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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5. 2019

산책하는 침략자가 살아있는 지구 최후의 밤


1.


구로사와 기요시는 평소에도 기괴한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만든 영화 중에 <산책하는 침략자>라는 SF 장르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이름을 떼고 나서도 그렇게 잘 만든 편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설정이 흥미로운 면이 있어 이번에 살펴보게 되었다. 먼저 이 작품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외계인이 한 명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의 번식(?!)방법은 인간에게서 ‘개념’을 섭취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개념을 섭취하고 나면 껍데기만 남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게 그들의 동료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메커니즘에 대해 영화는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가 그걸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품의 주제의식은 외계인이 아니라 개념을 앗아가는 이방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구로사와 기요시의 아이디어는 1940~ 60년대 미국의 반공영화에서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라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최초의 반공영화의 아이디어가 이것과 비슷하다. 이 영화에는 외계인이 문득 알의 형태로 날아오는데, 알에서 나온 외계인은 놀랍게도 우리 주변 누군가의 모습과 판박이다. 그리고 이 설정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사실은 ‘빨갱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평소 내가 알던 사람이 영혼 없는 상태로 흐느적거리면서 다가오는데, 나도 그렇게 얼빠진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예컨대 그런 유사 좀비 상태에 놓이는 건 나 자신이 신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비주체의 상태가 뉴스가 아닌 바로 내 주변에서 벌어진다는 점이 이 영화의 포인트다.


나와 닮았으면서도 나는 아닌데 감염되면 내가 아니게 되고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좀비의 모습으로 표현되면서 조지 로메로의 그것처럼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전달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그런 일이 나에게 닥쳐온다는 것이다. 영화에 관객을 이입시키려는 이유도 있겠으나, 이런 영화에서 대부분은 주인공 홀로 멀쩡하게 살아남아 좀비화되는 주변 사람을 때려죽이고는 한다. 그리고 여기서 대두되는 주인공의 고민은 생전에 알던 이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이웃, 나와 함께한 추억이 있는 이를 직접 때려눕히는 게 인간의 윤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윤리를 배반하는 건 곧 ‘개념없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져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위에서 우리는 <신체강탈자의 침입>과 같은 장르에서 이방인은 ‘개념이 상실된’ 상태로 여겨지기에 공포의 대상이거나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들 영화에선 개념이 상실된 것은 때려죽여도 무죄라는 말이 성립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말하는 ‘개념상실’의 논리와 연결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확언이 아니라 ‘모른다’는 꼬리로 남은 건, 소위 말하는 버르장머리라는 게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평가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는 탓이다. 예컨대 개념이 없다는 말에서 그 개념이 어떤 사회에서 어느 맥락으로 사용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오늘날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맥락 그대로는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정도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빨갱이라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사용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지킨다. 그들을 욕하는 게 곧, 자신이 개념이 없다는 걸 드러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다시 말해서 개념없는 이를 욕하는 게 개념없는 행동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다변화되고 서로를 존중하는 쪽으로 나아가면서 개념이라는 것의 명확한 기준이 사라졌기에 우리가 그걸 함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로 다시금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지구에 온 외계인, 이것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대에서 온 설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념을 흡수해 자신의 동료를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기존에 아는 것과 달라진 설정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에 걸맞은 이방인이기도 하다.


2.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외계인들은 타인의 개념을 갈취해 그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만든다. 말 그대로, ‘개념없음’이 ‘개념이 부족해서 그것을 욕망한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모습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갈망하는 개념이란 건 그들 자신에게 부족한 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은 군체의식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누군가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갈취하면 다른 이는 용기라는 개념을 갈취하는 식으로, 각자의 역할대로 행동하면서 종국에는 개념들을 모아 우리 사회에 녹아들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이 되는 게 목표일지도 모른다.


개념을 모아 하나의 개념 찬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 혹은 그렇게 ‘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육체가 아닌 관념의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기요시의 외계인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그들을 개념없는 것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함이라면,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것은 그렇게 나쁜 행동이 아니지 않는가? 이 대목에서 도드라지는 건 외계인 무리와 동행하는 기자의 모습이다. 이 기자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는 파인더 안을 늘 꽉 채우고 싶어하는데, 이 채움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개념없는 행동이 될 수도 있고, 이런 맥락을 따라가면 ‘찍는다는 것’은 ‘개념이 없다는 공허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 된다. 즉 포착이란 건 사냥과도 같다. 또한 개념을 섭취한다는 건 본능적인 행동이 된다.


어쩌면 이 부분이 좀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을 듯하다. 과거의 이방인이 좀비였다면 현대의 이방인은 프랑켄슈타인이다. 누군가는 팀 버튼의 <가위손>을 떠올릴 이 모습에서, 우리는 개념의 가치가 신체에서 관념으로 옮겨가는 것을 목격한다. 예컨대 현대 사회의 개념이란 신체에 종속되지 아니하고 공기 중을 부유한다. 이때 또 다른 누군가는 바로 이것이 포스트 모던의 풍경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갈가리 찢어발겨 지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분쇄 사회에서 우리가 그동안 알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던가. 이에 대해 아즈마 히로키는 그것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시대의 개념은 점조직의 형태로 곳곳에서 이행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타쿠 문화를 예시로 든다.


오타쿠 문화는 특정한 관심사에 여러 사람이 들러붙은 형태로 진행되는데, 그러면서도 거대 담론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라고 아즈마 히로키는 말한다. 예컨대,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흥미가 있고 그 외의 것들은 외면하거나 무시한다. 그리고 이 모습을 거시적으로 살펴본다면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처럼 보일 것이다. 쉽게 말해 이들은 물이라는 한배를 탔지만, 응집되는 성분이 명확하여 그들 각자의 기름방울에 머무른다. 이들은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섞이지 않을 테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두고 큰 사회에 참여하지 않은 작은 사회의 것들이라 부르지만, 크고 작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굳이 큰 사회에 참가해야 하는지조차 그 발상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방금 발언이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대략 예상이 가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걸 권하고 싶다. 과연 무엇이 큰 사회인가? 다시 말해서, 크고 작음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는가? 누군가에게는 지구온난화라는 지구 차원의 담론이 사회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보통의 사람에게는 자국의 이야기만이 사회 전체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가족의 이야기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흥미롭게도 이 모습은 나이에 따라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서,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개인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젖꼭지만이 세상 전부이다. 그 젖꼭지는 자신의 젖줄이자 시야이기도 하며 심리적 토대이기도 하다. 당연하지만 이때 우리는 아이에게 편협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성인이 마마보이가 되어 나타나면 욕을 먹을 일이 된다.


이때 마마보이가 욕을 먹는 이유는 자신이 제 몸을 가눌 수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제 몸을 가눌 수 없다면 부모에게 의탁해도 되는가? 이 물음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위에서 언급한 이방인과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개념이 없는 것들은 늘 몸을 제대로 거누지 못했다. 그들은 좀비이거나 외계인이었고, 개념이 없기에 개념 있는 우리로서는 때려눕혀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개념을 충족하려는 욕망이 있었고, 이에 따르면 마마보이는 신체를 가눌 수 있음에도 부모에게 그걸 의탁하는 것이니 개념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념을 아웃소싱한다고? 이 이상한 의문에 대해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기자의 카메라는 욕망을 포착하는 도구, 어린아이에게 과제로 주어진 곤충 채집 과제의 채집망과도 같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그렇게 포획한 욕망을 다시 풀어주리라는 추론 또한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아마 작중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이 멸종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 개념은 외계인의 도래와 함께 포착되었으며, 그들이 사라지면 그들의 신체에 종속된 개념 또한 자유로이 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체가 사라져 가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 신체에 의탁하는 외계인의 종말은 사실상 예견된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탈신체화의 경향 속에 신체에 개념을 연결짓는 행위는 신체의 종말과 함께 개념을 멸종시키려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생각을 반대로 하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만약 이 외계인들이 개념을 욕망했던 게 사회에 섞여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개념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라면? 예컨대 그들이 약탈자가 아니라 찬탈자였다면? 여기서 우리가 찬탈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정당한 방법이 아니어서다. 이 외계인들은 말 그대로 선거와 같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 쿠데타라는 가장 확실하면서 직렬로 행하는 왕위 찬탈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개념을 ‘섭취’한다는 인간 본연의 ‘금기’를 ‘카니발리즘’의 형태로 행한다. 이것은 프랑켄슈타인처럼 잘린 신체의 부활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관념의 형태이기에 그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우리는 이들이 점조직의 형태로 전체 사회 안에서 독립적으로 실존한다고 말했었다. 이른바 오타쿠다. 이 단어가 당신이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면서, 우리의 맥락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따른다. 만약 오타쿠가 정말로 우리 사회의 거시 담론에 관심이 없다면 이 이방인들이 우리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예컨대, 우리는 오타쿠라는 생명체를 두고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 몰두한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평소에 생각하지는 않았을련지. 다시 말해서 어쩌면 <산책하는 침략자>는 침략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우리 사회를 거닐던 오타쿠들이 아니었을지.


그들은 특정한 개념 하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개념을 섭취 당한 이들은 개념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이 모습은 명백하게 개념을 흡수해가는 모양새지만, 반대로 그들이 개념을 흡수해서 노아의 방주처럼 보존해두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과연 우리 별을 헤치는 건 누구이겠냐고 우리는 묻게 되는데, 이때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여러 매체가 있다. 그러니 이 상상은 이쯤에서 잠시 접어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 논의를 어떻게 보면 오타쿠들이 세상을 구한다는, 개념이 분화하는 사회에서의 주특기를 내세우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을 점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제목이 <산책하는 침략자>라는 점에서 그들이 걸어 다니면서 본 풍경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풍경이라는 말은 대체로 한적한 느낌을 주지만, 주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풍경이란 늘 그곳에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에 따라 풍경의 경도가 정해진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때 그 풍경에 경도가 있다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신체일 것이며, 신체란 게 사라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현대에도 <신체강탈자의 침입>처럼 우리의 친근한 이웃이 사실은 개념이 사라진 누군가라는 점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개념을 욕망하는 그들과 개념없이 행동하는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영화는 그런 차이점을 부여하기 위해 신체능력의 강화를 그들에게 부여했지만, 실은 이 신체가 개념을 욕망하는 것과는 별다른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카메라에 포착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카메라는 개념을 포착하는 도구인데 카메라에 찍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카메라에 찍히는 걸 싫어하기는 해도 찍힌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모습이 마치 개념이 없는 것들이 개념에 대항하는 걸 경계하는 우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또 다른 이웃인 중국에서 비건이라는 신인 감독이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꿈에서조차 이방인으로 남게 된 한 남자가 이제는 추상으로만 남은 개념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실은 그 꿈 자체가 거대한 관념, 어떠한 개념의 이미지화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지만. 심지어는 그가 직접 쫓는 아내조차 개념으로만 남아서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면 모두 아내라고 인식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그는 이곳이 꿈속이기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진 것일까? 아니다. 이곳은 개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는 개념의 세계에서 개념이 없는 세상으로 넘어왔다. 개념을 찾아서 말이다. 이 속에서 그들의 신체는 허공에 붕 떠오르고, 여인을 안은 남자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 카메라는 허공을 비춘다. 말 그대로 이 카메라는 아예 신체를 묘사하는 걸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관념론이니까. 그렇지만 그가 여기로 도피해온 것은 아니다. 찬탈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한다. 이것이 구로사와 기요시와 비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비건의 산책과 기요시의 산책은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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