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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0. 2019

우리들은 20세기를 살고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작품 포스터 © 리틀빅픽처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영화를 보고 막 나오는데 통로에서 다른 일행이 하는 이야기를 무심코 듣게 되었다. 세 명 정도의 남성들이 하는 대화 중에 가장 처음으로 빛을 본 것은 감탄사였다. 소공원파의 보스 허니가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는 순간과 그전의 쇼트들에 관한 감탄사, 그는 “나는 절대로 저런 장면을 찍지 못할 것 같다.”고 옆의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발언은, 영화의 마지막에 영화 촬영소로 들어오는 샤오쓰가 감독에게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도 못 하면서 무슨 영화를 찍는다고 그럽니까.”하고 비판하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그 발화는 영화 내의 감독에게 행해지면서도 영화 밖의 감독인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기루를 두고 어서 현실로 돌아가라며 관객을 종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찍지 못할 것 같은 장면을 찍어내는 재능에는 그만큼 현실을 왜곡한다는 점이 사유의 지점으로 담겨있다. ‘거짓말 같은 풍경’을 찍는다는 건, 설사 진실을 그대로 묘사했더라도 그게 여전히 환상처럼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여기서 질문, 환상을 보여주는 게 영화의 본질이라면 영화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스크린이라는 무대에 올려진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사진의 본질인 리얼리즘을 잃게 된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가 아무리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크린이라는 흰색 장막에 가로막힌 장벽에 불과하다. 따라서 스크린을 보는 우리는 멍청하게 속고 있거나, 혹은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소리가 된다. (시네필이라는 낯간지러운 칭호에 따르면) 아마도 후자라고 보는 게 맞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샤오쓰의 발언을 다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세요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은, 샤오쓰의 맥락에서 밍의 본색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연기를 잘한다는 감독의 발언에 혀를 차는 샤오쓰의 얼굴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랑하는 소녀가 자신에게 보냈던 신호가 사실은 가짜 신호였다는 점에서 기원한 분노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것이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주관적인 평가로 유발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아온 우리에게 밍이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발산하는 소녀라는 사실은 몹시 쉽게 발견되지만, 그저 개인에 불과한 샤오쓰에게는 오로지 사랑의 수신자로서만의 역할이 주어진다. 요컨대 우리와 그들에게 발신지와 수신지는 명확하지만 사실은 그런 기호가 해석된다는 점에 의문을 두는 게 이 영화의 본질이다. 영화의 주 무대가 학교라는 맥락에서는, 학교가 가르치는 교과서의 텍스트가 학생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 도출된다. 또한 고장 난 라디오가 전파를 수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그 뉴스가 말하는 텍스트가 진실인지에 관한 물음이 도출된다. 나는 그러한 텍스트의 발신과 수신 과정에서 수신에 중점을 두는 이 영화가 텍스트의 진실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에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시작된다. 밍은 사랑을 하는가. 밍의 사랑을 탐하려던 남성들은 모두 좋지 못한 결과를 맞이한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그렇다. 밍을 위해 적대 조직의 보스를 죽인 소공원파의 보스는 적대 조직에 새로 부임한 보스에게 살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허니의 빈자리를 노리던 남자 샤오쓰는 그 남자친구 자리를 꿰차나, 자신 또한 허니와 동일한 방식으로 밍에게 버림받는다. 밍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샤오쓰는 그동안 자신의 감정이 착각이었거나 혹은 사기당했다는 느낌을 받고는 밍에게 달려가 칼침을 놓는다. 이때 샤오쓰는 감독에게 달려가 그런 감정이 정말로 존재했었는지를 묻기도 하고, 샤오마에게 달려가 빼앗긴 감정을 돌려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마치 기호의 발신과 수신에 관한 코미디극처럼 보인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부질없음에 대해 노래하는 여러 미디어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개인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주로 부각되고 있다.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날조는 짝사랑이다. 짝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은 상대방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해석하려고 든다. 이 과정이 모두 개인의 시야 안에서 관측되고 해석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워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짝사랑이란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일방적인 나’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따라서 이런 일방적인 면모에 객관적인 태도가 개입할 지점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짝사랑이 슬픈 이유는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끝없는 주관의 영역으로 이입시킨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그런 사랑의 기호적 번역을 제시하자면, 짝사랑에서 우리가 사랑을 보내는 지점은 어디인가. 다시 말해서, 짝사랑이라는 기호에서 사랑이 떠나와서 도착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도달하는 지점이 어디까지나 자신이라는 거울에 반사될 뿐인 이 감정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만이, 앞서 말하는 나르시시즘과 같은 궤변이 전제로 작동한다. 이에 대한 쉬운 해석은 다음과 같다. 어쩌면 짝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함에서 오는 쾌감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에는 리얼리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기호는 우주를 떠도는 전파처럼 수신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의 영화적 번안, 우리가 스크린에 보내는 사랑은 어디까지나 짝사랑이다. ‘그’는 우리의 연민을 받아들일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그를 알고 싶어 하고 다시 보고 싶은 감정은 어디까지나 그런 우리를 향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영화를 물어도 영화는 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를 향한 우리의 물음은 언제나 자문자답으로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신지가 분명하지만 수신지가 정해지지 않은, 우주를 떠도는 스푸트니크호처럼 허공을 떠도는 이 기표의 수신지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말하자면 카메라가 촬영한다는 사실은 분명해도 그런 촬영의 결과물이 곧 세계의 어느 부위를 목격(수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를 만들어낸 이유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영화관의 일행이 던진 물음에 그런 해답은 이미 담겨있다. 에드워드 양은 그 장면을 어떻게 찍을 수 있었는가. 혹은 찍게 되었는가. 그는 영화를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를 무차별적으로 던진 것이다. 그렇게 발신된 신호가 스크린이라는 장막에 막혀 카메라의 나르시시즘으로 번안될 때 비로소 그 장면은 성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영화를 찍는다거나 혹은 그를 통해 무언가를 말한다거나 하는 웅변의 현장이 아니다. 에드워드 양은 광활한 현실에 물음을 던지고, 그 우주 어딘가로부터 외계 생명체의 응답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샤오쓰가 감독에게 외치는 말을 듣고 이 영화, 그것이 직시하는 대만의 60년대 역사에 대한 리얼리즘을 떠올린다는 점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해석은 “영화는 영화로만 보세요.”라는 에드워드 양의 친절한 발언이라는 것인데, 이 맥락에는 영화이거나 혹은 현실이거나 단 두 개의 선택지로만 선택이 국한된다. 과연 우리는 두 개의 선택지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당신은 정말로 영화 혹은 현실만을 보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우리에 비추어 본 영화를 보고 있고, 영화 또한 그런 ‘자신에 비추어 본 영화’를 보고 있다. 그에 대한 증명은 우리가 이따금 목격하는 생명체로서의 영화에서 찾아낼 수 있다.


역사는 후면으로 사랑이 전면으로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지점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있다는 게 이유이다. 영화가 자신에 비추어본 감정을 나르시시즘으로서 표현할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게 바로 자의식을 가진 영화의 실체이다. 이런 실체를 목격한다면 우리는 영화에서 타자화라는 단어를 꺼낼 수가 없게 된다. 샤오쓰가 사랑하는 대상인 밍의 모습이 ‘영화’처럼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영화 속에서 남자들이 자신을 감정의 도피처로 이용한다고 말하는 밍의 모습에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견주어 영화를 해석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한 대목이 여성의 타자화라는 부분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팜므파탈로 설정된 밍의 모습은 우리가 영화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밍이라는 이름에 영화를 대입한다면, “남자(사람)들은 나를 감정의 배출구로 이용한다.”고 말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감정을 이입해 울고 웃는 우리는 그(영화)를 이용했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사랑으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나 착각 속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짝사랑이라는 일방적인 응시가 스크린을 향한 관객의 일방적인 응시에 대응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성립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밍을 발견하는 순간은 다음의 결론을 도출한다. 영화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에 감정을 투입하는 것은 언제나 그를 떠돌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역사를 알게 되는 순간 목격자가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에 들어선다는 말은, 진실을 목도함에서 오는 충격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대만의 역사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거나 혹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처지에 놓여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의 역사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줄곧 역사를 지워 나간다면 이 역사에는 종착지가 없게 된다. 원래부터 영화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곧 밍의 모습을 설명할 단서가 된다. 이 영화에서 밍은 도둑맞은 편지처럼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에게는 늘 짝사랑 상대로의 기표가 있는데 그것이 완성되려는 순간에는 늘 기의의 부재가 수면으로 떠오른다. 즉 영화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다는 말은 사랑이라는 기표만이 존재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녀가 의도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미끄러짐이 그녀의 시간을 만들어낸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요컨대 나는 밍 자신이 사랑이라는 기표를 스스로 뒤집어썼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런 행동을 통해 줄곧 미끄러지게 되는 밍의 모습에서 대만이 걸어온 길을 찾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사유는 영화 속에서 대만 국가가 흘러나오자 모두 일어서 경례를 하는 장면에서 비롯된다. 마치 한국의 60년대, <국제시장>속 어느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장면에는 애국심이 투철한, 독립한 지 1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대만의 한 시대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런 시대로 향하는 도입부는 사실 영화의 시작지점에서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쓰고 종장에는 ”최초의 소년 살인범이었다.”고 말한 대목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런 시대의 흐름 중 어딘가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런 의식은 이 영화의 시간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역사라는 이름의 기의는 사랑이라는 기표와 결합되어 바로 이곳에 나타나고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역사는 후면으로 물러나고 사랑이 전면으로 떠오를 뿐이다.


애국(愛國)을 한다는 게 곧 현실인 시대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직 역사를 거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미 역사의 한 자리가 되어버린 이 필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지 그것의 일부로만 보이게 된다. 이 거대한 역사 담론 앞에서 샤오쓰와 밍의 사랑 이야기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만 그친다. 그런 맥락으로 사랑을 위해 죽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나라를 위해 죽어간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샤오쓰가 밍을 칼로 찌르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해명된다. 샤오쓰가 불완전한 사랑의 균열에 칼을 찔러넣음으로써 얻은 쾌감은 역사의 불완전함에 꽃은 비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르시시즘이라는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이상향에 만족을 찔러넣으려는 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들은 20세기를 살고 있다


기표를 고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역사의 흐름을 멈추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실제로 샤오쓰는 범행을 저지름으로써 시간을 노역으로 부과받는 곳, 교도소로 끌려가게 된다. 교도소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시간을 가두어놓는 곳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그런 해석은 합당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에드워드 양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간을 가두어놓는 곳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곧 스크린이 시간을 가두어놓는 장소라고 보았으며, 이 스크린은 우리의 해석을 찔러넣는 지점이 된다. 끝없이 변화하는 기표의 쓰나미에서 우리가 즐기는 게임이 상징을 조합하는 조합게임이라면, 그건 마치 시간을 즐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고, 그런 시간이 개인의 선에서 내면으로 반사되는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라고 에드워드 양은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다. 영화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은 곧 영화에 그만큼 몰입한다는 말이나 다름없기에, 이른바 시간이 멈춘 순간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면 시간이 멈추어 버리고 영화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기에.


만약 밍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사랑의 대상으로 지칭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랑의 리얼리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을 테다. 불을 켜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을 끄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는 영화의 도입부가 명암을 분명치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런 시간은 시작되었다. 실내장면에서 대낮처럼 환한 모습이 알고 보면 어둑한 바깥을 염두에 둔다는 점은, 이것이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구분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두고 있다. 그런 식의 구분을 삭제하려 하는 영화는 더 나아가 정전이라는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어디에서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를 이 정전 사태는 영화 도입부의 깜빡이는 전구에서 비롯되어 깜빡이는 영화 속 상황들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곧 영화가 촬영장에서 시작해 촬영장으로 끝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게 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불이 꺼지고, 영화가 끝나면 불이 켜지는 이 찰나의 순간이 전구의 깜빡임을 연상시키는 순간에 이 영화의 찰나란 편집된 역사, 그 불명확한 기호로서의 시간을 의미하는 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영화도 그렇게 살아간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들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발신되는 전파를 속으로 삼키면서. 하지만 분명 들려오는 사실을 말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고장 났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떠도는 풍문들을 애써 모른 채 해야 하는 샤오쓰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런 역사이다. 우리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게 꼭 진실을 향한 탐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게 그저 계속해서 우주를 떠돌기만을 바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빛과 어둠 그 점멸의 순간에 드러나는 영화라는 잔상, 현실의 일부가 영화관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은 잠시나마 사랑을 느꼈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한다. 허나 그것은 고정되지 않은 기표 혹은 시간에 불과하다. 역사로 말하면 담론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에드워드 양이 말하는 영화라는 게 이 영화 속 여성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영화와 여성은 타자화되는 듯 보이면서도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 그게 곧 진실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타자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자화하지 않으면 그는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타자로 지정하여 기호로 만들지 않으면 해석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도 영화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기에 우리는 그를 팜므파탈로 지정하고 사랑하는 동시에 배척하는 시도 또한 동시에 자행한 것이다. 요컨대 영화와 팜므파탈의 공통점은 풀이자를 호기심의 미로로 이끌어 해석에 굶주리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결코 이미지와 상징으로 조합되는 추상게임이 아니다. 연애, 곧 여성도 마찬가지다. 연애 상대 혹은 정념을 쏟아낼 장소가 마땅히 지정되지 않은 이곳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샤오쓰보다는 밍이 되어야 마땅하다. 밍의 말처럼 영화는 감정을 요구받고 그 대가로 짝사랑을 충족시켜주는, 나르시시즘에 제시하는 마지막 퍼즐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영화를 만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랑을 해야만 비로소 그런 시간이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야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고, 그게 곧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리얼리즘의 증표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은 아직도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테다. 21세기의 담론과 21세기의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인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방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만 있다.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는 최전선을 사는 중임에도 그것을 보는 방법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있다. 적어도 영화에 한해서 21세기의 사랑 방식은 무차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해석의 방식을 언제든지 조합할 수 있는 형태로 ‘준비(레디 메이드)’시켜두는 게 아니라, 밍의 모습처럼 누구에게도 빗대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게 설사 자신일지라도 기댈 수가 없다는 점은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슬픔이 아니라, 시대가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고 우리의 시간도 그리도 빠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극복될 수가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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