리면 사치는 행복해진다. 반면 죽은 아들이 뛰놀던 해변이 이곳이라 생각하면 사치는 죽고 싶어진다. 요컨대 이 해변을 통해 두 순간은 중첩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진의 노에마라는 표현을 순간(Shot)의 노에마라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영화가 보여주는 해변과 사치가 떠올리는 해변의 모습은 같은가? 이것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명백하게 다른 두 개의 해변(순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영화에 두 개의 카메라(순간)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치를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고, 사치가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영화의 차원에서는 허위이지만 사치의 차원에서는 진실한 환각의 형태라는 말이 된다. 이때 사치는, 허위 속에서 죽음에 허덕이고 환각 속에서는 행복감에 젖어있다. 행복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라는 생각은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영화에서 사치는 죽은 아들의 손도장을 때가 되면 받아가겠다고 말하는데, 근 10년 동안 그러지 못했고, 단지 매년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를 찾아오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두고 ‘사진(순간)의 노에마’에 빗댈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은 아들의 사진, 그런 순간이 제공한 갈림길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게 그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진이 제공하는 갈림길은 각각 무엇인가. 첫 번째로 사치가 현존하는 해변에서 그녀는 아들의 부재를 ‘지각’하고 있다. 두 번째로, 사치가 회고하는 꿈속에서 그녀는 아들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확언할 수는 없어도 현실은 죽음이라는 단어에, 꿈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더 어울린다고 보는 게 합당할 테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쇼트)이 현실이자 죽음이라면, 사치가 포착한 영화 속 아들의 순간(사진)은 꿈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순간을 통해 산 자(사치)와 죽은 자(아들)의 시간은 공명하게 된다.


3.


이것이 영화가 제시하는 궁극적인 감정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중첩된 순간이 공명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사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과거의 쇼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사치의 시점에서 아들과의 추억은 산 자가 떠올리는 죽은 자라 말할 수 있을 텐데, 말하자면 그 과거는 자꾸만 현재에 개입해오려고 한다. 즉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린다고 생각했던 가설은, 어느 순간 과거가 현재를 침입하는 설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그런 지점에 대해 할 말은 없어진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이 영화를 회복이나 상실 둘 중 하나로 지정할 수가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순간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의 주된 배경이 파도치는 해변인 게 그런 부분을 보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포착하고, 영화 외적으로도 10년 동안 반복된 해변의 여인, 이것을 ‘순간’의 반복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사치의 유예된 선택을 보고 있는 것일 테니까. 넘실대는 파도에는 그 시작과 끝이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고, 그런 파도가 들어오고 나오는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 그것은 점점 사진의 노에마에 다가서게 된다. 어느 순간 그것이 사치의 마음에 오가는 감정선처럼 보이게 될 때, 그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이것을 회복과 치유의 영화로 착각하게 한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순간에는 양쪽의 감정이 담겨있다. 바로 그렇게 사진의 노에마는 양쪽의 역할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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