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un 23. 2019

영화는 성장한다. 바라보는 우리의 기쁨.

<엘리펀트>(2004) 

영화 <엘리펀트>의 한 장면 © 파인 라인 피처스



카메라와 젠더, 시선과 정체성


수전 손택이 카메라의 역할을 남근적인 폭력성에 비유하면서 지적한 사항은, 그것이 다름 아닌 ‘쏜다(Shoot)’에 대응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주장에서 카메라를 남근에 비유한 대목은 논란의 여지가 크다. 그녀는 카메라의 촬영 방식을 겨누고, 조준하고, 쏘는 것으로 나누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성을 곧 폭력성에 빗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근이 정신분석학에서의 팔루스를 의미한다고 말해도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여성계에서 지적했던 대목이 바로 그 팔루스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일 수 있다. 카메라의 시선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성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런 주장은 별 의미가 없는 게 된다. 카메라는 생명이 아니어서 성별이 있을 수 없으니까. 말하자면 섹스(Sex) 이전에 젠더(Gender)가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카메라의 성별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분명 카메라에 섹스는 존재하지 않지만 젠더는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카메라의 젠더를 논할 때, 그것이 카메라 자신이 보내는 시선이라는 점은 명확해도, 그 자신이 누구에 의해 통제되는지를 따져 묻는 건 몹시 어렵다. 이른바 카메라의 윤리학에 따르면 카메라를 통제하는 게 감독이지만, 감독의 시선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일 수도 있고 혹은 생동하는 카메라의 주체가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이런 부분이 카메라의 젠더를 탐구해야만 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카메라의 시선이란 곧, 젠더가 말하는 정체성 문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a Camera Gender


영어로 카메라 젠더를 a Camera Gender로 표기할 수 있다면, a를 중간에 놓아 Camera Agender로 만들 수 있다. 이때 이 단어의 발음은 논의안건을 뜻하는 ‘Agenda’와 유사하다. 이게 콩글리쉬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단어가 ‘카메라 성별’이자 ‘카메라 안건’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 번째로 Agenda가 현시점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안건이라는 점에서, 가장 시급하게 보내야 할 시선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그렇다면 Camera Agenda는 카메라가 지금 시선을 보내는 곳, 혹은 그 방법이나 과정을 뜻하는 게 된다.


두 번째로 젠더라는 게 사회적인 성, 정확하게는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해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 두 가지 단어는 유사하다. 즉,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을 탐구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은 ‘카메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의 윤리학 속에 카메라의 젠더학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의 젠더를 규정할 때, 이 카메라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카메라는 생명체가 아닐뿐더러, 그쪽 세계로의 차단막(스크린)에 가로막힌 우리가 그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카메라의 젠더학이라는 것은 시작부터 그런 문제에 직면한다. 카메라에 젠더를 부여하는 순간, 감독의 손을 떠나 피조물이 된 카메라는 자아를 가진 ‘생각하는 기계’가 된다. 어쩌면 ‘신체 없는 기관’이라는 말도 어울린다. 모든 생명은 신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인데, 사고 없이 기관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고를 자아낸다고 보면 그렇다. 말하자면, 우리가 마주한 카메라는 여태까지 드러난 적이 없던 형태의 생명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카메라를 오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메라를 두고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반성한다면, 성별이 아니라 논점을 따져 물어야 한다.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카메라의 윤리학을 운운하며 시선이 카메라를 통해 영화에 이입된다고 말해왔던 건 잘못되었다. 오히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세계가 아닌 영화 속 세계이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카메라가 ‘지금-어디’를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게 바로 카메라의 젠더학이다.


카메라의 젠더학


카메라는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아를 구축한다. 그렇게 생성된 자아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체성을 맞이하는 순간을 잡아내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요컨대 카메라의 젠더라는 것은 성별을 규정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나를 맞이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개념이다. 비유하자면, 젠더학의 해석과정이란 사춘기 시절을 막 거치면서 나에 대해 물으며 철들어가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에 가깝다. 여기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성(性)에 대해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녀의 몸과 그에 파생될 마음을 보듬는 것이다.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영화의 젠더학은 영화를 홀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스크린에 가로막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의 젠더가 감독에게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 필름이라는 물질을 신체에 비유한다면 감독이 곧 부모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낳아준 부모와 기른 부모가 따로 있듯, 감독이 제공한 신체가 스크린에 올려지면 우리는 그걸 보듬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젠더 없는 영화는 죽은 영화나 다름없다.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대부분의 상업영화에 벌어지는 현상인데, 모두가 이입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무대에서 정체성은 정립되지 않는다. 쇼트로부터 기원한 태초의 자아를 갈가리 찢어놓는 시선은 영화를 일종의 ‘조현병’ 상태로 만든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스크린 밖의 타자가 주입하는 환청에 끌려다니는 게 그런 영화이다. (<보이후드>의 공명 지점은 그 대목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양육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의 문제는, 아이를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너무 개입하면 마마보이가 되고, 너무 외면하면 엇나가 버리는 게 자녀이다.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너무 개입하면 자아가 성립하지 못하고 너무 외면하면 이입할 수 없는 자아가 된다. 물론 후자를 반대로 이용해서 영화적인 고독을 즐기는 몇몇 감독이 있기도 하다. 그들은 <위플래쉬>의 대머리 선생처럼 필름을 혹독하게 다그쳐서, 영화 자체를 사유하는 기계로 만든다. (데카르트가 이 말을 듣는다면 정말로 슬퍼할 것이다.)


사유하는 기계의 기계적인 쇼트를 따라 하면, 관객에게 어떤 방향으로 사고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알려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서 잘하게 되었고, 그런 재능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긍정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우리가 영화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은 어디까지나 ‘예상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언제 이렇게 커버렸니.”라고 말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홍상수 영화는 그런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열린 영화, 열린 순간


영화가 진행되며 여러 곳을 보고, 느끼고, 그렇게 겹쳐진 쇼트에서 정체성이 피어나게 된다. 여러 영화를 거치며 앞으로의 전개와 연출을 예상하던 우리에게 찾아오는 기쁨. 만약 영화의 미학이 몸과 마음의 매력을 표현하고 영화의 윤리학이 착한 심성을 예찬하는 것이라면, 영화의 젠더학은 열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따라서 이런 영화는 열린 영화라고 불러야 한다. 결말이 닫혀 있어도 그 세계는 닫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계속해서 보이기에, 그런 삶 속에서 여러 번의 변곡점을 맞이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허나 열린 영화라는 게 열린 형식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열린 형식을 열린 영화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영화가 많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곧 ‘모든 가능성’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흘러가는 지점, 다양한 해석 모두를 홀로 수행해 낼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하지만 그걸 수행하는 게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몫이라고 하여도, 우리가 보지 못한 건 닫혀버린 영화의 성장판이다.


다양한 걸 할 수 있더라도, 거기서 성장이 끝나버린 모습을 보고 달가워할 사람은 없을 테다. 그러나 이것은 삶과는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성으로 신생아의 젠더를 판단하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첫 쇼트만을 보고 영화의 젠더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관찰자 시점에서 영화의 젠더는, 우리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영화는 현실보다 ‘더’ 관찰자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영화가 현실보다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봄에 있어 영화의 평면성은 그것을 일종의 ‘기록’으로 여기게 한다. 입체가 아니라 평면적인 사고를 할 때, 오히려 사고의 가능성이 제약되고 해석의 여지가 증대되는 경험을 우리는 해본 바가 있다. (사진에는 노이즈가 낀다.) 어쩌면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 ‘그만큼’ 망쳐버린다는 점에서, 이미 태어나면서 관찰되는 젠더를 지닌 현실의 삶이 기본적인 보호막은 지니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보호막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리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 개봉해 비교대상이 되었다. 축약해서 말하면 두 영화의 차이점은 시선이다. 구스 반 산트가 현장에 뛰어드는 방식으로 시점을 보여준다면, 마이클 무어는 현장에 뛰어드는 시점을 곧 방식으로 활용한다. 구스 반 산트가 상황을 재현해 그곳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면, 마이클 무어는 우리가 바라보는 이 사건을 모두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쉽게 말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라는 소리다.


그중에서도 <엘리펀트>는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이 영화를 두고 양립하는 두 가지 의견을 정리하면 윤리학과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영화를 윤리학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영화가 이미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진실로 기정사실화 한다고 말하면서, 히틀러와 동성애 그리고 총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 범인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이 지적을 따르면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는 영화 밖의 평면적인 시선으로부터 귀인했고, 이로 인한 해석의 증대가 사람들로 하여금 ‘황금종려상’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윤리학의 시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열린 형식을 취하지만 닫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이것은 닫힌 성장판을 대변하는 영화이다. 16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앞뒤에 (영화 속 소년이 그러하듯) 잠깐의 시간을 편집하여 붙인 이 영화에는 여러 시점이 혼합되고 있다. 이것이 영화 안에서 밖으로 파생되는 수원(水源)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영화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만들어낸 정체성에 불과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 속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실제로도 따돌림을 당해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총기 난사 사건이다. 따돌리는 행위가 총기 난사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젠더의 형성은 곧 영화의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요컨대 윤리적인 시선으로 볼 때는, 영화 밖에서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을 보듬지 못한 과오를 구스 반 산트의 카메라가 되풀이하고 있는 게 되어버린다. 즉 아이가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이 아기의 걸음마 같은 행복을 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의 일탈이 자기도 알 수 없는 시기에 시작되었을 때에는 끝없는 불행을 뜻하게 된다.


영화의 윤리가 매섭게 공격당하는 대목은 그 지점에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점에 있다. 등장인물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 영화에서 끝없는 불행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이 일탈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전조증상을 눈치채지 못했음에 대한 영화적인 간과, 혹은 무지에 대한 비판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일어나버렸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그런 과오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카메라는 보듬어 주지 않는다.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이것은 현실의 젠더가 영화의 젠더에서도 되풀이 될 때 벌어지는 불쾌한 소음, 공명의 지점이다. (이 소음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들려온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구스 반 산트도 그렇다.)


윤리학의 안에 젠더학이 있다


이것이 윤리학 안에 젠더학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영화를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본다면, 영화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카메라가 보내는 시선이 우리의 법도를 따를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미 떠나온 시선을 굴절시킬 수는 없고, 굴절되었다고 착각하는 우리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시선을 반사하는 프리즘이 우리 사회의 어느 지점을 대변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선과 악 이전에 자아가 먼저 성립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방향이 정해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RdPUxI1u1yc




매거진의 이전글 21세기에 린치를 가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