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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0. 2019

있다 간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한 장면 © 티캐스트


1.


영화 비평에서 중요한 게 영화 안의 텍스트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기본적으로 영화란 우리 삶의 제언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는 상황이 그렇다. 만약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베네치아 영화제에 가서 보았거나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보았다면, 당신은 아직 안나 카리나가 살아있을 때 이 영화를 본 게 된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가 12월 14일 쯤에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의 사망 소식을 품에 안은 채로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가 죽었다.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안나 카리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우리가 영화를 공부할 때 배우는 역사상의 이들 중에 몇몇은 아직 살아있고, 지금 이 시기는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때라는 점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꽤 기묘한 느낌을 준다.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로,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들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았던 시대의 마지막 장이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결국에는 전설이라는 용어에 관한 게 된다. 보통 우리가 아는 전설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그런 이유로 아직 살아있는 이에게 전설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엄청난 찬사가 된다. 이른바 ‘살아있는 전설’, 이것은 우리가 전설이 되고자 할 때 그 결과를 눈으로 목격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를 다르게 말해 산 자에게는 기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산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


2.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주된 줄거리는 늙은 여배우와 젊은 딸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작중에서 늙은 여배우는 살아있는 전설로 취급받으며 이제는 막 회고록을 쓸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딸에게는 그저 평범한 엄마에 불과하니 시시컬컬한 일로 늘상 대립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늙은 여배우는 이제 자신은 퇴물일 뿐이라며 자잭하는데, 그런 모습에 진심어린 위로를 건네는 건 오직 하나뿐인 딸뿐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모녀관계라는 가족주의적 테마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 이야기는 모녀관계가 아니라 사제관계로 보아도 흥미로운 면이 있다.


회고록이란 살아있는 이가 지난 삶을 떠올리며 적는 게 기본 틀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상대로 그를 추모하는 이가 작성해도 별 상관은 없다. 여기서 핵심은 그런 기록이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작성했을 때 너무 사실을 크게 왜곡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는 숨기고 싶은 게 있을 수 있기에 저자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때 책을 보는 불특정다수의 독자가 아니라, 저자의 삶에 직접 연관된 이라면 그런 기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테다.


영화가 파비안느의 회고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흩어보면, 대체로 그들은 가족임에도 가족처럼 대우하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말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가족 사이에서는 최대한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가족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테다. 그런데 이 중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조금은 더 특별한 면이 있다. 일단은 어머니와 딸이라는 여성 간의 관계가 있고, 전설적인 배우와 그런 배우를 선망했던 배우 지망생이라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관계는 각각, 스승으로서의 어머니와 제자로서의 딸, 배우로서의 어머니와 매니저로서의 딸이라는 독립항을 만들어낸다.


3.


사제관계라는 부모자식 사이, 지원자와 라이벌이라는 부모자식 사이. 이러한 테마는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그렇지만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고레에다가 처음으로 찍은 해외 영화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도 그러한 테마가 얼추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같은 감독이기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또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부모자식 사이는 거기서 거기라는 말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해지거나 모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집안에서는 너르고 편한 가족의 모습이지만 집 밖에서는 엄청난 스타이거나 거물인 때가 있다. 이는 자식이 부모의 직장생활을 모르는 것과, 부모가 자식의 학교생활을 잘 모르는 것과 유사하다. 즉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가족이라는 관계만이 남고 사회적 관계는 옅어지거나 삭제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가족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방패이거나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 그 가족이라는 것을 일종의 이공간으로 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들은, 그 테두리 바깥을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다소 힘든 것들이 많다. 예컨대 ‘가족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의 범주는 생각보다 꽤 넓다. 그렇지만 그렇게 넓은 만큼 세밀한 관계의 밀도까지를 살펴보지 못한다. 이 부분이 영화 제목에서 말하는 진실의 정의와 맥락이 닿는다.


4.


전통적인 측면으로 보면 가족 중에서도 가족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지위가 있고, 핵가족화가 진행된 현재에 그 역할은 주로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한 명에게 주어진다. 가족 내에서는 파비안느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가족이 편하게 지낼 공간을 만들어준다면, 반대로 가족들이 파비안느라는 사람에 대해 무언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 가족의 범주에는 파비안느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양으로 보면 가족이라는 보따리의 매듭이 파비안느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이 담론의 영화적 변주를 실현해보자. 영화에서 스크린 안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촬영하는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만, 편집을 통해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된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영화는 사실 조각난 시공간의 모음집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우리는 왜곡된 상을 그리도 자연스럽게 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때 스크린은 그런 왜곡이 벌어지고 묘사되는 이공간이 된다. 말하자면 스크린이라는 것은 가족의 정의와 닮아있다.


이 스크린이 아니라면 정당화되지 않을 일들은 많다. 또한 스크린이라는 것은 다양한 시공간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스크린은 당장은 한 면이지만 동시에 여러 각도로 존재한다.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매체의 형식으로 심층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그림이나 사진의 단면성이 순간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다면, 영화의 심층성은 편린이라는 이름의 조각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위의 비유에 따르면 가족이라는 것은 이질적으로 조각난 상태이지만 그 안에서는 해당 사실을 눈치채기 힘든 울타리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견인하는 것, 하나로 갈무리하는 역할이 바로 파비안느이기에 이 영화의 카메라는 파비안느의 그것에 대응한다. 이런 가정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카메라가 스크린을 응시하는 방식이, 영화 안의 설정과 공명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파비안느가 자신에 대해 쓴 회고록은, 영화의 관점에서는 카메라가 자신을 촬영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파비안느의 직업이 배우이기에 현실과 실재가 마땅히 구분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자신이 바라보는 게 현실인지 실재인지를 마땅히 구분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 것을 솔직하게나마 적어둘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5.


현실과 실재의 관계는 다소 따분한 철학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그러하고,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배우라는 직업으로 바라보는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딸의 남편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데, 이 대목에서 딸이 꾸린 가족은 카메라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위가 밖으로 밀려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카메라 안에서도 중심으로 잡히지 않고, 언어로도 분리된다면 그것은 필시 의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하고 싶었다는 게 된다. 파비안느의 남편조차도 카메라 안에 길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직 파비안느와 딸만이 카메라 안에서 정중앙에 자리할 수 있다. 이 형식 자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포커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변부에 무엇이 자리하는지를 목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녀관계이지만 사제관계이기도 한 이들의 모습에서는, 가족이라는 정의의 두 가지 형태가 도출된다. 첫 번째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고, 두 번째는 마음으로 이어진 가족이다. 그리고 이때 피라는 게 유전자와 같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연결이라면, 마음이라는 것은 비육체적이고 간혈적인 연결일 테니, 모녀 사이에 부재하는 것은 후자 쪽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연결이 영화에서의 가시이자 리니어라면, 우리가 아는 가족의 역사란 있는 그대로 보이는 듯해도 사실은 조각나있다. 우리가 가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집 안에서의 이미지가 바깥에서도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안과 밖이 같을 수도 있다. 집 안에서도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집 안에서는 편하게 지내되 집 밖에서는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는 격식을 차리기 마련이다. 영화가 가정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에 관한 잡다한 논설이다.


6.


본래라면 이 글은 여기서 끝났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안나 카리나에 관한 이야기가 남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안나 카리나는 영화사의 한 시기를 풍미했고, 그 후로도 전설로 회자될 만한 배우였다. 그런데 여기서 안나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로서의 연기만큼이나 인간으로서의 사설이 많았다. 소위 말하는 트리비아나 스캔들이라는 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안나 카리나라는 인간보다는 안나 카리나라는 소문 자체가 더 인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예컨대 인간에게 그림자가 있다면 인간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응될 수 있을 텐데, 본상 없이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카메라에만 포착될 때 존재하는 인간이 바로 배우라는 직업이다. 이렇게 나열한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배우의 존재란 배우라는 직업의 가치이다. 쉽게 말해 배우라는 인간과 배우라는 인격은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설 때 배우라는 인격은 수면으로 올라온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카메라 밖에서까지 배우의 인격을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삶 전체가 배우라는 인격일 경우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연기하는 쪽이 아니라 바라보는 쪽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어떻게 설명해도 결국에는, 영화를 두고서 거짓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스크린 안에 있는 배우의 모습은 기본적으로는 거짓이다. 즉, 기본적인 부분이 아닌 곳에서는 진짜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몸담은 곳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현실에서부터 자신이 방문했던 곳으로 차례로 사라져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감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배우는 작품 속에서 불멸한다고 말하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현실에서 죽은 인간은 작품 안에서도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무관한 현상이다. 당장 수백 년 전의 그림을 보아도 우리는 그림 안의 이들이 누군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격은 지워지고 캐릭터만이 남는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지금 심영이라는 인물을 언급할 때, 고자라니라는 단말마를 말하지 심영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7.


안나 카리나가 죽었다.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가 죽은 게 아니라 안나 카리나가 죽었다. 안나 카리나는 죽음을 기점으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족이라는 게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형제자매가 모이는 일이 그나마 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들 잘 만나지 않게 된다. 사이가 서먹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날 기회가 없다. 영화로 말하자면 카메라가 목격한 장소에서는 시선을 통해 특정한 담론이 피어나지만, 카메라가 떠난 자리에는 그 이전처럼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있다가 간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모녀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할 테지만, 영화가 남기는 것은 그 후이다. 영화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를 보면,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영화에서 나왔던 파비안느의 모습이 다른 시점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 안에서는 파비안느 개인의 시점이던 것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끝에서 파비안느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바뀐다. 이 사족에 대해 우리는 본편이 끝나고 나서이니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또는 맥락 그대로, 파비안느가 홀로 걸을 때 사실은 그녀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엮던 파비안느라는 매듭도 사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배우로서의 파비안느가 있고, 어머니로서의 파비안느가 있다면,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둘 중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걸까. 둘 다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있다. 영화가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채로 남은 파비안느라는 캐릭터이다. 어느 산책길을 강아지와 거니는 노년의 여인, 본편에서는 근접해서 촬영했기에 강아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나왔지만 엔딩 크레딧에서는 그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배우라기보다는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삶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가족 안에서는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에 불과한 것들이 사회로 나가면 한 사람의 성인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일본이 아닌 프랑스 영화로 촬영된 것은, 공간만이 아니라 공간에 담긴 사람들의 시간조차도 바꾸어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캐릭터를 지칭하는 것과 유사하니 말이다. 분명, 지구촌 시대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사람들이나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깨닫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공간 자체가 갖는 정경은 가족의 시간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논설이 되는 것 같다. 인간사에서 가장 좁은 그룹의 형태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 일을 제 일처럼 여기게 되는 게 바로 가족의 범위이고, 이는 곧 우리가 여러 매체에서 보는 이야기를 가족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영화의 가족은 티브이 안의 가족들 모습은 무시하면서도 현실 모습을 두고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미디어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은, 배우고 싶어요(Be Actress)라는 말로 줄여 쓰는 게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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