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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9. 2019

산 자의 기록 ​

<아사코>(2019)


영화 <아사코>의 작품 포스터 © 올댓시네마 플러스




삶과 죽음의 경계, 죽음의 육체와 영혼


재난이 닥쳐 사람이 죽고 나면 생존한 이들은 슬픔에 젖게 된다. 왜 하필이면 내가 살았느냐고 묻기도 하고, 내가 그를 대신해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이 감정은 망자가 속해있던 공간에 근접해 있을수록 더욱 커지게 된다. 망자의 지인으로부터 시작해, 종국에는 유년기를 함께했던 그러나 지금은 연락이 끊긴 이들에게까지 도달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감정은 특정한 진앙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지진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때 진도에 따라 파동이 커지게 된다면, 그 물결이 망자가 속한 가장 거시적인 집단으로까지 퍼지게 될 테다. 누군가의 죽음이 일으킨 파장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그런 방식을 경유한다.


죽음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요소가 침투할 구석이 없다. 다만 죽음이 시행되는 환경과 그를 둘러싼 상황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상이 슬퍼하는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티브이 뉴스에 나오는 어느 죽음이 만들어 내는 건 거센 파도에 뒤집히는 나룻배의 모습, 즉 뒤집기다. 이때 뒤집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풍랑 속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자리가 뒤바뀌기 때문이다. 중요 인물이 서거하면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문제는 그것이 다다미처럼 앞뒤 구분이 따로 없어 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가 모호해진다는 점에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 투하 지점 상공에서 터진 그것은 진앙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진앙을 중심으로 물결처럼 퍼져나가기에 그렇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고 나면 히로시마 전체가 지옥으로 변해 버린다. 죽어버린 이도 있고, 인프라가 망가져 식량과 구호품에 허덕이는 이들도 있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든 파장이 그들에게로 도달하기에 망자는 지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기록하는 죽은 이의 모습은 단지 시각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정말로 죽어버린 것들은 우리 사회와 제도와 같은 체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탄이 전파한 충격은 무엇인가. 반대로 물으면 그 죽음이 과연 폭탄에 의한 것이었는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폭탄이 아니라 그것이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사건이 관측되는 순간에는 이미 현상이 진행 중이기에 어디까지나 파장만을 보게 될 뿐이다. 요컨대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리게임에는 마땅한 해답 없이 추론만이 존재한다. 지구에서 발신되어 우주로 퍼져나가는 전파를 수신하는 순간에는 늘 근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듯이, 그러한 역탐지가 사건을 거슬러 오를수록 시간은 현재와 자리를 바꾸게 된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혼합되는 게 죽음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죽음이 정말로 육신을 지닌 채로 떠나간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그 죽음이 처음부터 영혼의 살해현장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육체의 죽음은 목격되어도 영혼의 죽음을 눈으로 보지는 못한다는 점이 그런 생각을 소홀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진원지에서 발산하는 파동이 나누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니라, 죽음의 육체와 영혼이다. 따라서 육체를 목격한 이들에게 영혼의 구조작업이 요청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육체만을 보존한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에우리디케의 최후를 다시금 목격하게 될 테니 말이다.


삶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미래로 나아갈 행진곡


이러한 발언의 영화적 변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는 몇몇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들이 하려는 작업은 전장의 상처를 치료한 것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을 고쳐놓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최초의 충격이 다다른 이후로 분리된 죽음의 두 가지 갈래 중에 아직 영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그러니 아마도 이들이 행하려는 작업은. 영혼을 가둘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의 힘을 빌리려는 것일 테다. 즉 그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드러내면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작별인사를 보내려고 한다.


여기서 그 영혼에 대해 가치판단을 섞고 싶지는 않다. 영혼을 두고 망령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건 좋지 못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목격한 죽음의 몇 가지 은유를 내비치는 영화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다. 아직 못다 이룬 소원을 품은 채로 스크린에 나타날 정도로 원망이 깊다는 듯 보여서다. 이때 그런 물결이 나무의 나이테와 유사한 모양새라는 점에서 기록된다고 볼 수 있다면, 영화를 찍는 행위는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들고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 위해 연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원망에 책임을 통감하는 이유는 그가 남긴 파장을 몸으로 겪은 바가 있는 탓이다.


레코드판의 미세한 흠을 긁어 소리를 내는 게 축음기이듯, 소음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 그것은 뇌 사이의 미세한 주름을 긁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무의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영화에는. 영화관 안의 관객이라는,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잠긴 집단 무의식을 호명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진앙에서 시작된 죽음이 남긴 영혼의 파편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닌 모두가 떠올려야만 비로소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세계를 담는다고 알려진 매체가 오히려 더 큰 세계에 손을 내미는 구명활동이다. 그가 선두에 서기에 우리는 그 뒤에서 개인의 손 하나를 보탤 수 있다.


이것은 일전에 경험해본 적이 있는 소음이다.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소음에 반신반의할 때가 있지만, 그런 의문이 감독의 말로서 공언될 때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내가 들은 소리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스크린에 닿으면, 이제야 비로소 자유롭게 귀를 열어 소리를 듣게 된다. 반대로 생각해볼 지점도 있다. 무의식에 들려온 소음을 일상적으로 듣는 게 환청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볼 때 환청의 내용이 아닌 환청 자체에 싫증을 느낀다는 점이 더 슬픈 일이다. 태초의 전파가 진앙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그러나 그것이 점점 시간을 타고 멀어져만 갈 때 내용은 희미해지고 수신기는 해체되어 단지 소음에만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화를 보는 눈이 있다. 영화가 죽음으로 여겨질 때 육신이 사진의 역할에 대응한다면, 남겨진 영혼은 오직 우리만이 볼 수 있는 상태로 남겨진다. 세계의 진실을 목격하는 게 영화의 원칙으로 세워진 가운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배면에 놓인 저승 세계를 탐방하는 것이다. 이른바 담론이라고 부르는 소음을 기록하는 행위가 세상을 뒤집어 놓을 환청이 아니라, 삶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미래로 나아갈 행진곡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나의 육체와 두 개의 영혼


<아사코>의 원제가 I & II라는 수식어를 지녔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면 이 작품은 자기복제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작품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아사코(카라타 에리카)의 선택이 만들어낸 두 가지 세계의 이질동상에 주목하게 된다는 뜻이다. 서사로만 보면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둘 중 어느 선택을 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 그런 기묘함에 빠져들게 한다. 이른바 퍼스트런과 세컨드런, 주어진 두 개의 동일한 시공간에서 다르게 질주하는 한 명의 여성이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아사코의 공간들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성질을 지닌, 그러나 육안이 아닌 맥락으로 관측되는 치밀함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료헤이와 바쿠(모두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연기했다)의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을 평행세계라고 지칭한다면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몹시 슬퍼할 것이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세계라는 것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른 구역을 점유한다는 표현은 명백하게 다르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십 년을 표현하는 것과 재일조선인과 재한중국인을 지칭하는 것만큼이나 다르게 쓰인다. 말하자면 우리가 료헤이와 바쿠를 보면서 그들을 같은 타임라인에 둘 때, 이 영화는 너무나도 정직한 것이 되어 버린다.


정직한 해석에 따르면 료헤이와 바쿠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소유한 변하는 여인의 속마음을 대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가 (보았다 하더라도 애써 무시하면서) 지나치게 되는 건 영화 중간에 짤막하게 지나가는 2011년 3월을 지시하는 포스터이다. 영화에서 료헤이가 겪는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가 해당 상황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사코와 료헤이가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서 기폭제로 보이게 되는 면이 있다. 말하자면 갑작스레 일어난 것들의 공명이 바로 이곳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관객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해당 포스터이다.


이걸 두고 ‘사랑은 곧 사건, 혹은 재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 아사코의 I & II 시기를 동일 선상에 놓을 때의 장점이다. 그러나 표면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만이 진실이라 믿게끔 현혹하는 것이 소음의 역할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시끌벅적함을 느끼는 와중에 포스터에 제시된 11.3이라는 숫자를 읽어내는 순간, 시간은 정지하고 소음이 없는 배면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 모습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하마구치가 영화를 육체로 지정해두고, 반대편의 관객에게는 영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도 있다. 하마구치가 보여주는 건 료헤이와 바쿠라는, 하나의 육체에 담긴 두 개의 영혼이라고 말이다.


아사코는 하나의 육체에 반한 걸까 아니면 두 개의 영혼에 각각 반한 걸까. 이 고민이 아사코에게 던져지는 순간 그녀는 안정된 서사에서 이탈해 료헤이를 버리고 바쿠에게로 간다. 이때 이 모습이 한 개의 육체를 두고 다투는 영혼의 세력전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바쿠가 사라지자 료헤이가 등장하고, 다시금 바쿠가 찾아오자 아사코는 료헤이를 버리고 떠난다. 중요한 건 아사코가 료헤이를 버린 게 아니라, 바쿠를 선택했기에 료헤이가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정석에 가까운 해답이다. 하지만 우리는 료헤이와 바쿠라는 이질동상 말고도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라는 두 가지 ‘이질동상’을 알고 있다.


영화에는 사랑을 현실에는 재앙을


재앙과 사랑을 분리해 영화에는 사랑을 현실에는 재앙을 배치하는 꼼수가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걸 알게 모르게 눈치챈다는 점에서 우리의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다른 표현은 다음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한 경계를 두고 배면에 자리한 두 가지가 서로를 침투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테다. 삶과 죽음은 딱 잘라 구분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익숙한 기존의 것들,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에 끌려가게 된다고 말하는 내세적 세계관에 배척되는 것이다. 분리된 세상에서는 한 장소에 하나의 개인만이 존재할 수 있기에 말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은, 한 가지 선택만을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아사코의 갈등은 그런 점에서 연유한다. 그것을 하나의 얼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두 개의 영혼으로 보아야 할지, 여기서 전자는 선택의 길이고 후자는 침투의 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걸 두고서 영화의 가장 고전적인 물음으로 다시금 돌아가 볼 수도 있다. 아사코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느 기점에서 리얼리즘으로 진입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망설임 없이 동일본대지진을 현실과의 공명 지점으로 지정해둔다면, 이 영화는 죽은 이들을 되살려올 수가 없다. 요컨대 우리는 그걸 두고 단지 기억 속의 무언가로만 치부하게 된다.


하마구치가 요구하는 건 동일본 대지진 후에 남겨진 이들을 알아봐 달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설정놀음으로만 여긴 채 넘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옆에 있던 바쿠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어느 날 갑자기 티브이에 등장했다는 대목을 보면, 바쿠는 아사코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주 정확하게, 하마구치는 영화를 통해 동시대가 무엇인지를 강조하려고 한다. 바쿠가 사라진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료헤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티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티브이 혹은 그 뒤에 따라붙은 전파를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순간이 모델이 된 바쿠가 찾아오는 때라고 가정하면, 1부와 2부는 연극의 장막이 아니라 두 갈래가 동시에 진행되는 선택의 순간을 겹쳐 보이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정말로 영화이다. 2D라는 평면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영화가, 수평이나 수직만으로 세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1부와 2부라는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허나 그것을 두 갈래로 나누어 볼 때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세상이 된다. 이것을 다음처럼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사코의 사랑은 료헤이와 바쿠가 아니라 그저 아사코일 뿐이라고 말이다.


파란을 겪은 이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명확하게 단절하려는 시도는 고통을 경감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이른바 모듈화를 통해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간다, 올라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일상이기에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뿐, 영화의 언어로 풀이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주어에 맞게 풀이해보면 우리는 아사코가 겪는 사랑에 어떤 이유도 덧붙일 수가 없고, 단지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영화에 침투하기를 거부한다면 허공을 떠도는 소음은 결코 우리의 귓전에 들어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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