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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8. 2019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영화

<경계선>(2019)

영화 <경계선>의 작품 포스터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다. 하지만 정말 그대로는 아닌데 그 이유는 ‘경계선’이라는 단어가 많은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것은 선에 관한 문제일 것이며 조금만 돌아가 보면 선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경계선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경계와 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선이 곧 경계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선을 넘는 것이 곧 파멸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 선이 무형의 무언가라면 경계를 가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선을 넘는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는 주로 넘지 말아야 할 금단의 영역을 설정하는데 사용되고는 하지만, 선을 넘어야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기도 하므로 누군가에게 이것은 필히 겪어야 할 진통이기도 하다. 이때 선이 경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걸 넘을 필요가 없다. 경계가 아닌 선은 그저 직선에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이것은 선을 전제로 경계를 논하는 영화다. 그래서 경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럼에도 선은 필요하다. 그게 선을 측정하는 일이든 아니면 선을 만드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 


선을 전제로 해두었으니 다른 부분을 살펴보고 싶다.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감각이란 어느 한 지점이 명확하게 단절되지 않는다. 이 선형적인 흐름은 신경의 전달체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때는 ‘느끼는 중’이지만 어느 순간 그게 끝나고 나면 ‘언제’ 느끼지 않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이 리니어, 감각의 선형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선형성에는 시작과 끝을 면밀히 잘라 물을 수 없는데 이게 작중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린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모습에 해당한다. 그리고 티나가 자신의 과거에 접근하며 알게 된 사실은 자신에게 꼬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꼬리의 의의는 그녀가 도착한 마지막 정체성의 지점이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꼬리가 잘렸다는 건 트롤이라는 정체성을 잘린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인생을 하나의 선에 빗대어 볼 때, 안주할 곳이 잘려나가면서 선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꼬리를 두고 일종의 출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꼬리를 잘린다는 건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감각과 삶의 공통점은 꼬리가 잘림으로써 선형성을 얻고,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흐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점이다. 이게 트롤이라는 종족이기에 감각이 예민한 게 아니라, 티나이기에 감각이 예민하다는 점을 설명해준다.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신기한 도식을 언급해야 한다. 티나의 꼬리가 트롤로서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가정하에, 티나가 트롤임을 깨닫는 건 꼬리의 정체를 발견한 대목이므로 이 꼬리는 트롤로서의 각성을 뜻한다. 그런데 사실 이 꼬리는 트롤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것이므로 꼬리를 잘린 걸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트롤 정체성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장을 보고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당신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 꼬리가 트롤이라는 단어를 대변한다면, 엉덩이 위의 흉터가 절단된 꼬리의 흔적임을 확인받는 순간은 과연 트롤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일까 아니면 절단되는 순간일까. 예컨대 이는 시작과 단절, 양쪽으로 바라볼 수 있고 그렇기에 이는 원형을 그리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이라는 하나의 선형성에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리니어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곳에 남겨진 것만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현재이다. 여기에 추가로 ‘현재에서 떠올리는 것’과 ‘현재에서 상상하는 것’이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로 지칭되곤 한다. 허나 지적해두어야할 건 그런 시간과 기억의 문제가 선형적이라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티나가 떠나온 곳, 트롤이라는 종족이기에 감각이 예민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기본 전제는 현재라는 순간, 선형적으로 이어진 현상이다. 덧붙이자면 이건 티나가 갖는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감각은 아무래도 후각인데, 냄새는 연기의 형태로 자주 묘사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듯이 시작과 끝이 희미하다. 게다가 후각은 우리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거울 뉴런이 가능케 하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에서의 몇몇 효과들, 통각이나 시각이나 촉각이나 청각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오직 후각만큼은 우리가 느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티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스크린이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이 후각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스크린은 관객과 영화 사이를 절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곧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후각은 티나의 꼬리가 만들어내는 서사적 선형성과 유사한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감각과 신체라는 두 개의 도식이 있다. 여기서 감각의 면은 앞서 말한 후각의 심상을 뜻하는데 신체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에서 신체란 트롤이라는 북유럽 신화의 한 면모를 대변하고 다른 것을 제쳐놓고 말하면 결국에는 신화이다. 신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비범한 신체이며 이는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게 외견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티나의 직업이 세관원이라는 점을 보여줄 때, 검문을 당한 남자가 티나의 외모를 추하다고 욕하는 장면이 삽입됨으로써 우리는 눈으로 확인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일종의 확인사살이자, 이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그는 못 박아두는 것이다. 


조금 미안하지만 이렇게 그녀는 영화 공인 추녀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고 새로 등장하는 보레(에로 밀로노프)라는 남성은 티나와 엇비슷한 외모를 지님으로써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그 동질성이 확인되고, 이차적으로는 티나가 보레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음으로써 그 동질성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를 도식화하면 관객에게는 신체가 티나에게는 후각(감각)이 남는다. 이때 신체는 나와 타자의 거리가 눈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가시적이고 이는 경계가 된다. 반대로 감각은 나와 타자의 거리가 오로지 자신의 주관을 따른다는 점에서 불가시적이고 이는 선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전에 알아본 것을 대입해보면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말하는 영화’가 된다. 다시 한 번 변용을 거치면 이것은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영화가 된다. 


신화는 연대기이기도 하다. 오래전 영웅의 이야기를 현세의 영웅이 이어받고, 그 현세가 시간이 흘러 먼 과거가 되고, 이런 식의 반복이 이루어져 지층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라는 시간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트롤이라는 신화적 존재는 그녀의 부모님 대에서 수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말마따나 세 살 무렵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기억의 모호함이 자리한다. 세 살 무렵의 일의 기억나지 않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자신이 떠나온 태초의 시간을 잊게 되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시간을 설명해준다. 이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이 그녀의 부모님대라고 생각하면, 본편이 시작된 후로는 오로지 그녀의 시간일 텐데 말하자면 그녀의 삶은 곧 영화다. 그리고 영화라는 게 물질적으로 기록되는 매체라는 점에서 이 기억은 모호해질 수가 없는데 이는 영화가 신체에 붙잡혀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티나가 기억을 잊었다는 건 신체를 잊었다는 것이며 그 신체는 바로 트롤의 그것이다. 즉 그 ‘신화’는 바로 티나이다. 


이제 잠시 초점을 담론으로 돌려보자. 자신이 신화적 존재임을 깨닫는 영웅 서사는 어느 곳에서나 굉장히 흔하다. 인간 사회에서 자신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를 반문하고, 그 원인이 남들과는 다른 출생의 비밀이라는 점을 깨닫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이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 소수자 문제와 같은 다름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그렇게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풀어가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담론보다는 경계와 선이라는, 감각과 신체의 문제가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실은 현대 사회에서 소수자 담론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어쨌거나 범주는 겹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왜 그들의 주된 감각인 후각을 영화 밖의 우리가 느낄 수 없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고, 그런 질문이 던져질 때 이 영화는 비로소 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곳에는 당신이 눈으로 본 것 이외에 남겨진 무언가가 여전히 자리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이미지의 세계로 넘어간다. 물과 숲, 이것은 아주 오래전에 있던 아담과 이브의 에덴 동산으로 탈바꿈하며 티나와 보레를 하나로 잇는다. 여기서 물은 액체의 형태로서 끊임없이 흐르는, 그래서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시간의 물화로 지칭된다. 또한 숲은 그런 시간을 담은 공간으로서 인간 세상의 반대항, 도로 한복판에 동물이 튀어나올 때 우리는 도로가 인간의 영역이고 숲은 자연의 영역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예컨대 티나가 즐기는 산림욕은 일차적으로는 트롤이라는 신화적 존재가 신화적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눈으로 확인할 만큼 분리되어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티나가 숲 한복판에 있는 호수에 들어가 알몸 상태로 지내는 장면과 집안에서 동거인과의 섹스를 거부하는 면은 명백하게 인간계보다는 자연계에 귀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감각 도식으로는 모든 게 딱 잘라 표현되는 인간계에서 벗어나 선형성을 띠는 자연계를 신봉하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건 티나의 직업이다. 자연계의 모호함은 살기 위해 얼마나 먹어야 하고 얼마나 머무러야 하는지 등의 기준이 확립되어있지 않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곳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 담긴 ‘시원적’인 공간이라는 점에 귀인한다. (당신은 여기서 장 자크 루소를 떠올려도 좋다.) 이 상태에서 자라온 태초의 인간은 사냥감이나 재배 곡물을 분배하는 문제에 부닥쳤으며 이에 등장한 것은 법과 국가이다. 공교롭게도 티나의 직업은 세관원으로서 세법에 어긋나는 물품을 검열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런데 여기서 티나가 문제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후각을 비롯한 감각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연계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데, 이는 우리가 티나의 산중 목욕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시간이 ‘물화’로 지칭된 물이라는 질료가 바로 그 시간의 형질이기 때문이다. 이 물의 수질을 떠나서 인간 세상에서는 마시는 물이 페트병에 담겨있고 집에서 사용하는 물도 사용한 만큼 돈을 내야 한다. 즉 인간계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되고 규합되며 그렇기에 티나의 직업은 세관원, 이윽고 그녀는 경찰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티나가 산림욕을 평소에 즐겼던 걸 보면 아마 그녀는 트롤로서의 정체성을 느꼈던 것 같다. 예컨대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각을 추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이 그만큼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의 앞에 보레라는 낯선 남성이 찾아오는데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같은 종족임을 그녀는 직감한다. 이 과정의 설득력은 영화가 표방하는 감각인 후각을 우리가 느낄 수 없다는 점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녀는 그냥 감각이 발달한 것이고 그게 트롤이라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리고 보레를 만나 자신의 짝을 찾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주 중요한 한마디를 듣게 되는데, 이는 위로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배반의 목소리이다. 먼저 보레가 그녀에게 건넨 말을 살펴보자. 보레는 티나에게 “당신은 평범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 말이 아니라 트롤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티나는 자신은 어려서부터 남들과 달랐으며 이게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반면 보레는 그런 티나에게, 당신은 인간으로서는 특별하고 트롤로서는 평범하므로 종국에는 평범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보레는 티나가 트롤의 삶을 택할 것이라고 미리 추측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긋나게 된다. 


행여나 헷갈릴 사람들을 위해 이미지의 교차를 여기에 적어두자면, 자연의 시간은 감각이며 이는 도시의 공간이 신체라는 신화를 부르는 것과 대치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말하기에 양측은 반대항이 아니라 대립항이며, 따라서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도시를 설명하려면 숲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티나가 평소에 숲으로 나다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때 보레는 도시를 떠도는 이로서 숲으로 귀의하는 이이기도 한데, 티나에게 먼저 다가온 점은 그가 방랑자라는 점이다. 같은 트롤로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보레의 모습은 티나에게 있어 무근본의 신호가 아닌 자유의 상징이었다. 예컨대 보레는 고전적인 맥락에서 신화적인 존재였으며 영화는 보레가 티나에게 트롤로서의 자긍심을 세워주는, 일종의 사제관계를 취한다. 그러니까 이 사제관계는 마치 옛 신화에서 선대 영웅이 후대 영웅에게 자신의 비법을 모두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영화는 티나가 그걸 거부하고는 인간계에 여전히 머무르는 것을 보여준다. 즉 티나는 자신이 동경하는 숲, 그 무한한 시간의 흐름에 소속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런 무질서보다는 인간계의 혼돈-질서를 택한다. 


이에 따르면 보레는 신화적 맥락에서 티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떠나가는 추방된 이이다. 어느 신화에나 주인공 영웅에게 금기를 전수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이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물론 이게 정확한 비유는 아닐 것이다만, 보레의 말처럼 트롤에게는 인간의 기준이 필요 없고 그렇기에 이는 티나를 시간의 영역으로 완전히 끌어당기려는 카오스라는 이름이 된다. 예컨대 티나가 자신을 트롤이라 정의하면서도 여전히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기를 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티나의 이상은 무질서는 자유이지만 방종이기도 하며 그렇기에 자신은 (그것이 배반일지언정) 질서를 택한다는 것이다. 이때 잠시 영화의 아름다운 면을 살펴보면, 영화는 티나와 보레의 운명적인 결합 장면을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데 이는 옛 그리스의 인간상(그리스인들은 태초에 인간이 남녀 한 쌍으로 한몸이었다고 믿었다.)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염색체상으로는 자웅동체인 두 사람이 한데 만나면 그 육신은 어느 특정한 성이 두드러지지 않게 된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카오스라는 이름이 무(無)라는 혼돈이 아니라 본래의 것이라는 맥락으로 돌아감을 확인하고, 그렇지만 그런 혼돈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영화의 전반적인 논리이다. 


보레라는 이름의 혼돈이 있다. 티나는 처음에 그가 태초의 무언가, 트롤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보레와 함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레는 본래가 아니라 혼돈에 불과했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트롤이라는 신화적 시간을 전수해오는 보레라는 이름의 혼돈을 티나가 거부하기 어려웠겠지만, 보레가 자신이 쫓는 아동 포르노 사건의 연루자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배제해야 할 속성이 되었다. 예컨대 그녀에게 무질서한 것, 시작과 끝이 딱 잘라 정해지지 않는 것은 이제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세관원으로서 도시의 따분한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굳이 ‘왜’ 한적한 시골에서 사느냐는 물음이 제거되는 셈이다. (인물들은 묻는다. 왜 이리 으슥한 곳에서 사느냐고.)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인적이 드문 자연 한복판이어서겠지만, 그런 무질서함을 대변하는 보레가 도심 한복판에서 일종의 ‘바이러스’의 형태로 다가옴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티나가 통로에 서서 지나가는 이를 쳐다본다. 이 중에 한 남자가 아동 포르노가 담긴 메모리 카드를 휴대폰 뒷면에 숨기고 있었는데 티나는 이를 감쪽같이 알아챈다. 아동 성범죄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최악의 범죄로 지탄받는 걸 고려하면 이 남자는 바이러스 취급을 받아도 무방한데, 영화는 이 남자를 보여준 다음 시퀀스에 동일한 구도와 절차로 보레를 등장시킨다. 외모지상주의를 따르면 보레의 추한 얼굴 또한 그가 수상한 이로 여겨지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좀 전의 성범죄자 이미지를 보레에 투사하게 되는데, 이는 물론 진실이었지만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그게 오해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이 장면에서 티나는 자신의 동족을 만났다는 감정에 흔들려서 악의 냄새를 맡지 못했거나, 또는 자신과 같은 냄새를 처음 맡아보았기에 악의 냄새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주로 다루는 후각을 스크린 밖의 우리가 느낄 수 없고, 그렇기에 이게 더더욱 신화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은 영화의 형식에 관한 것이므로 더 말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가난한 이들에게 어떠한 ‘냄새’를 투사하고, 그것을 일종의 비유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 홀아비 냄새, 노인 냄새, 동물의 누린내, 이하 기타의 냄새는 씻을만한 여유가 없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는 자기관리에 소홀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그런 가축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라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 진입하기 전에 담론의 세계를 둘러보았는데, 이미지의 세계를 둘러보고 난 후에도 담론의 세계로 왔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우리는 담론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담론으로 귀의하는 셈인데 이게 작중 티나의 행적과 비슷하다. 첫 번째로 티나는 도시에서 숲을 갈망하는 이이며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증거로 보레가 자신을 따라 유람선에 올라타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보레를 따라가지만 경찰을 대동해 보레를 붙잡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도시에서 숲으로, 신체에서 감각으로, 신화에서 시간으로, 담론에서 이미지로 외도한다고 보아도 좋을 테다.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논하는 영화, 선을 전제로 경계를 논하는 영화. 정리하면 선으로서의 감각과 신체로서의 경계이다. (당신은 여기서 줄리안 크리스테바를 떠올려도 좋다.) 작중에는 두 명의 양성구유가 등장하고 두 사람이 한데 합쳐 서로에게 약점인 성과 강점인 성을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는 합일을 통해 비로소 하나(시원적 의미에서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건 영화라는 신체에 관한 논의이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우리 현실과 분리된 곳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계를 형성한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이입하게 되는 건 무엇인가. 시각, 감정, 청각, 이런 감각이 몰입을 돕고 덕분에 우리는 스크린으로의 경계를 넘어간다. 허나 단언컨대 이는 밀입국이 아니다. 영화에는 국적이 없고 단지 종족만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게 이곳이 국경이 아닌 세관인 이유이다.) 예컨대 이는 같은 종과는 교배가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늑대와 개의 교배가 가능하듯이 영화와 현실의 교배가 가능하며, 그것이 작중에서는 인간과 트롤이라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허나 일반적인 타자 담론은 아니다. 이곳에서의 타자 문제는 우리가 세계에 품은 이미지에 얽혀있다. 


도시에는 선이 있고 숲에는 경계가 있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티나의 시선을 따라가기에 숲을 탐하지만 종국에는 도시로 귀결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이 부분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티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부모를 겁박하는 장면을 보면 티나가 도시를 증오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단지 그녀는 기억을 잃어가는 부모를 동정하면서, 어차피 말해보아야 다 잊을 것이라는 둥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아버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비밀을 밝힌 게 다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때 서사에서는 보레가 홀로 낳은 무성생식 태아가 등장하는데 이건 마치 혼돈이 낳은 무언가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체인질링(changeling)이라는 북유럽 신화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큰 범주에서 인간계의 시작과 자연계의 시작을 맞바꾸는 행위로 생각해보면 다르게 볼 구석이 있다. 어느 생물이나 아기(새끼)는 삶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보레의 아이는 결핍된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장치라는 무례한 표현을 부디 용서하시길) 예컨대 보레는 양성구유라는 비정상적인 염색체 조합을 가진 이로서 결핍되거나 결여된 존재이다. 


이때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생각하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숲으로 넘어가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숲은 곧 경계이기 때문이다. 빨간 모자가 건너야 하는 그런 부류의 경계, 말하자면 작품 안에서 티나의 모습은 영화관으로 일탈하는 영화계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티나가 영화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종국에는 영화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반대로 보레는 영화로부터 태어났다는 점을 근거로 관객이 영화에게 가한 폭력처럼 영화도 관객에게 폭력을 가해야 한다면서 숲이라는 경계를 넘어와 인간계를 떠도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가 말하는 신화는 다름 아닌 영화의 그것이 되면서 스페인 내전의 기억이 숲으로 향하며 벌어지는 판의 미로를 대동하게 된다. 이 숲, 영화라는 장소에는 혼돈이 자리하며 그곳에서 튀어나온 신화적 존재가 당신을 가르칠 것이지만 당신은 그에 완벽하게 끌려가면 안 된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며 종국에는 그가 우리에게 가하는 복수를 역으로 고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의 결말로 넘어가 볼까. 보레는 자신이 그동안 세상을 떠돌았던 것처럼 경찰에 구속되지 않은 채로 물속에서 살아남는데, 이 영화에서 물이라는 게 시간의 시원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가 살아남은 건 우연이 아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보레가 티나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핀란드에서 온 엽서가 동봉된 어느 요람을 통해 전해졌다는 점으로 확인된다. 우선 살아있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못할뿐더러, 보레가 평소에 말했던 동족들이 사는 핀란드 땅에서 보내온 이 편지는 마치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갔노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다르게 보면 티나에게 보레는 경계를 넘어선 어느 구역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처럼 보일 테고, 아마도 이는 티나가 보레와 근본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이유였을 테다. 예컨대 질서와 무질서는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고 그렇지만 무질서는 늘 질서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성악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혼돈으로부터의 도주, 그렇지만 우리는 늘 혼돈을 그리워하는 배반의 심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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