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 <네 멋대로 해라>, <미치광이 삐에로>
1.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가 우리 앞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큰 충격을 주었다. 셀 애니메이션의 한계에 도전하려는 애니메이터가 있었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테츠오가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펑하고 터져버릴 부동산 버블이 바다 너머에 있었고, 성난 민심을 잠재우려는 평화의 고리가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다. 말하자면, 21세기를 견인하게 될 반도체 사업이 이제 막 꿈틀거리던 1988년이라는 연도가 지시하는 것은 빌딩들이 무너져내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키라>의 그 유명한 장면. 테츠오의 기괴한 신체변형이 새파란 폭열음을 동반하는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던 20세기 말의 종말이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보였다. 21세기라는 부푼 꿈이 풍선과도 같았다면, 그것을 목전에 앞둔 1988년에는 세기말로 향하는 이들이 희망을 터트려버리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따라서 이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두 가지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마주할 종말에 올인하거나, 버텨내면 다가올 희망에 배팅하거나.
전후 미 군정 통치 시기에 태어나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디딘 일본의 방황하던 청춘이 ‘태양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전에 등재되었고, 그 후로 10년을 살짝 넘겨서 전 유럽에 68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는 사실은 두 역사를 기묘한 기시감 위로 데려다 놓는다. 한쪽에는 전쟁의 광풍을 몸으로 겪지 않은 청춘이 도로에서 폭주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는 전쟁의 광풍에 반대하는 청춘이 도로를 점거하여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갈림길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라는 각자의 풍경을 만들어내면서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그것이 되었다. <아키라>의 버블이 <에반게리온>이라는 새 시대의 희망을 엿보는 길로 나아간다면, 유럽은 누벨바그의 폭풍이 식어가던 중에 68혁명이라는 암초를 만나 무너지고야 만다. 말하자면 그들은 각자의 희망과 절망, 21세기의 도입부와 20세기의 결말부를 역사의 기묘한 운명을 따라 재현해내고 있는 셈이었다.
여기서 질문. 역사의 기묘한 기시감을 제하고 나서 일본과 유럽이라는 역사의 무대를 어떤 식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인가. 유럽이 메이지 유신의 모델로 삼아졌다는 점이 기시감의 매개로 사용될 수는 있겠으나,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부분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문화의 산물을 직접적으로 비교해볼 것을 선언한다. 이를테면 장 뤽 고다르의 1959년작 <네 멋대로 해라>가 자기 시대의 10년 후를 예지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도,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1988년작 <아키라>와 이상하리만큼 유사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전후 태양족의 출현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예고하는 <아키라>의 오프닝 장면은 마치, 1988년도에 떠올리는 1950년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벨 에포크 이후 반세기가 흐른 시점에서, 그것과 정반대인 1968년 파리의 풍경을 예고하는 <네 멋대로 해라>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이들은 각각 미래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의 절망과 미래의 희망을 염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2.
그중에 먼저 고다르를 살펴보자.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인 이 영화가 십 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변해버린 그의 성격을 온전히 예지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제목만큼은 68년도의 분위기가 어떨 것이라는 점을 성공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좀도둑 미셸 푸가드(장 폴 벨몽도)가 파트리샤 프랑쉬니(진 세버그)를 우연하게 만나 사랑에 빠지고, 끝내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에 다다르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 미셸과 파트리샤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하게 쏘다니는데, 그런데 그 사랑만큼이나 널뛰기를 하는 게 이 영화의 쇼트 구성이다. 미친 듯한 점프 컷의 사용, 여기에 요동치는 감정과 근본 없는 행동은 이 영화의 내적인 구도가 외부로부터 흘러온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고다르는 이 영화를 어떠한 재료로서 만들지 않았고, 단지 그릇만을 시대 한복판에 놓았을 뿐이다. 그 그릇 안에 자연스레 흘러들어온 결과물이 <네 멋대로 해라>라는 필름이며, 그러므로 이 영화의 예지 능력은 예술보다 근원적인 자연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고다르는 후속작에 해당하는 <미치광이 삐에로>를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영화의 점프컷은 전작 <네 멋대로 해라>보다 훨씬 극적이며, 내러티브 또한 훨씬 심플하다. 이 영화에서도 그들은 사사로운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자동차를 타고 끊임없이 질주한다. 이때 그(들)의 발길이 다다르는 곳은 다름 아닌 절벽이다. 이 절벽에서 장 폴 벨몽도는 페르디낭으로 이름만을 바꾼 채 전작에서의 부인을 갈아치우고, 자신의 출신지인 누벨바그 딱지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고다르는 앞으로 다가올 혁명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 보이는데, 그가 데뷔작에서 했던 것이 영화라는 집에 얽힌 사연을 틈새의 형태로 풀어놓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말 그대로 집을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다르는, 자신의 첫 영화에서 얻은 자신감을 연료 삼아 확신을 만들어내고 그 확신을 화약 삼아 이론상의 추진체를 현실화하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다음에, 자신의 화학식을 따라 섞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극적인 폭발 장면을 구시대의 종말과 신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으로 생각해볼 때, 이것을 두고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68혁명의 모토가 그러했고 고다르가 오인했던 문화대혁명의 표면 또한 그러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이 자행되던 배경을 모른 채로 모토만을 본다면 고다르가 왜 그곳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고다르가 우리에게 보여준 작은 폭발은, 그가 몸담은 파리의 과거 즉 프랑스 혁명의 오마주와도 같았다. 말하자면 <미치광이 삐에로>는 고다르가 영화에 보내는 자기만의 역사이자 헌사이다. 그리고 오오토모 가츠히로, <아키라>의 도입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대폭발 장면이 영화 밖으로 넘겨져 있을 때, 어쩌면 이것이 고다르가 만들어낸 <미치광이 삐에로>의 결말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다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영화를 통한 문화의 전복, 문화의 힘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변화였었다. 물론 <아키라>는 고다르와는 백억 광년 정도 떨어진 작품이고 만화 원작, 그것도 온전치 못한 각색이라는 점에서도 완벽하게 다르다. 허나 우리는 앞서 말한 기시감을 이곳에 겹쳐 볼 수 있다.
3.
만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가 거대한 버섯구름과 함께 일개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그 필름의 중요성은 한낱 필모그래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고다르의 폭탄이 고다르가 만들어낸 그릇 속에서 터졌다는 점을 두고서, 그것을 시대의 전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스크린이라는 틀을 하나의 그릇으로 여기며 세계의 한복판에 올려놓으면, 물 위에 떠다니던 바가지가 가라앉을 때 밀려오는 것들처럼 세계의 무언가가 그곳으로 밀려온다. 그러니까 이러한 방식은 <아키라>가 묘사하는 전후 일본의 공간들, 폭탄이 터지고 남은 곳에 생겨난 거대한 공동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아키라>의 도입부에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가 보여지는데, 그 위를 달리는 건 거대한 머스탱에 조명을 달아 꼬리를 날리는 태양족이다. 이때 <아키라>의 카메라 구도는 바이크보다 아래에 자리하면서 바이크가 마치 언덕 위를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요컨대 이 구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거침없는 질주가 거대한 구덩이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위로 향하든 아래로 향하든 간에 어찌 되었든 그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폭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원래 이 작품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도시에서 시작해 거대한 폭발을 맞이하는 도시의 모습으로 끝나니, 원폭을 두고 벌어지는 선형적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에 따르면 아마도 이들은 폭발과 폭발이 갖는 찰나의 순간, 반복되는 시간 안의 영원성을 취득하려 할 테고 그것이 바로 필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걸 보며 우리는 일련의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수명이 100년 남짓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 모든 역사를 관측할 수는 없다. 결국 기록된 문헌을 두고서 역사의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세월의 풍화를 겪게 되리라는 점을 예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눈앞의 풍경을 이곳에 불러올 수 있는 게 필름의 본질이고, <아키라>는 그런 맥락에서 블랙박스와도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그런 해석에 따르면 <아키라>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는 사건을 앞두고 끊겨버린 기록 카메라가 되어 버린다. 카메라 필름에 강한 빛을 노출시키면 내용물이 모두 지워져 버리듯이, 그 폭발 이후로 고다르의 필름 속에 무언가가 남아있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아키라>가 보여주는 게 일본의 원폭 이후의 삶이라면, <미치광이 삐에로>가 보여주는 게 68혁명 이전의 삶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자신을 기록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필름이 원하는 건 세계 한복판에 놓인 그릇으로서 흘러들어오는 외부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인위적인 실험을 통해 분자적 결합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목격하는 두 영화의 기시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겹쳐 떠오르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진정성이라고나 할까. 아니 이런 표현은 옳지 못하다. 본다는 것에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대입될 만한 구석이 없으니 말이다. 본다는 것은 세계가 안구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 진정성은 우리가 목도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으로 보아야 할 테다.
4.
<미치광이 삐에로>는 남자의 폭발로 끝난다. 이게 그로부터 3년 뒤에 있을 68혁명의 전조처럼 보이는 면이 있고, 고다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선구안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흥미롭게 여길 부분은 따로 있다. 이 영화에서 폭발은 거대한 스크린에 담긴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고다르는 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줌 아웃 하면서 남자를 점점 더 쪼그라들게 한다. 이 모습이 연출적으로 이상하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만약 이게 이상하게 보인다면, 폭발하는 장면은 필히 거대한 무언가로 비추어져야 할 텐데 정작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폭발의 위용을 보여주려면 아무래도 화면을 꽉 채우는 풀 쇼트가 유용하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폭발이 무서워서 뒤로 물러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폭발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역사를 은유하는 게 된다.
또는 본디 폭발이라는 것은 우주의 탄생처럼 천천히 쪼그라들었다가 급격하게 팽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모습은 스탠리 큐브릭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용한 바가 있다. 큐브릭은 비행기 아래로 투하되는 폭탄을 카메라로 포착하는데, 이때 폭탄과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초점은 정중앙에 점 형태로 줄곧 작아지게 된다. 그것이 바닥에 닿는 모습은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대체되고 화면 위에는 END 표시가 떠오른다. 요컨대 우리는 이 장면을 포함해 그러한 세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아키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아키라>의 폭발은 쪼그라드는 형태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아키라>의 폭발은 관찰자를 뒤로 물러서게 한다. 세 번째, <아키라>의 폭발은 거대한 폭발을 위한 전주곡이다. 그러니까 사실 <아키라>의 도입부는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가 전한 것은 그런 추측이다.
이 영화에서 네오도쿄라는 역사는 공간의 힘을 빌려서 한 차례 지나간 폭풍으로 구현되어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 아이들은 눈 앞의 역사를 보면서도 그것이 어떤 역사인지를 알지 못한다. 철저히 통제되어 있기에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또한 그것이 어떤 역사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태도는 다음과 같다. 도입부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원폭을 태양족의 이미지를 빌려 구현한 다음, 오르막길을 달리는 듯한 바이크의 풍광을 덧씌우면서 서사 상으로 뒤로 물러서 있는 관객을 앞으로 보낸다. 이 이미지의 구현을 통해 관객은 영화 밖에서 안으로, 원폭이 남긴 거대한 그릇 안으로 흘러들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이미 영화 밖에 구현된 현실 역사의 전개과정이다. 도입부의 태양족이 전후를 상징하지만 영화 밖의 시간은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직후다. 따라서 영화 안에서 다시금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현실은 다름아닌 영화관 밖을 나서는 그 순간일 테다. 그것은 바로 부동산 버블, 고다르에게는 누벨바그였고 큐브릭에게는 메카시즘이었던 그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