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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28. 2019

나아가지도 않고 돌아가지도 않는다면

<스탠바이미>(1986)

영화 <스탠바이미>의 한 장면 © 컬럼비아 픽처스



리버 피닉스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두 영화 <스탠바이미>와 <아이다호>입니다. 먼저 <스탠바이미>를 살펴보자면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따라오는 문구가 바로 리버 피닉스입니다. 감독인 롭 라이너가 그렇게 무명인 것은 아니지만 리버 피닉스라는 젊은 날의 배우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감이 있습니다. 리버 피닉스라는 한 청년이 있었고 그는 23살의 나이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연기에 재능을 보이고 음악을 사랑했던 한 청년이 슬프게도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리버 피닉스가 굉장한 미남상이었다는 점을 빠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있듯이 외모로나 연기로나 굉장한 자태를 뽐내던 배우 한 명이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은, 그가 남긴 아름다운 영화들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점과 대비되어 우리에게 큰 슬픔을 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가 배우를 기억하게 한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리버 피닉스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리버 피닉스가 16세의 나이로 찍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네 명의 꼬마인데 극을 회상하는 건 그의 친구입니다. 네 명의 꼬마가 마을 밖의 어딘가에 있는 시신을 찾아 떠나는데 리버 피닉스는 그들의 우두머리격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선두에 선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들의 친구 중 하나인 화자가 성인이 된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신문에서 목격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컨대 그와 우리는 리버 피닉스의 뒤를 따르는 수줍은 고백자입니다. 과장을 보태서 이것은 젊은 날의 첫사랑을 말하는 어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두고서 사랑과 우정의 정의가 정말로 한 끗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인데 리버 피닉스의 유고작 <아이다호>가 사랑과 우정의 모호함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리버 피닉스가 개명 후에 얻은 직업이 배우라는 점에서 그는 배우로 다시 태어난 것이고, 이 불사조의 사실상 데뷔작인 <스탠바이미>와 유고작 <아이다호>가 갖는 관계는 생의 마지막에서 생의 초창기로 점프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윤회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듯한데, 리버 피닉스는 우리에게 <스탠바이미>와 <아이다호>라는 두 개의 지점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두 개의 지점에 갇힌 우리가 추종하는 건 스크린 위의 리버 피닉스에 대한 고백록입니다. 현실의 이미지, 인간으로서의 리버 피닉스를 기억하던 이들보다 스크린으로 그를 접한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영화는 리버 피닉스를 살아있게 하는 물질인 것입니다. 


리버 피닉스라는 새가 날개를 달고 본격적으로 날아오를 무렵을 담은 이 영화는 날개만큼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대략 천 이백여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 돌아다니는 불량배 무리가 꼬마들의 형입니다. 작은 마을에 갇혔다는 나레이션이 끝나고 나면 갇힌 나머지 미쳐버린 이들이 등장하고 그게 불량배입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젊음의 혈기가 북받쳐 오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이들은 형제 사이인 셈인데 형제 사이이기에 더욱 멀게 느껴진다는 게 시골 마을의 정서이자 미국이라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미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골이고 그게 곧 미국의 초창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거친 나라입니다. 오래전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는 총을 쏘는 게 곧 법률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서부개척시대라고 불리는 인디언과 황금의 땅입니다. 여기서 인디언이 외부의 위협이라면 황금은 내부의 위협입니다. 모험을 떠나는 길에 마주하는 여러 경쟁자가 당신의 목숨을 노릴 것이고 우리는 방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구책이자 사마리안의 길이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 낯선 이를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아도 당연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 거친 곳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사마리아인일 뿐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이라면 영화의 네 꼬마가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하셨을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목적은 불순하지만, 실종된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장례를 치러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착한 사마리안이 구제 자체에만 신경 쓴다면 사마리안은 자신의 행위가 구제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들이 시체를 발견해 영웅이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구제의 플롯이 아닙니다. 영화는 아이들이 시체를 발견해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곳에 영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시체를 들고 오는 걸 거부하고 익명의 제보자로 남을 뿐입니다. 이 대목이 사마리아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시체 운반을 포기하는 건 그들의 형이자 불량배인 이들이 차를 타고 와서 시신을 갈취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양측의 대립이 칼과 총으로 표현된다는 게 특기할만한 점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칼이 아닌 총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나라의 주된 무기는 총이고 그래서 그들은 물러납니다. 이는 미국의 짧은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꼬마들이 불량배 형을 이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인류 역사에서 검이라는 도구가 문명 시대의 오랜 기간을 차지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총이라는 도구는 발포와 착탄이 순식간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총의 역사는 곧 짧은 기간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러니 자동차를 타고 금세 도착한 불량배 패거리와 행낭을 싸서 이틀 동안 모험을 떠난 아이들을 대조해 볼 때, 불량배 패거리가 총이 되어야 하고 아이들은 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유독 미국 영화에서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아마도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은 개척자가 세운 나라이고 그에 파생된 게 개척정신입니다. 그리고 개척정신의 변주는 정신을 제하고 남은 개척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신이 없으면 개척만이 남게 되고 개척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여기서 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시대가 변하며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망각하고 싶은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신구대립에서 사라지는 건 주로 후자인데, 미국의 역사에서 원주민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고 그게 개척정신의 반대항이라고 가정할 때 속죄는 그 꼬리에 달려있습니다. 예컨대 개척이라는 게 어딘가로의 여정이자 기존 것들의 파괴를 뜻한다는 점에서 앞과 뒤를 지우는 행위라면 그들의 존재는 현재에만 한정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탠바이미>가 말하는 1960년대의 풍경은 더는 개척도 속죄도 필요하지 않은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멈춰있는 공간입니다. 


개척도 속죄도 필요하지 않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나아가지도 않고 돌아가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 이곳에 있습니다. 배경이 배경인 만큼 베트남전을 비롯한 히피 문화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 부분을 피해갑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60년대 미국의 화두가 미국의 중심부에 자리한다고 가정할 때 이 시골 마을에는 그런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단절의 이미지이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게 개척의 이미지라면 베트남전과 달 탐사 계획이 공존하는 이 60년대란 바로 단절과 개척의 혼합일 것일텐데, 이는 어디까지나 중심부의 이야기이고 이곳은 시골이기에 그 영향력이 약하거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좁은 시골 마을의 젊은이들이 중앙을 동경하는 것이고 이게 작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입니다. 


시골 마을에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에 탈피하려는 게 이 영화 속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와중에 한 아이가 마을에 벌어진 실종 사건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냅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화자가 시신을 처음 본 게 어린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래된 친구의 부고를 어느 신문에서 발견하는데 그곳에서 친구와 함께했던 시신 찾기 모험을 떠올려냅니다. 화자는 여기에 어떠한 가치판단을 부여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게 기억의 격리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잊었던 과거의 한순간을 회상하는 이 영화의 화법은 잊혀진 곳의 개척인 동시에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가 그것인데, 과거의 한순간을 추억하는 행위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어른이 아이 시절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아이 시절은 서부시대라 할 수 있겠고 실제로 그는 총을 손에 거머쥡니다. 이 과정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영화에서 서부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 또는 언제나 미국을 이루는 것인 열차와 총을 말해보려 합니다. 먼저 총에 대해 말하자면 작중에 무리의 우두머리인 리버 피닉스가 아버지로부터 갈취한 총을 화자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화자가 장난삼아 방아쇠를 당기는데 정말로 총이 나가버립니다. 이때 권총집에서 총을 빼어 무법자 흉내를 내던 그들의 모습에는 총잡이에 대한 동경이 관측됩니다. 동시에 그게 곧 그들의 형으로 구성된 불량배 집단에 대항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그들의 형인 불량배 무리를 보면서 ‘우리도 크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고려할 때, 불량배의 모습은 피해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리고 그런 미래는 자동차를 타고 아이들이 현재 겪는 여정보다 빨리 다가오며 시체 앞에서의 대립은 그런 식의 관념, 현재가 미래를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이게 이 영화에서 정말로 이상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개인의 측면이 총이라면 단체의 측면에는 열차가 자리할 텐데, 말하자면 이 열차는 대륙횡단을 위한 일종의 도구이자 운송수단 혹은 산업개발의 표본입니다. 그러니 이 표본에 대하여 우리가 무언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총잡이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말과 그의 확장판인 마차가 열차라는 것으로 변형된다는 점이고, 이 영화에도 그게 나옵니다. 먼저 영화에서 주로 보이는 운동 이미지를 관찰하면 크게 두 가지로, 불량배 무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반면 아이들은 선로 위를 달립니다. 여기서 두 운송 수단의 차이를 따져보면 열차는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하고 자동차도 정해진 도로가 있지만 딱히 그곳에서만 달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열차와 자동차는 그런 차이가 있고, 덧붙여서 그에 탑승하는지 아닌지의 차이도 있습니다. 그게 두 집단을 설명해줍니다.  


미국이라는 드넓은 땅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열차입니다. 자동차와 열차와 비행기 중에서 열차의 운송비용이 여러 면에서 가장 저렴하다고 합니다. 반대로 미국은 땅이 넓어서 자가용이 없으면 생활하기가 몹시 힘듭니다. 따라서 열차와 자동차는 화물과 개인을 운반하는 가장 대표적인 운송수단입니다. 그리고 물론 나이제한도 있겠지만, 어린아이들이 자가용에 타지 못한다는 점이나 선로 위에서 열차와 달리기시합을 한다는 점은 개인으로는 빠져나가기 힘들고 산업에는 뒤처지는 이 시골 마을의 풍경이 그런 시간, 지루한 인생의 나날 그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두운 생활을 암시합니다. 


아이들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폭력의 다른 이름은 무관심입니다. 영화에는 화자가 미식축구 유망주였던 형이 죽고 나서 부모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부모가 물적으로 지원은 해주면서 감정적으로는 무관심을 내비치는 게 주인공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서양인들이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운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것은 정도가 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대목에서 화자를 통해 엿보는 시골 마을에 대한 감정은 이곳이 서부개척 시대의 어느 공기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단지 시골이라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주체되기를 해야만 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미국의 옛 총잡이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총 한 자루만 들고 황야를 떠돌던 때가 거친 낭만이 서부극의 요인이라면 자동차에 몸을 맡기고 떠도는 모습은 히피족의 문화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서부극이나 히피족이 아니라 이런 장르가 몸담은 배경이 그 원료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시체라는 지향점에 모일 때 이야기는 보다 관념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시신을 찾아 떠날 때 히치하이킹을 하자고 말하지만 제안은 반려됩니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시신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는데 불량배들은 아이들이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에 출발해서 금세 도착합니다. 이 시각의 격차는 모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게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만큼 잊고 지내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서부개척 시대의 시신과 히피 시대의 시신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가 개척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전장의 잔존물입니다. 이때 전장은 시위대일 수도 있고 실제 전장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으로부터 파종된 불량배라는 이름의 형, 그리고 그에 속하지 않았던 화자의 형이 사망한 대목에서 던져지는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다’는 자책감 섞인 말은 이상에 가득 찬 시절이 오히려 더 사악했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화자의 부모님 말씀을 들어보면 동네에서 화자와 친구들은 이상한 무리로 여겨지는 모양이고, 따라서 불량배나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는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른마다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다른데 어쩌면 이는 아이이기에 양해받는 것, 예전에는 되었는데 지금은 안되는 여러 행위에 대한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살펴본 단어를 나열하면 일련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관심, 죽음, 망각, 멈춰있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대체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시체를 발견했지만 불량배와의 대결 끝에 시신을 모른척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잊혀야 할 죽음이 아니라 때로는 무관심이 약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무관심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방법을 그들은 택합니다. 시간이 흘러 무관심으로 사라진 화자의 친구 소식을 접하는 방식 또한 그런 자연스러움의 일종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정지된 시간으로 추방되는 행위 중에 가장 최상격에 해당하는 죽음에게 그런 일은 통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일을 부자연스럽게 만듭니다. 그 죽음의 다른 이름은 잊혀지고, 망각되고, 사라지고, 도망갔고, 기록으로 남은 과거의 유산입니다. 이 자리에서 서부는 오래 전 옛날 옛적으로 남을 테고 영화에 대한 우리의 추억 또한 그렇습니다. <스탠바이미>는 그런 영화입니다. [리버 피닉스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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