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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02. 2019

오즈 영화 속의 형식


1.


영화를 보다 보면 특정한 구도의 쇼트가 여러 부분에서 반복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곧 고도의 형식화라는 점으로 설명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형식이라는 말은 대체로 영화 기술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는 카메라의 프레임이라는 게 세계로부터 무엇을 가둘지 고민하는 역할이기 때문일 것 같다. 예컨대 전통적인 회화에서 형식이라는 게 프레임 안의 그림에만 한정되었듯이, 전통적인 영화에서 형식이라는 건 카메라 안의 포착물에만 한정되었던 것이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현대의 관점에서 영화는, 미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배치되는 간격이나 형태, 그것이 내걸리는 당시의 주변 상황 또한 작품의 형식으로 들여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영화는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고,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될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영화에 아우라가 생긴다.


이 아우라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말해왔던 벤야민식의 그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아우라가 원본으로서의 가치라면, 이는 디지털 시대에 전혀 적용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고 칭할 때, 정말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방금 본 게 정말로 대상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관념론이나 인식론이나 현상학의 관점이 아닌, 정말로 눈앞의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변해감을 의미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 현실이라는 단어조차 이전 시대의 사고에 기반한 것이므로, 훗날에는 지금 우리가 비현실이라고 여기는 게 현실로 여겨질 테다. 예컨대 사실 영화를 두고서 무엇이 현실인지를 논하는 건 장기적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 속 이야기가 훗날 현실에서 유사하게 재현될 때처럼, 우리는 동시진행형의 아우라가 순간을 판단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에 빗대어 영화를 판단하고 싶지 않아 한다. 영화를 예술로 생각하는 대부분 사람이 그를 객체로 여기고 싶어한다. 단순한 이유인데, 영화를 객체로 생각해야 우리가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나라는 주체를 통해 변형되는 주관적 세계 안에서도 꿋꿋이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다음 두 가지 정도로 이유를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영화를 객체로 바라보는 건 그를 보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이 사실은 영화의 입장을 무시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를 비평하기에 편한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영화를 객체로 바라보는 이유는, 변화하는 현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우리 삶은 항상 유동적인 변화를 겪는데, 그런 태풍 속에서도 고요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게 예술이라는 장치인 셈이다.


어쩌면 온실 속의 화초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에 따르면, 영화는 우리 뇌 속의 정지된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객관화는 곧, 이미지로 연결된다. 객관화라는 말 대신에 대상화라는 말을 써도 얼추 들어맞는다. 우리가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은 뇌라는 스크린에 그를 이미지로 전시해두는 것, 마음의 미술관에 그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회가 마련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을 테다. 마음의 미술관에 오브제가 점점 모일수록, 스크린에 그릴 미장센이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 우리가 영화의 이미지를 쌓을수록 그릴 수 있는 회화의 범주가 넓어진다. 이 확장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큰 화폭을 염두에 두게 된다. 이른바 큰 그림이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점점 소소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지만, 그것은 관점을 달리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우리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 하나씩을 발견하다 보면, 종국에는 그것들이 모여 어떤 형태를 이룬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소위 말하는 별자리인데, 이 별자리는 그 자체로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그걸 이루는 별 하나에도 이름이 있다. 아마 이게 우리가 뇌라는 우주, 그 스크린에 그리는 영화라는 이미지의 집합을 칭하는 모습과 유사할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의 입을 빌려 말하듯이 모든 별에는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다 알지 못한다. 이 우주에 빛나는 별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리 생각하면, 우리가 영화를 대상화한다는 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해 영화 모두를 품을 수는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 중 하나가 우리 품으로 들어올 때는 이름을 붙여주니 말이다. 즉 우리는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들 또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마주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완벽한 타인이 되는 건 아니다. 인연이 아닐 뿐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


2.


오즈의 영화를 설명하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늘 언급되는 것은 오즈 영화의 형식이다. 오즈의 영화는 반복되는 구도와 사람, 그 배치의 미묘한 균열 안에서 흘러나오는 차연을 중핵으로 사용한다. 어느 필자는 이를 두고 하이쿠와 같은 일본 특유의 정형성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아무쪼록 그런 형식이 자아내는 시대의 미묘한 분위기가 빠질 수 없다. 예컨대 오즈의 형식은 내러티브를 통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하이쿠와 같은 정형시에서 형식을 제하면 작품의 심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는 다르게, 오즈의 영화는 형식을 제하고서도 얼추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비교는 될 수 없겠지만 동 시기의 여러 여성-가족 영화를 생각하면 그 점이 확실히 다가온다. 쉽게 말해,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만들어진 엇비슷한 영화 사이에서 왜 오즈의 영화만이 특이하게 다가오는지를 생각하면 이야기에 답이 있으리라는 추론이 나온다.


오즈 영화 속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1934년의 <부초 이야기>와 1959년의 <부초>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후자는 전자의 리메이크작이다. 이것 말고도 1959년의 <안녕하세요>는 1932년의 <태어나기는 했지만>의 리메이크작이다.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오즈는 리메이크 작품을 거의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놨다. 이 변화에 대해 여러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사실은 암흑의 시대를 빛의 시대로 돌려놓았다는 점이다. 은유를 제하고 곧대로 말하자면,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가 되었고 흑백 영화가 칼라 영화가 되었다. 즉 형식이 변했다. 정확하게는 오즈가 평소에 영화를 만들던 카메라의 조합 또한 바뀌었고, 영화 필름 기술 또한 바뀌었는데 그럼에도 비율만큼은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전의 문장을 복기하면 오즈 영화에서 변하지 않은 건 ‘스크린의 비율’이라는 논제가 도출된다.


스크린의 비율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은 오즈의 고집이라는 표현으로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오즈 초기에서 말기까지를 살펴보면 변하지 않은 건 그것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사실 하나가 숨어 있는데, 배우 류 치슈 또한 초기부터 말기까지 줄곧 캐스팅되었다는 점이다. 오즈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초기에는 영화 전체에 조그마한 단역으로 나오던 류 치슈가 말년에는 주연으로 나온다는 점이기도 하다. 예컨대 류 치슈가 언제 나올지를 추론해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즈의 스크린 비율이 왜 변하지 않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배우만큼 형식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배경사항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오즈의 영화가 자아내는 반복과 차이 안에서 가족의 만남과 헤어짐에 균열을 찾는 중이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 균열에 힌트가 있다. 그게 무엇이냐면.


비율, 그 스크린의 테두리는 늙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 손상되어도 그 테두리는 온전하게 기억된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의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이는 형식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는 어떤 변주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형태로 설명될 수 있다. 또는, 그 반대로 이 형태가 그들의 변주를 모두 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오즈 영화에서의 변주는 무엇일까. 그건 가족의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금 연역. 가족의 모습이 모두 변하는 걸 품을 수 있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변화를 겪더라도 결국에는 가족이라는 말이다. 마침내 문장의 귀결, 하나의 세계를 이룸에 있어 중요한 건 변화가 일어나는 내부가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형태이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주기에 따라 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잡고, 가족의 형태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스크린을 보며 방향을 잡는다.


이런 추론을 따라가면 오즈의 신념은 가족의 유지에 있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오즈를 살펴보면 가족의 생성보다는 유지에 더 관심이 많기도 했다. 오즈는 연애는 했지만 독신으로 살았고,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때 여기까지는 흔히 해볼 수 있는 가정이지만, 가족의 가치를 아우라에 대입하면 흥미로운 가설을 내볼 수 있게 된다. 먼저 벤야민식의 아우라를 얘기해보자. 벤야민의 논의를 따르자면 가족은 오직 원본만이 제대로 된 가치를 지닌다. 이 가족은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 반복생산되면서 점점 가치를 잃어간다. 또는 한번 찢어진 가족은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이는 마치 손상된 피부에 흉터가 남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이 흉터가 찢어짐의 증표, 낙인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 이외에는 모두 비정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 가정이다. 왜냐하면 얼핏 보기에 오즈의 영화는 보수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는 전통적 가족상, 이상을 그리는 이들이 늘 있고 그것을 완성하는 게 주된 목표로 보인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야만 하고, 가족은 화해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즈의 영화는 그런 것을 의무로 설정하면서도 동시에 결여나 부재로 설정한다. 이 과정에서 중심으로 떠오르는 단어는 ‘보낸다’이다.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낸다(<꽁치의 맛>). 어머니는 아들을 도쿄로 올려보낸다(<외아들>). 모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넘겨 보낸다. (<도다가의 형제자매들>) 이 영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오즈에게 ‘보내다’라는 표현은 단지 물리적 힘에만 그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오즈에게 그것은 물리적 힘이 아닌, 물리적 힘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물리적 힘의 표현을 무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궤적? 이 단어가 주는 느낌도 얼추 들어맞지만, 아무쪼록 잔상이라는 표현은 어떨까. 이 잔상은 우리가 영화의 시초라 부르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도 발견한 바가 있다. 즉 영화는 순간의 궤적을 그리는 매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화살이 순간을 관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운동 이미지에는 시간 이미지가 수반된다는 점이다. 화살이 ‘지나가고’, 그 뒤에 시간에 따른 잔상이 남는다. 말하자면 운동 이미지는 하나의 형체라기보다는 다수의 총체이며, 그것을 추동하는 게 바로 시간 이미지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가 단어 상으로 정의하던 두 이미지의 면은 달라지게 된다. 사실은 시간 이미지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고, 운동 이미지는 겹겹이 싸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기만 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 점을 깨닫는다. 전통적으로 아우라는 원본의 가치였다. 그래서 원본은 시간하에서 단일한 운동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오즈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가족상은 원본이 아니라 시간하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 모습이란 매 순간 지정된 도식이 있고 그것들의 모음이 그들의 시간에 보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건 별자리와 비슷하다. 매 순간 지정된 자리가 있고 그런 순간에 별자리로서 관측되지만, 계절이 지나 절기가 달라지고 하루 중에서도 낮과 밤의 차이가 있기에 그들과 우리의 시간이 벌어진다. 쉽게 말해 별자리는 미술관에 걸린 회화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본의 가치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틀을 갖고 있느냐다. 그리고 그 틀은 맥락이자 관점이고 주관이자 시야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즈의 스크린이다.


3.


그렇게 오즈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대화 장면을 예로 들자면. 오즈가 선호했던 쇼트와 리버스 숏의 조합에서, 같은 자리를 고수한다는 것은 인물 너머의 카메라가 보이지 않도록 양쪽을 오가야 함을 뜻하는데, 생각해보면 전과 같은 자리에 카메라를 두어야 한다는 게 꽤 번거로운 일이다. 편집하면 그만이니 굳이 순행으로 찍을 이유가 없기도 하다. 대화하는 두 인물을 앉혀놓은 후, 한쪽이 하는 말을 계속해서 찍고, 다 끝나고 나면 다른 인물도 같은 절차로 찍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오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면을 보여주니 티도 잘 안 날 텐데 말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고집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오즈는 대화 장면을 찍을 때, 인물은 그대로 둔 채로 환경을 바꾸는 방법을 택한다. 잘 알려진 대로 오즈는 180도 규칙을 무시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건 편집에 의한 게 아니라, 책상 위의 꽃병을 다르게 배치하는식이었다. 예컨대 오즈는 대화 장면을 찍을 때 양쪽에 카메라를 두고서 환경을 바꾸는 방법으로 쇼트를 구분했다. 여기까지는 영화 장인의 한 면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편집으로 대화 장면을 만드는 여타 영화와는 달리, 오즈의 대화 장면은 시간이 무너지는 느낌이 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느낌에 대해 말하려면 오즈 영화의 형식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즈 영화의 형식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그것은 스크린의 비율이다. 이 단순한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가볍게 짚고 넘어가지만, 실은 그것이 우리가 영화 안에서 줄곧 목격하는 반복과 차이의 기반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오즈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이 아니었다. 오즈에게 중요한 것은 액자 틀에 걸려 박물관 벽에 걸린 채로 진중하게 모셔지는 아우라를 내뿜는 순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액자 틀이라는 하나의 형태가 가족의 순간을 규정하고 또한 그것이 하나의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오즈의 필로우 쇼트는 의미 없는 순간의 행렬이 아니고, 어떠한 시적인 의미체계의 함축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영화 장치이다. 예컨대 시간이 지났다는 건,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의미하고 마찬가지로 작품 속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즈의 영화를 두고 응원의 영화라고 해도 좋다. 그것이 오즈라는 사람의 고집이다. 오즈라는 이의 고집은 그런 운동 이미지가 실은 시간 이미지임을 깨닫고서, 운동 이미지의 미묘한 변형을 통해 그들의 시간에 완급을 부여함에 사용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을 뿐, 내용은 실시간으로 요동친다. 이런 모습이 오즈의 영화가 우리 시대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생방송이기에 실시간으로 인물의 연기 방법이 정해진다는 것인데, 어쩌면 그는 라디오와 티브이와 같은 생방송 매체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런 면에서는 오즈의 영화를 두고 시간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알랭 레네처럼 기억의 시간도 아니고, 사티아지트 레이처럼 민족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오즈 야스지로 본인이 말했듯이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반대로 말하면 드라마가 보여주는 게 특정한 이야기이듯이, 우리 삶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알랭 레네식의 변형을 첨가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삶은 스크린이라는 틀에 담긴다. 그 안에 바로 우리가 생동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즈 영화에서 형식이 내러티브를 통해 완성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발언을 다르게 보면 왜 굳이 시야 안에서만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느냐고 묻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 눈에 맺히는 상은 명백한 물질의 형태를 띤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걸 믿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물질적 응괴없이는 자각하지 못한다.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주름이다. 흔히 시간의 주름이라 표현하는 뇌간 사이의 흐름이 우리 얼굴에 관측될 때야 우리는 비로소 늙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주름이 언제부터 쌓이게 되었는지를 지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즈 야스지로가 말하는 주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은 것, 가까이서는 산맥과도 같지만 멀리서는 물결처럼 보이는 삶의 높낮이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현실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간-쇼트로 관측되지만 인간이라는 매체, 그 이야기 속에서는 명백한 시간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이 시간을 떠올리면 함께했던 이의 후각, 촉각, 지각적 심상이 따라붙게 되고 그것은 바로 물질, 운동 이미지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체험의 길에 들어선다. 이는 경험에 기반한 재현이 아니라 영화가 형식이라는 코드를 통해 우리에게 결과물을 출력하고자 하는 식의 코딩이다. 말하자면 오즈 영화에서 최대한 순간에 가까워지려는 것들은 그러한 프로그래밍의 일환이다.


180도 규칙의 무시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는 하나의 쇼트에 가까워진다. 이 파장이 멀어질수록 그들의 관계는 하나의 축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따금 그런 일렁임에서 벗어나는 감정의 골이 존재한다. 이때 감정의 일렁임이 우선인지 아니면 시간의 일렁임이 우선인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들의 삶이 휘청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러티브로 읽히는 게 아니라 시간 상의 그것이고, 그렇기에 스크린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가장 직설적으로 말하면 뚫고 나온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영화를 모르는 이라면 쇼트 간의 배치에 균열이 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런 사람이라도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컨대,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이때 그 일어남의 이미지가 ‘보낸다’라는 동적인 형태로 보이는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닐 듯하다. 왜냐하면 그건 물리적 힘이라기보다는 표현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오즈식의 이야기’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스크린과 카메라, 배우의 얼굴과 시선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예컨대 아우라라는 것은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이기에 나타날 수 있다. 얼굴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시점의 그를 만나더라도 그의 성격, 그 궤적을 지닌 개인의 인장이 그임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오즈 영화에서 배우에게는 자의식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는 작품 별로가 아니라,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여 생기는 배우로서의 자의식이다. 그러니 이런 느낌에 견주어 볼 때, 어쩌면 오즈는 영화라는 한 사람의 삶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은 드라마이고 그렇다면 오즈의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인생이다.


그 말인즉슨 오즈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형식 중, 대화 장면은 삶의 어떤 고지에서 우리가 겪는 시간 이미지처럼 보인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인의 삶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게 객관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실은 객관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영화가 그 자체로 객관화되기를 원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게 우리네 삶이랑 비슷한 면이 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말로 시간의 객관성을 설명하려 들지만, 우리는 그들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보아주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 그 시간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소리이든 종이이든 간에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그 이야기들은 사실, 우리가 직접 공감하고 체험함으로써 주체화할 수 있다. 예컨대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로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그런 것의 묘사에 불과하다. 우리는 정말로 시간을 보냈을까. 그들은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물질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스크린은 늘 정해진 비율로 그들을 담아둔다. 또는 보살핀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어찌 따스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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