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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1. 2019

21세기에 린치를 가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이 터널, 이터널(Eternal)


데이비드 린치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비슷한 말을 하게 된다. 꿈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꺼낸 다음, 그것을 주축으로 영화의 서사를 풀이해가는 퍼즐게임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다. 린치의 영화가 영화의 틀을 빌려 초현실주의 회화를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는 꿈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린치의 영화에는 서사가 그런 회화를 보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의 종말에 다가설수록 지지대가 붕괴하면서 이미지만이 붕 뜨게 되는 느낌이 있다. 말하자면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스크린 너머에서 이쪽에 얼굴을 처박고 우리를 잡아먹으려 드는 꿈의 괴물처럼 보인다.


따라서 린치의 초기작 <엘리펀트 맨>을 두고 린치의 이례적인 영화라고 칭하는 건, 주인공 사내의 기괴한 얼굴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떠돌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나 다름없다. 허나, 갑작스레 <엘리펀트 맨>을 호출한 것은 그 이례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 이미지라는 것은 일정한 흐름을 기반으로 성장한, 떠나온, 그런 식으로 근본을 지닌 생명체가 아니다. 기묘하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던 때에 갑작스레 치워진 사다리는 그 이미지에게서 신체를 강탈하고는 얼굴만을 남긴다. <엘리펀트 맨>에서 사내에게 커다랗고 동그란 얼굴이 주어졌을 때, 그의 주변 인물이 그를 이용하는 방식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오로지 얼굴만을 위해 전시된 생명체, 하지만 말은 하지 못하고 어디로부턴가 와서 어디론가 다시금 떠나가는 삶의 비개연성, 여기서 그가 속한 사회에 영화라는 매체를 대입하면 이 이야기는 린치가 말하는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속에 굴러 들어온, 여태까지 보지 못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 없는 이미지의 등장이 사회를 헤집어 놓는 일련의 서사에는 인간 동물원이 아니라 이미지의 동물원이라는 비판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동물원이라는 근거를 달고 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선샛대로에서 빌리 와일더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의 초창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어느 여배우의 미치광이 저택이 자리한 선샛대로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입구, ‘선샛대로’라는 명패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입부에 제시될 때 우리는 할리우드가 말하는 꿈의 공장, 뤼미에르가 촬영했던 공장의 입구에 역으로 침투하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입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두컴컴한 고속도로가 아니라 그 끝에 놓여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터널이다. 이 터널, 혹은 ‘이터널(Eternal)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는 이질적인 공간이 구멍 너머의 대로, 할리우드라는 이름의 꿈이다. 또한 그 꿈속을 거니는 이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신체를 버리고 먹기 좋은 형태의 이미지로 가공될 준비를 마친 상태, 말 그대로 꿈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꿈이 되어버린 할리우드 동산의 공산품을 위한 재료로서 대로 어딘가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이미지의 동물원에서 칼 융이 만들어준 가면을 쓰고 융합된 정체성으로 자신을 타자화하는 게 바로 그들이다.


그러니 기묘하다면 기묘하다고 할 수 밖에. 21세기의 도입부에 등장한 린치의 이 필름이 스필버그의 <죠스>와 같은 20세기, 이미지의 동물원이 허공을 떠돌던 시대의 심장에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점은 몹시나 두려운 일이었다. 할리우드가 그를 태어나게 했지만 그게 곧 할리우드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옛 그리스 신화처럼 린치는 크로노스가 되어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야 만다. 여기서 크로노스가 시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에 대한 기묘한 우연을 전제로 하면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이미지로 시작해 이미지에 이야기를 스며들게 한, 하지만 어느샌가 이야기를 이미지라는 얼굴에 붙은 신체쯤으로 여기게 된 할리우드의 노예근성을 비판하면서 그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반역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반역은 성공적으로 할리우드를 진압했다고 볼 수 있으니 혁명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릴 테다. 린치는 디지털화에 맞물린 이미지의 조롱적이고 유희적인 전시, 그 동물원화를 비판하면서 아날로그 같은 질감의 ‘조롱당하고 유희되는’ 필름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 대목에 린치의 시간이 작용하게 된다.


춤추는 이미지


춤추는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린치식의 오프닝 크레딧을 지나고 나면 영화의 도입부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명패가 제시된다. 영화의 제목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이므로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이 사건의 중심지라고 짐작하게 된다. 이어서 대로변을 달리는 낯선 자동차 안에 있는 여배우 리타(로라 해링)를 통해 린치는 우리가 영화에 이입할 장소를 만들어준다. 이때 리타는 자동차 안의 운전기사들이 자신을 낯선 곳으로 데려왔다는 점을 깨닫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운전기사는 다짜고짜 내리라면서 총구를 들이댄다.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린치의 초대를 받은 우리가 할리우드라는 꿈동산에 있던 유명한 여배우 리타였으며, 그런데 이 초대는 잘못되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이어지는 선샛대로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의문을 제기해야 할 곳은 위기의 순간에 리타에게 다가온 금쪽같은 폭주족들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리타가 동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할리우드의 야경이다.


할리우드의 야경을 버즈아이 숏으로 바라보는 카메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두 가지 의문. 왜 리타는 이미지의 통로를 지나던 중에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왜 하필이면 할리우드의 꿈동산으로 집결하게 된 것인가. 이때 이미지가 꿈이고 이미지의 통로가 꿈으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면, 현실적인 의미에서든 몽상적인 의미에서든 꿈으로 향하던 중에 전복된 자동차가 시사하는 바는 곧, 선샛대로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게 린치의 의도라는 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결코 영화로 읽혀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린치는 20세기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초대장이 아니라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안정적으로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스타와 같은 호사를 누리던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불만에 대한 린치식의 호출은 ‘내려라(Get out)’이다. 총을 발사한다는 게 곧 ‘쏜다(Shoot)’라고 칭해진다는 점에서 남성의 협박은 지금부터 촬영을 시작할 테니 각오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 영화는 린치가 21세기를 협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의 동물원에서 익숙한 호사를 누리던 우리를 이탈시켜 할리우드가 시작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이루어진 꿈들이 언제나 준비된(Stand-by) 선샛대로의 주택가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그다음의 유사한 도입부가 다시금 반복되기까지의 이야기는 간극으로 남아 이 영화에 튀어나오는 이미지의 지지대로 활용된다.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덧붙이도록 하고 지금은 이미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후반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베티(나오미 왓츠)가 파란 상자를 열고 홀연히 사라져버릴 때 영화의 서사는 급격하게 붕괴해버리면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미지가 혼용되어버리는데, 이 모습을 두고 이야기라는 지지대를 잃은 이미지에 얼굴만이 남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도입부의 총격을 이제서야 목격한 것이 된다. 요컨대 파란 상자와 파란 열쇠가 지닌 이례적인 모양새가 기적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것은, 카메라와 물체가 기적적으로 일치하는 순간에 그것들이 기호의 지시대상으로 변형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다소 늦게 도달한 총알이 영화 한복판을 헤집어 놓자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파란 상자를 기점으로 영화를 2부와 1부로 나눌 수 있다면 1부는 20세기에 2부는 21세기에 해당한다. 첫 번째로 20세기. 이미지의 동물원에서 이미지들은 철창 안에 갇힌 채 인간이 투입한 상상력의 산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그 이미지를 일차적으로 목격하고 가로막힌 것에 우리를 투입하는 과정에서 이미지는 표현력을 잃고 대상으로만 기능하게 된다. 말하자면 20세기의 영화는 그런 식의 전시가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이미지의 동물원이었다. 사우론의 눈과 같은 감시를 하는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을 타인의 욕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스타들의 모습은, 그런 이미지가 단지 영화 안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었다. 아주 슬프게도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것들, 스타 시스템이 카메라의 세상을 외부로 확장시켜 이 세계를 팬텀화(Phantom)할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디지털의 침공은, 이 세계 전체를 이미지로 만들려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21세기. 동물원의 열쇠를 향해 쏘아진 총알이 자물쇠를 망가뜨리고 우리에게 진실을 열어 보일 때, 리타와 베티는 카밀라와 다이앤이 되어 자신을 내팽개친 전장으로 다시금 나아간다. 이 대목에서 20세기에 배우로 살아가려던 베티의 모습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는 점이 밝혀진다. 허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20세기에 갑작스럽게 할리우드에 도착한 리타는 이곳이 할리우드라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20세기와 21세기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그곳이 할리우드의 심장부라는 점을 알고 있느냐 없느냐다. 이때 린치는 이것이 도전장인 만큼 아주 친절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할리우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린치에 따르면 20세기의 할리우드는, 꿈에서 추방된 이들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을 두고 꿈으로 여기도록 협박하고 있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이탈지점을 표현한 린치식의 유머이며, 무대 위에 올려진 그들의 모습이 우리를 향한 공격으로 회귀하게 되는 지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실렌시오’가 울려 퍼질 때다.


두 개의 멀홀랜드

두 여인이 게임을 마치고 나란히 잠이 든 새벽 2시, 갑자기 깬 리타는 택시를 잡고서는 베티를 어느 무대로 데려간다. 악사 없는 무대 위에는 경쾌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여기서 린치는 단장의 입을 빌려서 이것이 단지 영화일 뿐이라고, 리타와 베티의 꿈으로 보이는 듯한 이야기가 사실은 영화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리타와 베티가 무대 위에 올라선 가수에 감동받는 모습이 이것을 두고 여전히 영화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대변한다면, 가수가 쓰러져도 여전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것이 영화 안이 아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점을 말해주며, 영화의 환상(꿈의 환영)을 인지하게 된 리타와 베티와는 달리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렵게 쓴 린치의 발언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보세요. 당신보다 그녀들이 먼저 깨어났습니다. 아직도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꿈이기에 욕망으로 꿈틀대고 그래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20세기를 떠나 21세기로 돌아온 현대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다이앤은 20세기의 리타와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운전기사는 총구를 들이대지 않고 깜짝 선물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문을 열고 나오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카밀라가 지름길이 있다며 손을 내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한 두 가지 비슷한 장면 중 어느 것이 선행하는지를 묻기보다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카밀라가 20세기에서 출발해 21세기의 베티에게 손을 내미는 게 아닌지를 묻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크린에 붙잡힌 게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린치가 보낸 전령이 누구인지를 묻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동산 아래를 바라보며 그곳에 투입하는 식으로 오밀조밀하게 뭉쳐진 이미지가 20세기의 시점이라면, 동산 위로 올라가 열린 파티장에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미지는 21세기의 시점일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21세기의 파티장에서 감독 옆에 있던 여인이 20세기 선샛대로의 집주인으로 나온다는 점이나, 다이앤이 카밀라를 암살하라고 지령을 내린 후에 그 카밀라가 리타의 이름으로 선샛대로에 찾아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것을 두고 영화 속 시간, 디제시스(Diegesis)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상으로 나열할 때 우로보로스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에 간섭하는 이미지가 경계를 흐려놓기에 이것은 단지 울타리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이게 함정은 아니다. 오히려 린치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그것을 재료로 삼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21세기가 20세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영리한 린치는 상층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뒷부분에 놓으면서 이 영화를 마치 21세기가 20세기에 보내는 경고처럼 만들어 놓았다. 다른 표현으로는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하강하는 이미지, 영화의 시간으로는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듯 보이게 하면서 이미 몰락한 사람들의 과거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필연으로 눈치채게 될 사실 하나는 영화의 시간이 이미지의 전개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묘함에 따라붙는 수사는 영화의 시간이 우리의 시대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과 다르다고 말하는 고전적인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영화의 시간을 조합해 나간다고 믿는 허례 의식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공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상층부의 스타들이 모이는 저택과 중층부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하층부의 선샛대로가 있는데, 이 배치는 영화가 보여주는 두 가지 세기의 도입부를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갈라지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선택해야만 한다고 암묵적인 강요를 보내고 있다. 우로보로스의 머리를 따를 것인지 꼬리를 따를 것인지의 문제, 그럼에도 우로보로스라는 이름의 갇힌 시간 속에서 이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요컨대 린치를 두고 크로노스(시간)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정신분석학과 같은 허례 의식들의 팔루스(Phallus)를 거세했다는 점에 있다. 영화가 관객 혹은 자체로서 욕망을 품고 달려간다고 믿는 이들의 영화가 20세기, 리타가 몰락한 여배우가 살았던 선샛대로의 어느 저택으로 도달할 때에 자리한다면, 이때의 리타가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시작하고 우리가 따라가던 이미지 아래의 욕망들이 파편화된 이미지를 봉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은, 그런 흐름 자체가 붕괴하면서 표층을 담당한다고 믿었던 이미지의 조합 또한 붕괴하게 된다. 즉 어귀가 맞지 않는 영화를 보면서 디제시스에서 이탈하는 영화를 여전히 영화로 여기게 됨은, 이미지의 허상이 스크린이라는 구천을 여전히 떠도는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는 이 영화를 두고 린치의 도전장이 아니라 린치의 구마의식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동물원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 정말로 그곳에 감금된 게 아니라 일종의 지박령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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