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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6. 2019

인생은 심리고 삶은 스릴러다

<블랙 스완>(2010)




<블랙 스완>의 작품 포스터 ©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자녀에게 주입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여러 미디어에서 차용되는 설정 중 하나이다. 동시에, 현실에서도 그런 부모가 실제로 많다는 점이 그것을 단지 설정에만 불과하지 않게 해준다. 이때 미디어와 현실 중에 무엇이 모체가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미디어가 그런 부모를 만든 게 아니라, 그런 부모가 있기에 미디어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가 등장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을 테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무언가가 작용하기에 벌어지는 일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회적 관계 중 하나인 ‘가족’의 틀이 그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라고 말하는 걸까. 전자의 경우에는 자식은 자신의 복제품이라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이론이지만, 이 경우에는 생물학적이지 않은 가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공동체적 동등성으로 하나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근본적인 동등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사랑하기에 닮는 것인지 닮았기에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블랙 스완>은 심리스릴러로 칭해지는 영화이다. 여기서 심리스릴러란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면서 관객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지칭한다. 말하자면 심리스릴러 장르란 철저하게 관객 위주로 짜인 무대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스릴러 장르에서는 대체로 작품의 내적인 감정들을 그 외부의 관객들에게 어필해야만 하는데, 여기서 주로 선택되는 감정은 사랑이나 증오와 같은 강렬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강렬하지 않으면 감정이라는 추상이 스크린을 건너기에는 애로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런 감정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타당한 맥락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무언가라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심리 스릴러는 인간의 본성을 직격한다고 말할 수 있겠고, 그런 점에서는 공포 장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사실 ‘스릴(thrill)’이라는 단어부터가 적절하게 주어져 유희로 즐길만한 수준의 공포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심리스릴러라는 것은, 작중 인물에게는 공포이지만 그걸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에겐 ‘희석되어 전달되는 유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면, 가족이라는 틀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로에게 희석되어 전달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주인공 니나(나탈리 포트만)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주입시키는 강압성과 그에 순순히 따라야만 했던 자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는데, 이러한 관계가 본상과 거울상과도 같다는 점을 먼저 전제해두자. 본상과 거울상의 관계는 자신을 비추어 본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자신만을 따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종속성을 띠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투사되는 관계, 어쩌면 인형과 인형사라고도 칭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인형사임에도 그런 인형을 물리적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기 뒤에 따라붙은 그림자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인형사와 인형의 관계는 종속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모호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불협화음 속에서 드러나는 나르시시즘이 거울상을 자신의 모습으로 설정하면서, 그것에 삼켜지는 듯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몹시 자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형과 인형사, 어머니와 딸. 이 두 관계의 유사함은 조종하지 못하면서 조종하려고 드는 이기심에 있다. 어머니와 딸은 유전적으로 같은 개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유전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한 개체이기도 하다. 이런 모호한 관계 속에서,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과 그럼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는 톱니를 잃고 자유롭게 굴러가게 된다. 역설은 그 점에서 싹트게 되어 언젠가는 체제 전체를 붕괴시킬 모순을 만들어 내게 된다. 재미있게도 어머니와 딸이라는 체제가 붕괴하는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게 그런 점이다. 어머니의 인형으로 존재하던 니나가 체제 안에서 생존하던 방법이 자신은 독립된 개체이면서도 동시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었다면, 발레라는 하나의 공통분모는 단순한 매개체가 아닌 매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발레라는 개념은 집단 속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동시에, 나르시시즘을 지닌 단 하나의 존재가 두각으로 나서야 하고, 그런 존재는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형질을 ‘유전’해주어야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발레와 가족은 서로 같은 체제를 공유한다.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단체나 생물적으로 이루어진 단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점이 그들 사이를 가까이 붙여 놓지는 않는다. 이 유사성은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적할 수 있는 대목은, 발레 극단 안에서도 가족 관계 안에서도 그들을 이어놓는 것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로 발레 극단 안에서 프리 마돈나로 선정된 니나와 단장 토마스(뱅상 카셀)와의 인연은 한 줌의 키스로부터 시작된다. 그 전에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어도 영화 안에서는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다. 그리고 이때 니나는 토마스의 혀를 씹으며 강하게 거부하지만, 그것이 불합리하고 고발당해야 할 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자신의 부모님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고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처진 모습을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고 드는 것은 부모님과 (같은 극단의) 친구들이다. 이것을 빗대어보면 그녀가 언제까지나 인형으로서 남는다고 할 수 있겠고, 이 대목에서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자면 그녀를 조종하는 인형사는 사실 ‘없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속임수이다.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에서 속박되어 있던 인형이 자아를 품고 하늘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는, 사실은 조종하는 이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가족이나 발레 극단과 같은 원초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원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것이 곧 주술인 것이다. 본상과 거울상의 관계가 바로 그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이다. 굳이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녀가 짊어진 모든 압박 속에는 부모와 친구 관계의 불협화음이 있을 테니 거시적인 면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니나이다. 마찬가지로 발레 극단의 이번 시즌 공연이 백조의 호수라는 점에서 공주는 단 하나여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단장 토마스는 이번 공연은 조금은 색다를 것이라면서 백조의 역할에 흑조라는 수사를 덧붙인다. 그냥 보아도 백과 흑이라는 이분법이 떠오르는 가운데,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느끼게 될 감정은 그토록 상반된 역할을 위해 그녀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일 테다. 그러나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가 뒤바뀔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만약에 이 영화를 니나 자신이 아닌, 니나와 부모 혹은 니나와 친구 사이의 갈등으로 보게 된다면 그 관계의 전복이 언제 일어날지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영화는 백조의 호수 공연 전 대기실에 들이닥친 친구를 살해하는 니나의 모습을 통해서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속임수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백조의 호수 공연 중에 주어진 15분 동안 니나가 대기실로 돌아와서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니나가 죽여서 화장실에 유폐해두었다고 생각했던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단지 깨진 거울만이 흐트러져 있을 뿐이다. 여기서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해답은 자신은 애초에 시체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발칙함이다. 분명 니나가 친구의 시신을 유폐시킬 때 카메라는 고개를 쳐들지 않고 단지 발목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조된 증거이다. 일부러 카메라의 초점을 흐리고 핸드헬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인 근접성을 저버리면서까지 카메라가 추구하려 했던 것은 거울상이었다.


카메라는 니나가 아니라 니나의 뒤로 맺히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한다. 카메라는 단지 초점만을 흐리지 않을 뿐이고, 정작 소실점이 맺히는 곳은 니나가 아닌 니나의 살짝 뒤다. 은밀하게 보내는 이 시선을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니나가 늘 데리고 다니는 자신의 거울상이 그곳에 있음에도 우리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단장 토마스이다. 토마스가 니나를 두고 백조만이 보인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흑조가 보인다고 말한 까닭은 그녀의 그림자가 늘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림자가 영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부분은 니나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과 합을 맞추지 않는 상을 볼 때이다. 자신을 따라하지 않는 그림자의 모습은 인형과 인형사의 관계에서 종속성이 해체되어 단지 모사만이 남은 관계, 즉 초점을 경계로 양측이 바뀌어도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자아낸다. 이렇게 되면 겉모습은 같아도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존재의 소실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게 된다. 요컨대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 상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다. 즉, 이것은 나르시시즘이다.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의 도식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가져온 이 영화에 대해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시치미를 떼는 것도 웃긴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자신이 존경하던 사람의 거울상으로 남는다는 점을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여기서 흥미로운 가설을 하나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라깡을 이용하여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가 과연 정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라깡의 발언 첫째,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서로가 되려는 이 사랑의 모티브에서 라깡이 첨언하는 것은 상대방을 닿을 수 없는 존재로 가정하는 것, 즉 끝없는 욕망 허울뿐인 기표이다. 라깡은 욕구를 근원적인 것으로 욕망을 기원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둘 다 충족될 수 없지만, 욕구가 충족된다고 착각하게 되는 반면에 욕망은 그런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여기서 욕구는 그림자에 욕망은 본상에 해당한다.


라깡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자기애를 바탕으로 한 본상과 거울상의 주술관계가 성립한다. 주어인 니나가 자신을 풀어나가게 되는 게 술어인 거울상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그러나 주어를 이끄는 게 실상은 술어임에도 불구하고, 주어가 그런 술어의 존재를 눈으로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불안감이 파국을 낳는다. 이 말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 욕망을 이끄는 것은 욕구이고, 그러나 욕망이 욕구를 목격하는 순간에는 실재계의 공격이 시작된다고 말이다. 그 둘이 손잡는 순간 실재계의 풍파가 잠잠해지며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주이상스라는 목소리다. 억압된 성욕에 눈을 뜨라며 첨언하는 주변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엑스터시와 같은 마약에 취하게 된 니나는, 그 방탕함의 장막을 걷어내 그 속에 있던 주이상스의 모습을 엿본다.

 

하지만 사실 이 해석에는 라깡의 도식이 어느 장소에도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제하고도 남은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다. 이 영화의 장르가 심리스릴러라는 점이다. 적당하게 정제되어 공포를 우리에게 즐길 거리로 제공해주는 이 장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매체인 덕분이다. 매체라는 게 기본적으로 수용자와 세계를 잇는 통로라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수용자와 세계의 관계는 종속적이면서도 독립성을 지닌 모호한 관계성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었고 또 영화를 보고 있기에 영화는 우리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반대로 우리가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독립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말해왔던 본상과 거울상, 인형과 인형사라는 관계를 되풀이한 것이다.


심리스릴러라는 장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영화 외부로까지 시선을 넓히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비약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발언의 근거를 개인으로만 국한해본다면, 영화와 우리의 관계는 곧 가족이거나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첫 번째로 영화 속 세계가 우리와 닮아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와 유전적으로 동등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속 세계가 우리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지는 못한다. 설사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사회적인 이동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우리의 거울상,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선 실재계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성립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두 번째,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그 또한 우리를 바라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착각이다. 하지만 이 착각 속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런 착각이 곧 나르시시즘이라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려는 자기애적 움직임은 엔트로피의 증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라깡이 모호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냥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욕망 개념을 엔트로피에 빗댈 수 있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곧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보며 무언가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건 영화가 우리를 가르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자신이 늘어놓은 지점들을 찾아내 보라는 이미지와 추상의 게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곳에서 자신의 거울상을 발견할 수 있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볼 때 그만한 주체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를 어떻게 보든, 어떤 방향의 해석을 도출해내든 간에 중요한 점은 자신이 그것을 보았다는 인식에 있다. 자신이 본 것이 남들과 같거나 다르다고 해서 대립할 필요는 분명 없다. 누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 라깡에 따르면 인간은 달라 보여도 모두 비슷한 존재이다. 단지 그 속에서는 카메라의 촬영방식처럼 어느 부위를 어떤 깊이로 어느 지속시간 동안 들여다보는가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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