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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3. 2019

봉준호와 고레에다, 그리고 황금종려상


봉준호와 고레에다, 그리고 황금종려상


<기생충>이 개봉하던 날 아침의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은 말이 하나 있다. 고레에다의 <어느 가족>이 <기생충>과 함께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다면, <기생충>이 수상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대충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 아무래도 <어느 가족>이 상을 받지 않았을까요?”라고 말이다. 


두서없이 한 말이라 그 말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만, 적어도 그 질문이 내 머릿속에 계속 맴돌게 되었다는 점에는 확신을 둘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기에도 <기생충>과 <어느 가족>은 양극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었다. <기생충>은 제목처럼 가난한 집안이 부유한 집에 빌붙는 이야기이며, <어느 가족>은 제목처럼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가정을 연기하는 이야기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도둑 가족’이다.) 그러므로 상을 준 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년과 올해에 이어 칸은 양극화 문제에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칸은 소재보다 영화의 작품성을 먼저 본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지점인 것만은 사실이다. 요컨대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상은 칸이 준 걸까, 아니면 시대가 만들어낸 경향일까. 둘 중 어느 답변을 택하더라도 그게 영화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물음을 직설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의미가 크게 없다. 하지만 누가 상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감독이 아니라 나라를 대입하면 그 물음은 다소 흥미로워진다. 


국가가 영화를 대변할 수 있을까 


국가가 영화를 대변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영화 속의 풍경을 두고 영화의 국적을 논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이 글에서 필요한 만큼만 생각해보려한다. 


영화 속 풍경이 서울 대림동이라고 하면 일단은 서울, 한국에서 만든 영화다. 하지만 그걸 만든 스태프나 감독, 투자자가 다른 국가의 사람이라면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는 중국 영화 같지만 모두 영어를 쓰는 이상한 영화다. 여기서 그 영어가 더빙 처리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면 머리는 더 아파진다. 방금 예시로 든 것처럼 언어가 영화의 국적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런데 할리우드에 입성하는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영어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언어는 국적이 있는 영화에 진입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식의 논의를 계속 밀고 들어가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답이 나오지 않기에 무의미한 논의가 아니다. 적어도 이런 물음은, <어느 가족>이나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는 말을 설명해준다. 나는 칸에서 <기생충>을 두고 “이 영화를 자국의 사정에 맞게 번안해도 괜찮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의 요지는 <기생충>의 판권이 세계 곳곳에 팔려나가리라는 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굉장히 보편적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자신을 대입할 수 있기에 그만큼 보편적이고, 그런 보편성이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는 여기서 방금 했던 말을 둘러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무국적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진다고 위에서 가정했는데, 그렇다면 반대의 말은 성립하는가. 즉, 보편적인 게 곧 국적이 없는 이야기일까. 이른바, 담론이라는 이름의 형태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재미있게도, 우리가 사랑하는 두 명의 감독이 작년과 올해에 연달아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두 감독의 영화에는 늘 담론이 있었다. 그것도 자국에 특화된, 자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지역적인 담론이었다. 이를테면 봉준호의 <괴물>은 한국 사회의 미군과 언론 문제, 고레에다의 <아무도 모른다>은 고립되어 살아가는 밀집된 도시의 사람을 다루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영화 안의 메타포로 들고 왔다. (맥팔랜드 사건, 스가모 아이 방치 사건) 쉽게 말해 작품이 보여주는 게 실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서 실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자국민이 보는 시점과 외국인이 보는 시점이 조금 다르다. 기본적으로 둘 다 영화에서 담론을 목격하는 것은 맞지만, 자국민은 거기에 덤으로 자국 사회를 엿보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딱 거기까지다. 외국인이 실화를 바라보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자리에만 그친다. 왜냐하면 타자의 자리에서 주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빗대어 상대를 바라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얼굴 위에 달린 눈으로 상대를 보는 우리에게 안구에 비친 상만이 존재하듯이, 외국인의 눈으로 자국을 바라보는 것은 안구 안에 비친 상에 불과하다. 결국 타자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이 아무리 해당 실화를 알더라도, 보편적인 감정이나 자국의 비슷한 사건에 빗대어 그것을 이해할 뿐, 사건이 돌아가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몸소 겪은 자국민의 감정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모 평론가의 <기생충>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미장센을 지닌 이 영화에 서양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구도가 서양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한국의 탈을 쓴 서구 영화다. 그 이유로 덧붙여지는 사실은 이 영화의 구조가 19세기를 다룬 귀족 영화와 결이 같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게, 나라가 발전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 먼저 자리 잡은 부르주아들이 시골에서 상경한 이들을 지배하는 60년대를 떠올릴 수 있겠다. 서양에서는 이런 과정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산업혁명 시기에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시기에 귀족의 저택 안으로 들어온 하층민의 이야기는 서양인들에게 몹시 익숙하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사회적 현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에는 전래동화처럼 변해버렸고, 그래서 익숙하다는 것이다.  


모 평론가의 글에서는 김기영의 <하녀>가 마스터피스로 서양에서 주목받은 이유로 그것을 거론했다. (<하녀>를 고려했다고 봉준호 본인이 밝힌) 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부르주아 집은 19세기 유럽의 귀족 저택처럼 보인다. 또한 그곳에는 집사에 대응하는 가정부 문광(이정은)이 살고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유럽과 21세기의 한국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한국의 귀족은 근본적이지가 않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졸부다.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유전자 아래에는 서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들 사이에서 나뉘는 위계가 이 영화에 깃들어 있다. 


이 평론가의 글은 한국적인 영화 <기생충>이 서양의 한복판에서 환대받은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하지만 해당 평론에는 우리가 못다한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분명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것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그것들을 이해해보려고 해도, 우리의 눈으로 바라본 타자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다. 따라서 <기생충>도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뿐, 그들이 한국의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다만, 그런 변형에도 본래의 형태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그 못다 한 이야기는, 우리가 앞서 담론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던 원형(Archetype)이다.


칼 융이 말하는 원형의 개념은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무언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국의 신데렐라나 한국의 콩쥐팥쥐 설화는 계모와 왕자라는 원형을 공유하고 있다. 이 대목은 우리가 우리의 시선으로만 타인을 보게 된다는 한계를 보완해준다. 왜냐하면, 나라별로 다르지만 비슷한 설화가 있다는 점은, 개인의 시야가 타인과 달라 보여도 사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리가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가 ‘타자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보탬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 


흔히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관용어구로 “다른 나라 이야기에요.”라는 표현을 쓴다. 왜 애인이 없냐는 사적인 대화부터, 왜 우리나라는 만 나이를 사용하지 않냐는 공적인 대화까지도 포괄한다. 그리고 위의 생각을 거치면서 나는, 다른 나라가 과연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다른 나라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것에도 원형이 자리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도 말했었다. 


흥미롭게도 계급이 나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각각 다른 나라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세상, 다른 세계, 다른 나라의 이야기. 같은 공간에서도 누군가는 명령을 내리는 반면에, 다른 누군가는 명령을 받고 있다. 여기서 원형이라는 말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식의 발언을 한다면 그건 몹시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무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뉴스를 보며 벌어지는 사건에 우리가 이입하게 된다면, 그건 자국의 사건이라던가 아니면 개인의 사건이라던가 그런 사건의 원형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느끼는 것일 테다. 


이야기가 엇나가는 것 같아서 초점을 돌려보면 나는 그것들이 동시적으로 벌어진다는 점에 무게를 둔다. 타인과의 감정적인 동화가 실제로 이해의 영역이든 아니든 간에, 나와 그가 같은 땅을 밟고 서 있다는 동시대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뉴스를 보며 타국의 사건에 슬퍼한다면, 그 감정은 우리가 숨 쉬는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 귀인한다. 


그런데 <기생충>이 어떤 영화인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그 작품의 무대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 작품에서 박사장(이선균) 가족이나 기택(송강호) 가족이 나오지만 주된 무대가 박 사장 집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반지하에서 시작한 무대가 박사장네 저택으로 옮겨가면서 내부는 외부와 고립된다. 박 사장네 저택으로 기택 가족이 진입해갈수록 그들의 본래 주거지인 반지하는 노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다. 


영화의 후반에 박사장네에서 도망치듯 나온 기택네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택의 반지하 집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반지하가 자리한 동네로 진입하는 구역에는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계단이 있다. 이 이미지는 기택네가 계단을 통해 올라가던 박사장 저택의 입구에 대응한다. 그러니까 이 계단의 이미지는 단순히 상하의 흐름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일종의 통로에 해당한다. 이 진입지점을 통해 공간은 분리되고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이 생기듯, 질서 또한 그렇게 분리된다. 


영화를 차근히 되짚어보면 기택네 가족은 아주 정직하게 입구를 통해 저택으로 들어선다. 따라서 그들이 저택으로 진입할 때와는 다르게, 저택에서 나올 때 쫓기듯이 나온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지점이다. 저택으로 진입한 그들이 저택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라면, 그런 질서에서 도주하는 건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이 부분은 이 영화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주체/자국/기택네의 시점으로 타자/타국/박사장네에 진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허울뿐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결국 이해는 불가능하다. 


영화에서 기택네가 반지하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박사장네에 종속되어있던 기택네가 풀려나는 것처럼 묘사된다. 집을 돌려받는다는 표현도 성립한다. 박사장네에 정체성을 동화시키려던 기택네가, 그에 실패하고 다시금 돌려받은 정체성이 바로 반지하집이다. 박사장네로 진입하기 위해 반지하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타국에 동화되어 자국의 정체성을 지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곧 집에 귀속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무대는 곧 신체/집/국가/주체라는 기표가 뛰노는 기호, 그런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같은 계급이 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 있다고 같은 사람인 건 아니다. 거실에서의 스릴러 장면을 포함해, 그들의 상하관계를 고려하면 그렇게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이 대목이 한국적인 이 영화가 칸에서 환대받은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공간이 모든 것을 점유하고 있다.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동시대성을 설명해주는 동시에, 계급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게 공간 하나가 원형이라는 이름으로 이해와 불이해의 표지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공간 하나에 이해와 불이해 모두가


<기생충>에서는 공간 하나에 이해와 불이해가 공존하는데, <어느 가족>에서는 오직 이해만이 있다. 요컨대 이 가족의 목표는 불이해를 지우고 이해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타협과 화해인 듯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면 두 영화는 확실히 다르다. 칸에서 연년으로 상을 받은 두 영화를 그렇게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느 가족>에서 여러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한 집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집이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는 장소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기생충>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바쳐서도 취하고 싶은 게 타인의 정체성이었고 그런 시도가 실패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들의 모습은 그나마 성공한 듯 보인다. 정체성을 지우는 게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체성을 취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기생충>에서 기택네 가족이 정체성 획득에 실패한 것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두 개의 그룹이었다는 점에 있다. 집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각자의 정체성이 확고했다. 기택네와 박사장네, 두 개의 집. 영화에서 냄새로 비유되는 반지하의 정체성은 그들이 부르주아 가정으로 들어섰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사라지지 않은 건지 저버리지 않은 건지 모호하다. 어쩌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딱 이 선만큼이 자신의 자리라며 확고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타인의 정체성을 취하려면 개인의 정체성을 버려야 함에도 그들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두 영화를 합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집으로 진입하기 위해 정체성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체성을 지우고 잠입한 그 집에서는 누구도 과거를 묻지 않는다. 즉 과거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살아온 정체성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차이라면 <기생충>에는 가족이 두 개고(문광을 제외하면), <어느 가족>은 한가족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기생충>에서는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타인의 정체성을 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듯 보인다. 반대로 <어느 가족>에서는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 자체가 타인의 정체성이라서 그걸 모방해야만 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정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정(情)이라는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이 일본에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마에(甘え)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 또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정과 아마에가 일종의 데칼코마니처럼 (정신분석학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도이 다케오에 따르면 아마에라는 것은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어려지고 싶은 마음을 뜻한다. 단어로 표현하면 어리광쯤 된다. 이때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과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이 주고받는 관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런 관계에는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받는 게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이다. 


아무런 대가가 없다는 점에서 라깡의 욕망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두 개념을 볼 때, 어머니를 주체로 볼 것인지 자녀를 주체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정이라는 단어는 어머니가 주는 쪽이고 그래서 어머니가 주체이다. 아마에라는 단어는 아들이 받는 것이고 그래서 아들이 주체이다. 이쯤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정과 아마에는 시점의 차이만이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이 위에서 언급한 주체/자국과 타자/타국의 맥락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지점이면서도 소름 끼치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다. 


이걸 두 영화에 대입하면 욕망의 작용을 다음처럼 표현할 수 있다. 한국 영화인 <기생충>에는 정이 주된 정서로 자리하고, 아낌없이 주는 관계이기에 정체성 또한 주는 쪽이 되어야 한다. 일본 영화인 <어느 가족>에는 아마에가 주된 정서로 자리하고, 이유 없이 받는 관계이기에 정체성 또한 받는 쪽이 되어야 한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런 욕망이 정체성을 갈망하는 것으로 치환된다면, 사실 <기생충>은 자신의 정체성을 주려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어느 가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받으려고 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기생충>의 도입부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보라. 기우는 친구의 소개를 받아 박사장네를 방문한다. 과외선생으로 박사장네에 들어간 기우(최우식)는 연달아 자신의 가족을 데려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식 정(情)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부르주아 정체성을 탐하는 듯 보이는 이 영화는, 정체성을 갈망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정체성을 주고자 하는 정(情)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기택네는 박사장네에게 자신들을 대입하여 동등한 자리에 서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미장센도 거실로 올라오는 장면이 주가 되지 거실에서 위로 올라가는 장면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거실이 영화의 주된 무대이고 그들이 되려는 부르주아 정체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들은 거실에 자신들을 대입하려고(주려고) 한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또 <어느 가족>의 이야기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도둑 가족이 어느 날 유리(사사키 미유)를 발견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유리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이고, 영화 후반부에 유리는 다시금 원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에의 맥락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유리를 받아들인다는 서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시작할 때에는 그들이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점만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유리가 가족의 품으로 들어오자, 그들에게는 유리를 중심으로 정체성이 재편된다. 집안의 막내이던 쇼타(죠 카이리)는 유리를 책임질 오빠가 되고,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에게는 아들말고 딸이 생기게 된다. 하츠에(키키 키린)에게는 손자가 생긴 셈이 된다. 영화에서 유리의 등장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들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정체성이 줄곧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이 태초에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게 되고, 동시에 그 정체성을 줄곧 획득해왔다(받아왔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 두 영화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적하고 있다면 해석은 그런 쪽이 되어야 할 듯싶다. 주고 싶어하는 게 한국 영화라면, 한국의 현실에는 받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고. 받고 싶어하는 게 일본 영화라면, 일본의 현실에는 주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이다. 영화는 보통 현실이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도록 현실과 반대된 이야기를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주고받는 모습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야 한다. 문제의식이야 어떻든 간에, 정과 아마에처럼 정체성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 영화가 연년으로 상을 받은 우연이 이런 담론적인 측면을 강화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레에다의 <어느 가족>이 <기생충>과 함께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다면, <기생충>이 수상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두 작품은 같은 원형을 공유하기에, 또한 두 나라는 같은 원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를 두고 벌어지는 10년의 차이가 그런 점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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