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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3. 2019

일상의 실패일까 아니면 비일상의 성공일까

<잔느 딜망>(1975)

영화 <잔느 딜망>의 작품 포스터 © Chantal Akerman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이것을 여성의 시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의 죽은 시간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 힘든 것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알 필요가 없는 일상 속의 반복되는 무언가인데, 여기에는 하루와 일 년에 반복되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을 <잔느 딜망>은 지적한다. 예컨대 그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군가의 집안 사정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느냐고. 그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나의 시간이다.” 말하자면 <잔느 딜망>의 시간은 주인공인 그녀에게 소중한, 왜냐하면 자신의 것이기에 결코 죽은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일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에 수반해 질문 하나가 딸려오게 되는데, 죽은 시간이란 것은 말 그대로 죽어 있기에 평소에는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 죽은 시간을 두고서 은폐와 탈은폐를 반복한다고 말하는 건 과언이 아니다. 죽은 시간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은 일상이고,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고 해서 그것이 ‘산 시간(life time)’이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런 발견을 통해 죽은 시간의 존재가 확증된다는 점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 발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적인 말을 할 수 있다. 죽음 안을 거니는 이에게 발견은 삶으로의 획책이 되는가. 여기서 죽음이란, 본인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 확립되는 일종의 현상이다. 예컨대 죽은 시간이라는 말은 입구와 출구가 정해져 있는 터널 같은 무언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일상과 비일상이 있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인지할 때 일상이 비일상이 된다고 가정해보면, 일상이 비일상으로 성질을 바꾸는 게 아니라 두 개의 흐름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DNA처럼 두 개의 가닥이 꼬여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새이다. 따라서 일상이든 비일상이든 어느 한 쪽이 무너지면 그것은 돌연변이가 된다. 실은 말이 좋아 돌연변이이지 유전자가 변형된다면 그것은 암으로 손쉽게 변형되곤 한다. 다시 말해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죽음이다. 이는 우리가 ‘죽은 시간’이라 부르던 것과는 달리, 말 그대로의 죽음 그 자체이다.


어쩌면 <잔느 딜망>의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나는 건, 그런 귀결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세 개의 날을 다섯 번 정도의 시퀀스 분할로 보여주는데, 말하자면 이 영화의 시퀀스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가 임의로 나눈 무언가다. 다르게 말하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시퀀스라는 이야기를 분할하는 건 어디까지나 감독이라는 관찰자에 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우리의 일상이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감독이라는 관찰자가 필요한 것일까? 만약 그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영화라고 칭하는 것에 타인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을 요구하게 되는 순간에 아무도 알지 못했던 나만의 시간, 그 죽어있던 것들이 생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삶으로의 회귀이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잔느 딜망>의 죽은 시간은 카메라가 포착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녀를 관찰한다는 사실 자체에 동의했기에 존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성립할 수 있다.


<잔느 딜망>을 페미니즘의 기수로 보기에는 그런 의문점이 존재한다. 관찰하기 이전에 그녀의 죽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들여다보아야만 비로소 생의 의지를 얻는다는 말이니 말이다. 우리가 보지 않았을 때도 세계는 작동한다고 말하려면 그런 식의 접근은 지양되어야 한다. 죽은 시간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생동하는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카메라가 응시하는 모든 장소에는 삶의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명백하게도 카메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탈물질의 성격을 갖고, 어떤 의미에서는 겹친 세계에 존재한다고도 여겨진다. 그러니까 사실, <잔느 딜망>은 페미니즘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현실의 반대편에 자리한 영화다. 영화는 가정 내의 죽은 시간을 스크린 위에 불러내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 침입하는 것이다.


짧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샹탈 아커만은 여성의 공간에 들어갔다. 목격한 게 아니다. 우리는 카메라에 있어 목격이라는 행위를 진실을 목도할 요령으로 부여하고는 하는데, 카메라는 하나의 인격처럼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언가를 특별히 본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평소처럼 살아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의 눈을 빌려 공유하게 되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일상을 우리 삶의 어떤 분파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죽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우리 삶에 속해있기에 죽어있지 않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우리와 분리된 무언가로 여길 때는, 몸 안에 죽음이라는 이물질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죽은 시간을 논한다는 건 이것이 영화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 또는 종양. 죽음의 조직.


그런데 특이하게도 자신의 몸에 들어온 죽음이라는 이물질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흔히 축복이라고 말하는 생명의 잉태, 임신이라는 행위에 대한 의견을 재고하게 한다. 이를테면 성교를 나눌 때 반복되는 피스톤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이물질의 삽입과 배출이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임신이라는 행위, 그중에서도 원치 않은 몇몇 사례에서 여성은 자신의 자궁에 존재하는 태아에게 이물질이라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기도 한다. 여기서 자궁과 그에 연결된 질을 공간으로 가정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삽입과 배출의 이미지를 영화 안에서의 카메라라는 관찰자가 아닌 공간적 지위물에 빗대어보면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수렴하게 된다. “본다는 것이 마냥 축복인 것만은 아니다.”


헬렌 켈러의 명언을 단숨에 뒤엎는 이 문장을 두고서 단번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지만, 근친 상간에 대한 속죄를 자신의 두 눈을 뽑는 것으로 대신한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삽입에 대한 속죄는 죽음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에 손가락을 찔러넣은 대가로 실명이라는 시각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는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명해졌다. 소위 말하는 마음의 눈을 뜨게 된 셈인데, 이를 두고서 ‘카메라가 자아내는 시각적 영향력은 스크린 안의 죽음에 자신을 찔러넣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잔느 딜망>의 죽은 시간은 카메라의 응시를 통해 죽음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보통 삽입에 대해 말하는 삶의 에너지와는 정반대이다. 이를테면 임신은 난자에 정자가 삽입되는 것, 남성기가 여성기를 만나는 것인데 <잔느 딜망>은 그것과 반대로 죽음이라는 배아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처럼 보인다. 임신 기간에 여성은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므로 삶의 반경이 좁아진다는 점에서 죽은 시간이 확대된다고 말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이때 우리는 임신이 생명을 잉태하는 행위임에도 임신 중에는 산모의 시간이 죽은 것처럼 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즉 삶의 시간이 창출되는 과정이 있다면 그 주위에는 죽은 시간이 둘러싸고 있다. 이때 우리가 확인하는 중요한 사실은, 죽은 시간은 그 자체로 발견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삶의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죽음은 삶을 동반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잔느 딜망>의 죽은 시간은 주인공 잔느(델핀 세리그)를 둘러싼, 이 와중에 잔느는 잉태된 무언가에 비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잔느는 그 자체로 하나의 태아이거나 또는 그를 잉태한 자궁인 것이다. 또한 임신이라는 과정은 자궁 안의 것들만이 아니라 태교라는 외부적 행위를 포함하기에, 우리는 그 죽은 시간을 잉태의 시간으로 여겨야만 한다. 예컨대 생명이라는 개념은 단지 살아있는 무언가만이 아니라는 점, 여성의 달거리가 자궁벽에서 탈락된 피를 배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삶과 죽음은 거의 동시에 가능성의 형태로 자리한다. 마치 일상과 비일상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는 <잔느 딜망>의 변주를 두고서 달거리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분명 달거리는 임신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임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루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달거리를 두고 삶과 죽음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달거리는 삶의 실패일까 아니면 죽음의 성공일까. 임신이라는 목적이 있든 없든 간에 달거리라는 현상 자체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모호함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모호함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자궁이다. 그런데 어쩌면, 자궁이라는 공간이 영화라는 스크린의 포근함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는 <잔느 딜망>을 두고서 그렇게 묻게 된다. 이것은 일상의 실패일까 아니면 비일상의 성공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잔느의 살인을 두고서 전자를 택하는데, 일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의 실패와 비일상의 성공을 페미니즘적인 맥락으로 옮겨보면 여성의 삶이 일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비일상적인 것인지를 논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잔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가사노동의 현장은 으레 당연한 일상일까 아니면 비일상적인 무언가일까. 여기서 여성이라는 단어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카메라의 몸을 빌려 영화 속 공간에 진입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일상일지 비일상일지를 말해볼 수 있다. 이는 카메라에 성별이 없기에 가능한 중간자적 지대이다. 사실 카메라에 성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꽝스럽기는 하나, 카메라가 잔느를 일상 속의 무언가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비일상적인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시선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카메라가 잔느를 자신의 부류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연대적인 측면일 것이며, 자신의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발견이거나 회개일 것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곳의 성격이 단지 여성적인 무언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두고 싶다. 일례로 이 영화는 세 개의 날과 다섯 개 정도의 시퀀스로 나뉘어 있다고 선두에 말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오즈에게 바치는 다섯 개>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단지 다섯 개라는 숫자적 일치 때문만은 아닌데, 말 그대로 <잔느 딜망>이 잔느에게 바치는 다섯 개처럼 읽혀지는 면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오즈에게 바치는 다섯 개>가 어떤 영화인지를 살펴보면, 이것은 마치 회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회화적 이미지의 나열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냥 바다를 1시간 동안 다양한 구도와 시간에서 찍은 것에 불과한 이 이미지는 영화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이 오즈에게 바치는 헌사임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그에 붙여진 제목이 아니라 파도치는 풍경에서 일상과 비일상, 차이와 반복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할 때이다.


일상과 비일상, 여기에는 기준점이 없다. 무엇이 일상이고 비일상인지는 그날 그때에 달렸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이야기의 연속에서 일상은 삶이요 비일상은 죽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도중을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 텐데, 누군가에게는 죽어있는 도중이야말로 평시이며 그들에게는 비일상적인 게 ‘삶’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잔느 딜망>의 잔느가 살아가는 시간이 우리에게 ‘죽은 시간’이라고 불리더라도, 그건 그녀에게 삶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은 삶이라는 순간으로 죽는 셈이다. 이때 우리는 자궁 안에서 열 개의 과업을 마친 태아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 일종의 죽음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태아는 태어남으로써 삶을 얻지만, 그와 동시에 자궁 안에서의 아늑한 삶에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야말로 이것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잔느 딜망>의 죽은 시간이 단지 여성의 가사노동이라는 것에만 빗대어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잔느 딜망>을 페미니즘적인 무언가로 보는 건 그 자체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에 대해서는 못다 한 인용을 이어가야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오즈에게 바치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회화적 모습인데, 여기에 레지 드브레가 말했듯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앞의 관객에 따라 스스로 의미가 된다.”는 말을 첨언하면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변용할 수 있다. 먼저 <오즈에게 바치는 다섯 개>와 <잔느 딜망>은 느린 시간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회화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의미를 바치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무엇보다 <잔느 딜망>의 변주를 목격한다는 사실을 보증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죽은 시간만으로는 어떠한 의미의 체계가 될 수는 없다.


오즈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파도의 시작과 끝은 딱 잘라 떨어지지 않고 삶이라는 하나의 형태로서, 그러나 특정한 무언가는 아닌 상태로 존재한다. 이처럼 <잔느 딜망>의 죽은 시간은 딱 잘리지 않는 무언가로서, 특정한 무언가가 아닌 삶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이를 두고 삶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우리가 <잔느 딜망>을 두고서 가사 노동의 고됨이라던가, 조명되지 않았던 시간의 탈은폐화라던가 하는 거창한 담론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샹탈 아커만의 말처럼 그것은 그저 ‘나만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자궁 안의 소중함, 잉태의 신호이자 죽은 시간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성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잉태와 출산이라는 삶과 죽음에 관한 상반된 신호로 보는 게 더 낫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이기에 여성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카메라라는 독립된 개체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카메라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발명한 게 아니라 발견하여 이용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 영화를 다 알지 못한다. 시간도 그렇다. 그러니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세계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상이 카메라에 위협받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깨우침을 준다. CCTV와 같은 기록장치에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카메라라는 언어적 형태-이를테면 영화나 사진과 같은 영상 ‘언어’의 바깥에도 일상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샹탈 아커만은 시간의 형태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분명하게도 언어의 특성이 있지만, 비언어적인 무언가를 지닌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얼굴과 닮아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순간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블랙박스는 기록의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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