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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3. 2019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발굴해내는 것


영화 <세 가지 시대>의 작품 포스터






1. 21세기 영화의 세 가지 경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1923년의 <세 가지 시대>이다. 이 선택을 두고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것보다 유명한 키튼의 여러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카메라 맨>이나 <셜록 2세>를 언급할 테고, 누군가는 <제너럴>이나 <스팀 보트 빌 주니어>를 언급할 테다. 물론 나도 그 영화가 어떤지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세 가지 시대>에 애정을 보내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인즉슨, 이 영화의 세 가지 시대라는 게 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동시진행형처럼 보인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전제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바로 21세기 영화의 어떤 경향이다. 영화가 꿈을 말하는 매체라는 말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사람들은 그것이 꿈이 되리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달나라 여행>을 만들었으며, 곧이어 그런 상상력은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발전해나갔다. 이때 영화는 다시금 세 가지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과거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의 전편이 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 하는 현편이 있었으며. 다가올 미래를 목격이 아니라 거의 예견하다시피 한 후편이 있었다.




1-1.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현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현편의 영화들은, 당신도 잘 알다시피 한 그것들이다. 마이크 니컬스의 <졸업>처럼 매정한 현실에 내쳐진 영화들. 이 영화들은 거의 미래를 남겨두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는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 결말이 날 것 같지만, 사실은 끝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현실은 끝없이 늘어진 현재이다. 말하자면 현편의 영화들에게는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 혹은 희미한 출구조차도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들은 영화 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하고 나서는 그 후를 기약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인간이 과거를 반성하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도 하지 않는다.




1-2. 과거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편




과거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의 전편은, 현편의 영화들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봉준호의 <기생충>부터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까지, 이런 영화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가져오면서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변형해 내보인다. 그래서인지 그 이상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호된 비난(비판이 아니라)을 받기도 한다. 과연 저게 올바른 방향인지에 관해서 의문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의견이 갈린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1-3. 다가올 미래를 목격이 아니라 거의 예견하다시피 한 후편




영화가 현재를 찍고, 그래서 필시 과거를 담을 수밖에 없는. 필름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한계점이야말로 시간 아래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말하자면 영화도 이 세계를 이루는 생명체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곧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정확하게는 세계 안에 세계, 우주 안의 은하처럼 소우주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도 우리처럼 미래를 담을 수 없다. 오로지 그에 대한 상상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상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미래에 제약을 걸지 않게 된 이상, 영화가 말하는 미래는 인간의 내면처럼 혼탁하게 되었다.




2. 이미지 그 자체로 남는 현재와 미래




각각의 분기점에 대해 할 말이 많은데 다 말할 수 없어서 아쉽다. 당장 떠오르는 영화마다 개성이 확고해서, 그들의 기준점이 어긋나는 지점이 많으므로 딱 잘라 말할 수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편과 현편과 후편을 오가는 신비로운 영화들이다. 즉 딱히 하나의 성격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을 넘보기도 한다. 버스터 키튼의 <세 가지 시대>는 아마도 그런 성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될 상징과도 같은 영화일 것이다.




<세 가지 시대>는 영상만을 두고 보면 그리 특출날 게 없는, 평범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키튼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영화 중간마다 세 가지 시대를 한 화면에 세 개의 구도로 분할하여 보여준다. 독일 국기처럼 상단 중단 하단이 분리되어 있는 이 시퀀스에서, 우리는 각각의 시대에 존재하는 키튼이 하나의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허나 핵심은 키튼과 여배우가 세 가지 시대에서 모두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곳에 세 개의 시간대가 공존한다. 그런데 석기시대와 로마시대의 어딘가쯤으로 보이는 과거 시퀀스와는 다르게, 현재와 미래 시퀀스는 그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저 비슷하게만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두고 ‘현재와 미래는 필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건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키튼의 시대를 기준으로 볼 때, 그곳에서 명확한 것은 석기시대와 로마시대처럼 보이는 과거의 이미지밖에 없다.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는 기준선을 잃고 붕괴하여 서로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는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현재와 미래는 하나가 되어 ‘이미지’ 그 자체로 남는다. 나는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영화 필름이 계속해서 과거로 롤 아웃 되는 가운데,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현재에 상영되는 상과 그 후에 다가올 미래이기 때문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뒤로의 후진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 하의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영화라는 공간 또한 시간의 변주이고 그래서 후진은 허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간이고 영화도 영화라는 이름의 공간이다. 요컨대 영화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는, 그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마치 인간처럼 말이다.




3.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동시대의 여러 변주




키튼에 관한 다른 평자들의 글을 보았다. <카메라맨>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관한 영화라는 말은 흥미로웠다. 이 문장은 ‘영화를 찍는다’와 ‘찍는다는 것에 관한 영화’라는 두 가지 말로 분리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키튼의 영화 중에 ‘영화에 관한 영화’는 단연 <셜록 2세>일 테다. 이 영화에서 키튼은 극장에서 영사기를 돌리는 기사인데, 중간에 잠에 빠지면서 영화의 스크린 안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퀀스의 전환은 물 흐르듯 진행되어 알아볼 수 없고, 단지 꿈에서 빠져나올 때만 그 편집의 지점이 명확하게 드러날 뿐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꿈으로부터의 탈출만이 강조되는 영화이다. 마치 한국의 소설 <구운몽>처럼 꿈에서 깨고 난 후에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의문점 또한 명확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키튼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만을 집중해서 풀이하는 평자들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는 게 관객이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 혹은 그 반대로 영화가 당신의 세계 즉 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그 시대에 분명 신선한 발상이었겠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지만, 반대로 그런 신선함에 가려진 정말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 묻혀버리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키튼이 영화를 오가는 모습은, <세 가지 시대>의 현재동시진행형 시퀀스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셜록 2세>에서 키튼이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영화가 하나의 세계가 아닌, 평행한 세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를 단순히 꿈에 관한 메타포로만 읽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다. (또는 라깡은 너무 식상하다) 그가 <셜록 2세>에서 말하는 영화의 가능성이란, 영화의 내부에서 시간이 오가는 게 아니라 그것들 전체. 영화’들’이 서로 시간을 주고받는, 동시대에 서로를 인식하지만 그저 그렇게 스쳐 보내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우주 영화에서는 드넓은 우주에 하나의 점에 불과한 인간을 묘사하는 낭만이 되고, 드라마 장르에서는 하나의 점이 얼마나 위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에 관한 낭만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곳에서 확인한 것은 주인공에 이입하는 당신과 그런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가 거대한 형식의 일부라는 점. 그래서 형상은 달라도 본질은 유사한 여러 변주곡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인간 찬가라는 비판을 들어도 별다른 반박을 못 하겠지만, 적어도 영화와 인간의 관계는 그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만큼이나 유사하다는 점에서. 인간 찬가는 영화 찬가나 다름없다. 예컨대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면, 영화 또한 서로가 비슷하게 살아갈 테다. 그래서 <셜록 2세>의 키튼이 탐정을 욕망할 때, 그가 속해있는 영화 또한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자 열심히 욕망할 테다.




대강 정리해볼 때, 인간과 영화를 추동하게 하는 건 욕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그들이 욕망 그 자체라는 말과는 다르다. 즉 꿈과 욕망은 분리되어야 한다. 라깡의 꿈은 밤에 진행되고 우리의 욕망은 낮에 수면으로 올라온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화를 정신분석적으로 읽는 것은 그들을 밤에만 머문다고, 또는 밤에만 머물게 압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키튼의 <세 가지 시대>는 불려 와야 한다. 이 영화에서 독일 국기를 떠오르게 하는 현재동시진행형 시퀀스는 세 명의 키튼이 모여 달려가는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키튼이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셜록 2세>가 영화관이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꿈을 상상케 한다면, <세 가지 시대>는 그에 대한 반전으로써 욕망을 향해 내달리는. 동시대의 여러 변주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4. 형태를 바꾸어 영화 안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동시대의 여러 사건을 보여주는 방법,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나 <인셉션>는 시퀀스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후에 점진적으로 편집의 간격을 줄여나가면서, 종국에는 한 차례에 교차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꽤 정교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여러 이야기를 유연하게 엮으려고 편집 기술을 발달시키는데, 키튼의 <세 가지 시대>는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거의 그들을 초월한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단순한데, 바로 그렇기에 뭔가 더 특출나 보인다.




키튼의 <세 가지 시대>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의 흐름이 한곳에 모일 수 있다는 점을 통감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허탈하기까지 할 정도다. 그게 느낌적인 느낌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키튼의 영화는 20세기 초반에 나왔으니 오히려 현대 영화 기법의 본질이 이미 그때부터 예견되어있었다는 점이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영화가 가능케 한 것 중 하나는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존재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로, 오손 웰즈의 위대한 영화 <시민 케인>에서의 딥 포커스 활용이 예시로 거론되고는 한다. 그런데 오손 웰즈의 영화가 1941년에 나온 것을 떠올려 보면, 1923년에 등장한 키튼의 <세 가지 시대>는 그보다 십수 년을 앞서간 셈이다. 요컨대 키튼의 성과는 단지 <셜록 2세>의 메타영화적 발견뿐만이 아니다. 오손 웰즈가 하나의 공간에 흐르는 세 가지 흐름을 관통하는 방법을 카메라라는 도구에서 찾아내었다면, 키튼은 세 가지 흐름을 먼저 목격한 것이다.




이 발견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뻔하디뻔한 말뿐이다. 키튼이 그만큼 위대하다, 는 식의 찬양이거나 혹은 재발견에 대한 설렘. 혹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흐름을 발견하고 포착하는 도구일 뿐, 본디 영화에는 그것들이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영화를 발명한 게 아니라, 영화는 본디 세계에 있었으며 단지 우리가 카메라와 필름을 통해 그것을 육안으로 관측될 수 있도록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것 중 하나는, 꿈을 물질의 형태로 구현해 불특정 다수와 나누고 싶어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그들이 꾸는 꿈을 물질계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본디 아니게 우스꽝스러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컨대 그것은 그들 나름의 발버둥이자 최대한의 노력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마치 영화처럼 형태를 바꾸어 영화 안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과거는 스크린에 남지만, 현재와 미래의 움직임을 신체로 보여주려던 그들의 노력은. 현대 영화의 어떤 경향이 되어서 지금의 우리 앞으로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지나간 역사, 그 과거는 스크린에 담되. 그렇게 해서도 담기지 않는 현재와 미래를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키튼 시대의 화법, 우리가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발굴해내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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