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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1. 2019

오즈 영화 속의 가을


1. 


가을은 이상한 계절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지만 온도차가 그렇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밤까지 남아 우리를 괴롭혔다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냉기는 가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체감케 한다. 이 변화는 극적이어서, 자연의 신비함을 느낌과 동시에 더위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뜨겁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던 우리는,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쌀쌀함을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가을의 일교차란 너무 급격한 것이어서 우리를 감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감기에 잘 걸리는 일교차가 심한 시기를 두고 환절기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을 그대로 풀어쓰면 절기를 내보내어 다음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말을 두고서 영화에서의 디졸브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디졸브라는 건 쇼트 간의 전환이 ‘전자를 내보내어 후자를 들여오는 방식’으로 진행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선대는 사라지고 후대가 그곳에 자리하게 된다. 일종의 대물림이나 계승이라고 할 수 있겠고, 지질학으로 보면 오래된 지층은 퇴적되고 계속해서 층이 쌓여나간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디졸브라는 건 떠나보내는 동시에 마주하는,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계절’이다. 어쩌면 지질시대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질시대에 쌓이는 건 시간이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영화는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는 우리는 그 결말이 언제 올지를 알지 못한다. 미카엘 하네케가 <하얀 리본>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현재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2.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영어 제목은 ‘The End of Summer’이다. 직역하면 ‘여름의 끝’이라는 뜻인데, 작중 배경은 가을이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가을이라는 절기에 대하여 여름의 끝이라는 수사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을을 두고서 ‘여름의 끝’이라고 부르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가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열매의 수확과 같은 풍요로움이 먼저 떠오르지만, 여름의 끝이라는 수사를 사용하면 쨍쨍 내리쬐던 태양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식의 뉘앙스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의 온도차는 극심하다. 가을을 두고 그냥 가을이라고 표현하면 한국에서는 추석과 같은 명절이 먼저 떠오르는 반면에,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더위가 가셨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즉 전자는 풍요로움이고 후자는 안도감인데, 그것들은 각각 ‘곡식에서의 풍요로움’과 ‘날씨에서의 온도차’가 맥락적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러니까 일본어 원제와 영문판 제목에는 풍요로움과 온도차라는 두 가지 갈래로 의미가 나뉘게 된다. 


따라서 이 영화가 고하야가와 가문의 쇠락을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풍요로움과 온도차라는 두 가지 단어가 ‘풍요의 온도차’라는 맥락상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좋은 시절이 가버렸고, 낮에는 살갑지만 밤에는 쌀쌀한 ‘이상한’ 계절이 그들에게 닥쳐온 것이다. 그러니 골머리를 썩이던 집안의 기둥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가족이 내보인 반응이 미지근한 건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낮처럼 살갑게 웃을 수만도 없고, 밤처럼 마냥 쌀쌀하기만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3. 


누군가 고통없이 편안히 죽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두고 호상이라는 말을 쓴다. 죽을 때까지 고통받지 아니하고, 적어도 사망 당시에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기쁜 죽음’이라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말이다. 죽음이 과연 기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어느 노인의 장례식에서 조문객과 상주가 웃고 있다면, 아마 그들은 이것이 호상이라며 고인의 마지막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테다. 예컨대 여기서는, 죽음 자체의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당사자와 주변인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겨울의 모습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호상이라는 말은 죽음을 풍요에 대입하면서 단절의 힘을 남은 삶에 부여한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죽음의 온도차를 느끼게 된다. 즉, 사적으로는 슬프지만 공적으로는 기쁜 게 바로 죽음의 온도차이다. 마찬가지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찾아온 죽음은, 그들 가족에게는 슬프지만 사업적으로는 기쁜 일이라는 점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이것이 가을의 풍요로움이 아닐까 한다. 곡물을 수확하는 계절인 가을에서, 곡물이 맺는 열매는 한 해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해의 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예컨대, 결실을 수확하면 그해 농사는 다 끝난 것이다. 


아마 이런 온도차가 이 영화의 제목을 두 갈래로 나누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가족의 사업은 양조장인데, 양조란 건 균을 통해 술을 만드는 숙성작업이라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익힌다. 그리고 술이라는 건 낮보다는 밤에 마시는 일이 더 잦다. 즉, 술이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 더 자주 마시게 되는 음료라는 점을 생각하면. 슬픔은 밤에 무르익는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곡식이 무르익은 가을이 지나고 나면 삭막한 겨울이 온다. 즉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그렇다면 그들의 장례식이 치러진 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걸까? 


4. 


그렇지 않다는 게 오즈의 대답이다. 우리는 오즈 영화에서 대다수 아버지가 퇴근길 술집에 들른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쇼트는 대부분, 낮의 술집 간판을 보여주며 술집 시퀀스로 들어가는데 반대로 나올 때는 밤의 술집 간판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술집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오즈 영화의 특성상 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술집에서 보내는 낮과 밤을 두고 온도차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족 이야기야말로 오즈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이 보여주는 삶의 온도차는 희로애락이 아니라 그 중심부의 공백기, 술집에 관한 이야기다. 예컨대 오즈는 ‘태어난다’와 ‘죽어간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가운데의 ‘살아간다’는 말을 택한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오즈 영화의 진정한 이상함이 아닐까 한다. 오즈 영화에서 죽음에 해당하는 관계의 단절은 초기작부터 익숙하게 목격되어왔지만, 그것들 모두가 죽음 이후의 삶, 이를테면 환생과 같은 종교적인 요소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점이 그러하다. 술집에서의 담소가 끝나면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마치 다음 날 아침이 온 게 아니라 오늘의 아침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예컨대 낮과 밤에 온도차가 있다면, 시간을 제하고 남은 온도만이 유유한 곡선의 형태로 오르내리는 듯한 느낌이 그곳에 있다. 


그러니 이건 다른 의미에서의 폐쇄된 시공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오즈의 시계는 하루를 기준으로 밤에서 낮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 신기하게도 오즈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열차 또한 차고지로 들어가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데, 열차는 앞뒤 구분이 따로 없기에 오던 길을 되돌아갈 때 그 시간은 ‘머리를 돌리지 않는’ 게 된다. 낮과 밤이 열차의 시작과 끝이라면, ‘살아간다’를 강조하는 오즈의 영화는 열차의 운동 이미지,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고 보아도 될 테니 말이다. 이게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허우샤오셴이 만든 <카페 뤼미에르>의 주요 논지다. 


5.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차분하다. 이는 <안녕하세요>나 <낙제는 했지만>과 같은 명랑 영화를 제하면 대체로 공유하는 오즈 영화의 특징이다. 그런데 영화는 손자와 숨바꼭질을 하던 중에 몰래 집을 나간 가장이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온도의 하락을 겪는다. 말 그대로 영화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다운되면서, 영화의 제목이 왜 가을을 지정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요컨대 그것은 한낮에 이루어지는 급격한 온도의 하락, 낮에 밤이 찾아오는 형태를 취하는 듯 보인다. 


낮에 밤이 찾아온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동경 이야기>의 그 유명한 쇼트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동경의 황혼>에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면 이런 밤의 차가움을 반대로 해석하는 또 다른 밤의 차가움, 결혼을 통한 이별이 오즈 영화 곳곳에 자리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끝에서 그 단절을 봉합하거나 봉합하려고 시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꽁치의 맛>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딸을 결혼시킨 후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사과를 깎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사과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카메라는 다음 쇼트로 넘어간다. 이 쇼트를 보여준 후 영화는 종료된다. 이 잠깐의 절차를 통해 영화는 아버지를 위로한다. 그러니까 사실 오즈의 영화가 어떤 단절이나 죽음을 말하든 간에, 위로를 전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휴머니즘이자 보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하야가와가의 가을>는 그렇지 않다. 다른 구조는 다른 영화와 거의 동일한데, 딱 하나가 다르다. 그것은 바로 오즈가 위로를 전하지 않는 최초이자 최후의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굴뚝을 클로즈업하는 쇼트로 모든 것을 환원해버린 후에 아버지의 장례 행렬을 보여준다. 이 굴뚝은 그동안의 오즈 영화에서 도심 곳곳에 세워진 공장을 통해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일자리와 산업화라는 나라의 심장 그 아버지의 생전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굴뚝은 화장터의 매연을 뿜어내는 산화로서의 연기를 내뿜는다. 말 그대로 모든 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오즈는 화장 뒤의 장례행렬을 덧붙이면서 이러한 결말에 쐐기를 박는다. 그렇게 영화는 끝나버린다. 


6. 


오즈의 이례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오즈의 <바람 속의 암닭>이나 <오차즈케의 맛>이 오즈가 말하는 결혼 생활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지만, 결국에는 행복으로 귀결되기에 그것은 긍정론이다. 또는 <피안화>처럼 부정으로 시작해 긍정으로 향하는 오즈의 긍정론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불행만을 노래하는 듯 보인다. 오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렇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무렵에 오즈의 어머니는 암을 선고받아 투병 중에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죽음의 그림자가 아닌 죽음 그 자체라는 점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즈의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이 개봉한 1961년으로부터 1년 후, 그의 어머니 아사에 오즈는 사망에 이른다. 이에 오즈는 비통한 마음으로, 생애 최초로 부모가 자녀를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떠나보내는’ 식의 영화를 구도를 달리하여 찍는다. 그게 바로 <꽁치의 맛>이다. 


이른바, 쇼트-리버스 쇼트인 듯 보이는 리버스 쇼트- 쇼트이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미 답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유언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유언은 삶을 등질 것을 예견한 상황에서 그 뒤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작성하는 ‘후천적 대답’이다. 그 유언은 봉투에 넣어 봉인되고, 사망한 후에 유가족에게 전달될 것이다. 예컨대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이 오즈의 유언장이라면 <꽁치의 맛>은 유언장이 적혀지기를 기대하는 그 도입부의 첫 글자이다. 다시 말해서 <꽁치의 맛>은 오즈 자신이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작성한 자신의 유언장을 스스로 개봉하는 듯 보이는 영화다. 그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이 유언장을 작성했고 개봉시켰지만,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즈의 시대에서 유언장이라 함은 아무래도 전쟁 이야기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꽁치의 맛>은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게 주된 이야기이고 이것은 그동안의 영화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즈는 그의 페르소나인 류 치슈에 직접적으로 이입하여 어머니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과 이별할 준비를 한다. 정치와 생활을 엮는 게 떨떠름하지만, 이 영화에는 오즈 식의 ‘살아가다’를 말하는 술집에서 군함행진곡을 부르면서 그것을 떠나보내는 과거와의 이별이 담겨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대목은 오즈 영화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전쟁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시퀀스이기 때문이다. 


7.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는 고집불통인 가부장적인 사람으로 나온다. 그의 사업은 젊었을 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하여 가세가 기울고 있다. 이때 그 누구라도 이 모습이 전쟁을 수행한 기성세대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비록 전쟁과 관련이 있는 업종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오즈는 그들이 돌아와서 가볍게 떠드는 장소인 술집에 들어가는 술을 만드는 직업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말 그대로 오즈는 전쟁과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았었다. <동경 이야기>에서 사라진 아들도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정황상의 증거로 제시되었었다. 그런데 <꽁치의 맛>은 그걸 적나라하게 말하고,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은 적나라하게 죽여버린다. 오즈의 다른 영화처럼 후일을 기약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그냥 끝나버린다. 


말하자면 일본의 보수적 시대의 대표격인 오즈 야스지로가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속한 과거에 손수 종언을 선사한다는 점이 이 영화를 슬프게 한다. 일본의 전쟁사관에 대해 오즈가 직접적으로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속한 자신을 스스로 죽여버린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살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 영화를 찍으면서 정작 가정을 꾸리지 않은 오즈에게, 가을의 풍요로움에 해당하는 자식이 없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겨울로 직행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세 개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오즈에게는, 총알이 빗발치는 곳이 아니라 어머니가 사망한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아마 오즈의 죽음은 이미 이 시기에 예견되어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이 곧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 증거로 오즈는 어머니의 생전에 미리 자신의 유언장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자신 이후의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여운을 남겨두었다. 이 여운은 유언장을 개봉하는 동시에 불려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즉, 필모그래피 전체로 보면 오즈는 그동안의 영화처럼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뒤에 <꽁치의 맛>을 배치함으로써 그의 영화에는 완전한 끝-겨울이 오지 않는다는 공식을 유지한 셈이다. 그래서 <꽁치의 맛>은 오즈 세계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에서처럼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는, 오즈 식의 시네마적 헌사이다. 비록 그 자신은 죽었지만, 이 열차는 계속해서 세상을 달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태어난다’와 ‘죽어간다’의 사이에는 ‘살아간다’가 있고, 그것이 오즈의 영화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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