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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01. 2019

삶의 주변부를 채우는 찌꺼기​

<누구나 아는 비밀>(2019)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의 작품 포스터 ⓒ 오드









1.




아쉬가르 파라디는 좋은 이야기꾼이지만 친절한 목동은 아니다. 그는 이야기를 잘 성립시키지만 그에 대한 인과를 해설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고, 관객은 그것을 목격하여 스스로 맞추어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독립된 참여자로서,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 떠들어 대는 명절날 가족의 모습을 재현하게 된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될 거야. 어때 내 말이 맞지. 이런 식의 훈계가 보여주는 것은,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외부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영화는 보통의 영화가 관객을 스크린을 통해 분리하면서 관찰자적인 시선을 견지시키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서사를 통해 내부 서사를 분석하게 하는 담론분화적인 시선을 견지시킨다. 요컨대 이것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관찰이 아니라, 사건의 중심에 얽히고 싶지 않은 이들의 관찰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옆집 아들이 어느 대학을 갔다더라. 엄마, 그래서 그 아들은 지금 뭐 하고 다니는데. 이렇게 물어오면 대부분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명확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옆집 아들은 말 그대로 옆집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러니 이것은 이상한 관계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와 맺어져 있지만, 맺어지면 끊기는 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에 다르게 접근하면 더 이상해진다. 옆집 아들에 대해 우리가 추궁할 때, 어머니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직접적인 대입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그럼에도 기의의 전달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기표를 연쇄하는 게 이 이상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표의 연쇄는 오로지 기의의 전달을 위해 사용된다. 다르게 말하면 기의는 기표를 통해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이처럼 고정되지 않는 기의를 보면서 우리는 추리 게임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것처럼 미끌미끌하게 재미있는 게임이다. 여기서 물고기를 정말로 잡는 게 게임의 목표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 게임의 진짜 목표는 그것을 타인과 함께함에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혼자서는 재미없지만 여럿이서 해야 재미있는 것들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를테면 술 게임은 술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어울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들은, 대체로 기표 아래로 미끄러지는 서사 구성을 취한다. 여기서 기표는 영화이고 기의는 관객의 삶이다. 관객들은 영화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자신의 여러 삶을 대입해보게 된다. 요컨대, 영화가 어떻게 굴러가든 간에 관객은 그들의 삶에 진정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소재일 뿐이고, 그 소재에서 피어나는 관객의 이야기야말로 영화가 열매를 맺는 장소이다. 이를 포도 덩굴에 빗댈 수도 있을 듯하다. <누구나 아는 비밀>의 도입부는 포도를 따는 농장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하비에르 바르뎀의 말처럼, 이곳의 진가는 포도가 아닌 와인이다. 즉 그의 이야기는 영화 안에서 수확되는 게 아니다. 추출된 후에 인생이라는 창고 안에서 숙성된다.




2.




이는 삶에서 영화의 의의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그의 영화가 묘사하고자 하는 관계는, 영화 밖에서 여러 형태로 재현되고 그래서 줄곧 미끄러지게 된다. 일정한 형태에 귀속될 수가 없으니, 닻을 잃은 배처럼 정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영화가 취하기에 좋은 태도는 아니다. 소수의 영화광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확실한 무언가를 자신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화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아직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고 그들은 생각한다.




여기서 알지 못했던 사실이란 게 꼭, 의미가 있는 무언가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판타지, 신기루의 마법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광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소리다. 아마도 이 부분이 아쉬가르 파라디 영화의 이상함이 아닐까 한다.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에서, 서사만을 떼어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여기에는 편집의 능숙함과 같은 영화 장인의 면모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는 무엇이 장점일까. 또는 우리가 왜 그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여기서 내가 오판했을 가능성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어느 관객에게는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가 열광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다음 문장을 보고 나면 당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영화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그건 우리가 열광할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독일전에서의 승리처럼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기를 고대한다. 말하자면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하면서, 그에 끌려다니게 하는 게 영화의 장력이다. 마치 데이비드 핀처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의 영화는 텐션이 없다. 영화 내적으로는 말이다. 아무리 예측 가능한 이야기더라도 그 텐션을 적당히 조절하면, 밀당하는 연인관계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법인데. 그걸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가 밀당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파라디에게 서사는 영화를 이루는 요소가 아니다.




그는 밀당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만약 밀당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카메라에 조금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지시기호처럼 사용해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관계와 맥락을 명징하게 잇는다. 이는 단순히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덩굴처럼 각자의 가지가 선으로 꼬이는 게 아니라 그물처럼 엮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 그물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그물은 전체로 볼 때 하나의 연쇄지만, 어느 부분에 불을 붙여도 곧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의 카메라도 가족 전체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어디를 찍어도 같은 결과로 귀결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결과론이다.




여기서 그의 영화를 두고 결과론이라고 말하는 대목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는 늘 열린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나 또한 동의하는 바이지만, 적어도 앞서 말한 그물이라는 구조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쉽게 해결될 문제이다. 그물형 구조는 그물끼리 엮이는 매듭이 같고, 따라서 그 원리를 이해한다면 나머지 부분도 그렇게 직조되어 있으리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들판의 어느 곳에 불을 붙여도, 들판은 모두 타게 될 것이다. 같은 원리로 그의 가족이 파멸에 다다르는 과정은, 어디에서 불씨가 붙었든 간에 종국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시간문제일까? 같은 원리로 직조되는 매듭을 두고 미래의 이야기를 가정하기란 몹시도 쉬운 일이다. 한마디로 뻔하다는 소리다. 허나 그럼에도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는 뻔한 이야기임에도 그리 뻔하게 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아쉬가르 파라디를 보고 이야기꾼이지만 목동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요컨대 그는 양을 몰기보다는, 양으로 사람을 꾀어 담소를 나누는 바드(방랑시인)에 가깝다. 즉 그의 영화에서 서사는 미끼상품이다. 이 미끼를 문 당신은 거미줄 전체에 자기 삶의 울림을 더하게 될 것이며, 그 울림을 듣고 아쉬가르 파라디라는 거미는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파라디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3.




이제 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아쉬가르 파라디의 최신작이다. 이 영화를 가족과 함께 관람하면서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평소에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그들의 관계를 후반에 가서야 깨달았는데, 반대로 영화에 관심이 없는 부모님은 처음부터 그걸 다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내가 영화를 보는 눈이 부족한 게 더 큰 이유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영화를 잘 모르는 부모님이 영화를 꿰뚫어본 것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부모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단지, 평소에 한국 코미디 영화와 액션 영화를 즐겨보시던 부모님이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용은 다 파악한 게 이상했을 뿐이다.




코미디와 액션이라는 장르는 흐름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흐름이다. 개연성이야 어떻든 간에, 신체-언어의 리듬이 맥락이 되기만 한다면 관객은 그것을 즐긴다. 채플린 시대로 간다면 그 코미디는 유연하게 이어지는 운동 이미지일 테고,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완벽한 타인>을 예시로 든다면 그것은 언어 이미지일 테다. <타짜> 같은 영화를 예로 들면 이렇다. 화투패의 내려치는 이미지가 언어의 유희성을 담지하고서, 손모가지를 날리는 망치로 표현된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여기서 신체는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시금 신체가 된다. 그 와중에 카메라는 자연스레 인물의 얼굴과 손을 오가며 그 둘을 접합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기표는 그런 시선의 움직임, 기의의 응시를 미끄러지게 하도록 사용될 뿐이다.




채플린의 손짓과 발짓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 이미지가 되어, 가리키고자 하는 대상을 향해 기표를 쏜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는 채플린이라는 기의가 있다. 물론 가만히만 있을 채플린이 아니다. 채플린이라는 기의가 계속해서 역할을 바꾸는데, 이때 우리는 같은 동작이라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는 채플린의 영화에서 늘 나오는 떠돌이 캐릭터가, 영화마다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채플린이 아니라 채플린의 몸짓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들이다.




이를 두고 어쩌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맥락이 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여기서 다시금 도돌이표를 찍어 위로 돌아가자. 아쉬가르 파라디는 밀당에 관심이 없다. 밀고 당기는 것은 그저 줄다리기일 뿐, 무언가 유의미한 에너지의 총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밀고 당김에서 도출되는 에너지는 핵분열처럼 그저 파괴적이기만 할 뿐인, 그렇게 관객에게 피해를 주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텐션일 뿐이다. 실제로 그런 류의 영화, 를 보고 나면 정말로 피곤해진다. 아마도 <곡성>이나 <나를 찾아줘>를 보고 나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밀당은 분명 서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그 원료로 당신을 소모하고 폐기물은 마음에 잔여로 남는다. 그러므로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에 남은 것은, 영화를 보게 하는 것 말고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때 우리는 그 찌꺼기에 대해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파라디의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 또한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위의 불쾌한 영화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궁금해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포도를 불러내고 싶다.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는 찌꺼기가 된다. 그렇다면 포도는 과연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에 관한 설명은 다음처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포도는 즙을 짜서 곧바로 버린다. 즙을 짜고 나면 더는 필요가 없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포도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포도는 즙을 짜고 나면 텅 빈 게 아니라, 사실은 그 즙이야말로 포도의 본체이다. 다시 말해서 포도는 의미를 자아내는 게 아니라 의미 그 자체이다. 이것이 핵분열적인 서사의 텐션에서 버려지는 찌꺼기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포도는 와인에서 그저 기표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포도는 와인을 만들기 위한 것일 뿐, 포도 아래에는 와인이라는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영화는 이 사실을 관객에게 말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인생의 지혜가 노년으로 갈수록 늘어나는 걸 두고 인간이 성숙해진다, 숙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를 두고 와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와인은 오래될수록 n년산이라는 칭호가 붙는데, 이는 중간에 한 번이라도 개봉하면 사라지게 되는 타이틀이다. 말하자면 인생의 그물이 끊기는 순간에 그 숙성은 거기서 멈춰버린다. 이를 재개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이때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와인을 마시는 것, 인간이라는 기표에게 삶의 기의를 불어넣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기표에 삶의 기의를 불어넣는 작업은, 그만큼 인간이 허울뿐이고 삶의 의미는 부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어디를 가나 볼 법한 풍경이지만, 어디를 가도 볼 수 있기에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존재론의 명제와 반대이다. <너의 이름은>의 그 유명한 대사,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를 찾는다. 또는 찾고 있다. 이 행위에서 추동력은 언어가 아니라 신체, 즉 기의가 아니라 기표에 자리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텅 빈 공동을 바라본다는 것, 하지만 보이지 않기에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 그 안에 도래할 자신의 잔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 찌꺼기는 도출되지 않는다. 즉 그 기다림은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향한 자기 분열적인 손짓이고, 그래서 맥락은 없어진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혜성처럼, 그것은 찌꺼기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아가기에 결국 나아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때 나는 당신이 그 나아감의 연유를 캐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나아가고 있는 건가. 요컨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건 무엇인가. 그 출발지의 마음 가짐과 도착지의 목표물은 무엇인가. 당연하게도 이 물음에 답은 없다. 그게 아쉬가르 파라디가 물음도 답도 하지 않고, 그저 나아감-운동 자체만을 보여주는 이유이다.




나는 자신을 분열시키면서 그것을 추동력으로 사용하는 게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파라디의 영화가 유의미함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라디의 영화는 찌꺼기기를 소모하지 않아서 우리가 그걸 취할 수 있다. 그걸 버리든 말든 별 상관은 없고, 우리가 그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면 찌꺼기는 우리가 좀처럼 마주하기 싫어하는 것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삶의 주변부를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엄마 친구 아들이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런 사람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나아갈 것인지를 염두에 두는 것도 좋다는 뜻이다. 직접적인 힌트는 아니어도, 간접적인 영향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사족을 달고 싶어졌다. 내가 이 글에서 던진 질문은 회수해야 하니까. 결론적으로 파라디의 영화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확고한 이들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다. 여기서 확고함이란, 신념이 아닌 유착이나 정착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삶에 안정이 생기면, 그러니까 루틴이 생기면 우리는 그에 적응해 다른 생각은 해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늘 하던 대로 하고 나면, 원형을 이루는 쳇바퀴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까맣게 잊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도전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게 된다. 쳇바퀴를 앞으로 굴리는, 끝없는 자아분열적인 운동 이미지만이 도출된다. 그렇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속에 남은 족적, 그 찌꺼기 자체이다. 요컨대, 확고한 마음이 낳는 합리적인 찌꺼기는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아마 그래서 파라디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확연한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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