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an 03. 2020

소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1. 


오즈의 영화를 생각할 때면 마음속 어딘가에 슬픔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개인에 따라 감상은 다를 테니 그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될 것이지만, 확장되는 세계 안에서도 자신은 여전한 개인으로 남아있고자 한다는 점이 나에게는 유달리 깊게 다가온다.


일본의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영화의 다수가 소시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인프라가 중앙을 점거할 때 그곳에 있던 자잘한 것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게 도시화의 주된 경향이라는 점에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던 일본의 1900년대는 귀촌향도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프라의 이동이 급격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1900년대 초반 영화도 (영화라는 매체가 으레 그렇듯) 일본이라는 나라의 상황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이라는 외부세계의 특수상황이다.

 

일본의 1900년대 초는 도시의 확장과 군국주의의 확장이 맞물려 이루어졌다. 다르게 말하면 도시의 확장으로 인한 소시민의 삶은 군국주의의 확장으로 인한 소시민의 삶이기도 했다. 소시민이 뭉쳐 하나의 도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소시민의 이야기는 곧 도심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소시민 개인은 생업에 종사할 뿐이지만 그것들이 한데 어울리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협업이 된다는 점에서 소시민의 이야기는 전쟁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예컨대 1900년대 초 일본의 소시민 영화는, 이야기의 전개가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뿌리가 전쟁의 시대에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소시민의 이야기에서 시대적 경향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의 바깥쪽에 전쟁의 과오가 있다는 점은, 도시화의 경향에 미루어 생각할 때 그들이 과오로부터 밀려난 잔해처럼 느껴지게 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일본의 근대 소시민 영화라는 것은 외곽 지역의 삶이 아니라, 시대로부터의 자구책을 꾀하는 이들의 소모임으로 읽혀질 수 있다. 쉽게 말해 소시민 영화라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으로도 그렇지만, 시대적 경향에 견주어 보아도 중앙으로부터 밀려난 것이라기보다는 중앙이 아니기에 보존할 수 있는 본래의 삶처럼 보이는 감이 있다는 것이다. 


2. 


이러한 시선으로 일본의 1900년대 초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자칫하면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이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만드는 것임을 몰랐다 하더라도 시대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연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소시민 영화라는 형식을 취할 때 그 책임의 여부는 달라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책임은 여전히 있지만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에는 그것이 없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것만으로 민폐(迷惑)를 끼치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살아가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존재가 우리와 말이 통한다거나 한다면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존재와의 소통이 불가하거나 원활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그에게 무언가 책임을 묻기는 (도의적으로) 어렵다. 단지 그렇게 태어난 것뿐인데 자신처럼 살아갈 뿐인 것으로 무언가 책임을 묻는다면,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죄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죄를 묻는 것처럼 된다. 용례야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그 둘은 그들 세계의 외부 관찰자인 우리와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법칙이 통용되는,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만의 잣대일 수도 있음을 돌이켜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전쟁의 시대를 사는 소시민 영화에서 어떤 경로로든 전쟁이 언급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 그게 소시민들의 전쟁 참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오즈의 영화에서도 전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접적으로 언급된 바가 있다. 1930년의 <그날 밤의 아내>는 형사 추리물의 형태이지만 이 영화에서의 암부와 경찰조직은 7년 뒤에 있을 중일전쟁을 미리 예견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오즈가 만든 ‘~했지만’ 시리즈, <대학은 나왔지만>(1929), <낙제는 했지만>(1930),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들은 모두 외부에서의 전쟁과 본토에서의 평화가 이루어지던 해당 시기의 일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영화에서는 각각 직장, 대학, 가정이라는 그룹의 안팎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역경과 극복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룹에 대항하지만, 개인이 실패하는 것은 필연이라는 쪽으로 영화는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렇게 실패하는 게 당연한 것이면서도, 당연한 실패에 당연한 슬픔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실패했기에 더 행복해진다. 


이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 전반에 걸친 아이러니적 유희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했지만’이라는 반전의 수사는 그 앞에 붙은 것의 의도대로 만은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일종의 다짐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대를 따르는 개인이 있다면 개인은 시대에 붙어 있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만은 살지 않을 것이라고 오즈는 다짐한다. 이는 소심한 반항이거나 나지막한 소신이기도 하면서, 영화라는 세상이 현실 세상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오즈의 영화에 대한 신념이기도 하다. 예컨대 오즈에게 영화란, 현실에서 밀려난 변방의 것으로서 오히려 그렇게 밀려났기에 옥체를 보존할 수 있게 된 아이러니이다. 


3. 


같은 맥락에서 오즈에게 영화라는 고립은 만약을 상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를 개인으로, 현실을 그룹으로 놓고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오즈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구도는 단체를 떠나는 개인에 대한 단체 사람들의 구도인데, 이는 해당 단어에 영화와 현실이라는 것이나 국가와 국민이라는 것을 넣어봐도 얼추 들어맞는다. 이를테면 오즈 영화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우연한 아이러니로 발생하는 이벤트에 가깝지만 (오즈 영화에서 결혼 자체는 예정된 행위이지만, 결혼 ‘상대’를 찾는 건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하다.) 사실은 시기상으로 (나이상으로) 자연스러운 행위로서, 개인의 측면에서는 아이러니이지만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것들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오즈의 카메라가 집안을 들여다보다가 그곳에서 사람을 제거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워진다. 필로우 쇼트라는 공백은 존재의 표지보다는 부재의 표식에 가깝고, 이는 영화가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영화 바깥의 차가운 현실을 관객에게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오즈는 종이로 만든 방문에 구멍을 뚫어둔 셈이다. 이는 영화 밖에서 안으로 찬 공기를 불어넣기 위함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둘러보면서 세상을 경계하라는 오즈의 의도였다. 본래대로라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식이 안을 합리화하는 것에 이용되고는 하지만, 오즈는 필로우 쇼트를 통해 밖에서 들여다보는 안이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점을 영화에 밝혀둔 것이다. 


바깥세상이 안쪽 세상을 합리화한다는 게 시대가 개인을 만든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오즈의 의도에 따라서 그 반대로 보는 게 본래 맥락에 더 어울릴 것 같다. 개인의 이야기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고 오즈는 말한다. 우리가 필로우 쇼트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이 몸담은 집은 개인을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개인이 있는 집이 바로 집을 집이게 하는 요인이다. 집이 없으면 그곳은 그저 공허할 뿐이라고, 영혼 없는 육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오즈는 말한다. 국가의 측면으로 보면 국민 없이는 국가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간접적인 비판이 되기도 하는 이 기법은, 집 안에 있어야 할 누군가가 없다면 그곳은 더는 집이 아니라는 식의 가족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즉 이는 적어도 영화를 보는 관객의 개인적 시점에서는, 외부로부터의 변화에 굳이, 혹은 쉬이 뒤섞이지 않는 존재가 바로 개인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말하자면 영화는 관객을 위해 주조된 게 아니라 관객이 없으면 영화가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즈는 영화/가족/국가라는 계열체의 그룹을 구성하고 있다. 


4. 


이러한 시각은 오즈의 영화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하나로 일원화될 수 없다. 연구방법론으로는 적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오즈가 처음부터 끝까지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몸담은 스튜디오란 국가의 축소판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1930년대 본토에서의 평화가 미국으로부터 흘러온 세계 경제의 붕괴에 오염된 무언가라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군국주의를 확대하게 된 것인지,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상관관계를 따져 묻는 것보다는, 이것을 확장된 외부와 고립된 내부라는 두 개의 지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구체적인 시기는 달라도 변화하는 외부 지형도 안에서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의 자신을 지속했던 오즈의 태도는, 팽창하는 것의 밖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소시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이제 흥미로운 생각을 해볼까. 대공황 시기의 경제에서 물건의 가치는 끝없이 뛰어오르는 가운데 자신의 가치는 예전 그대로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이전과 같은 노력을 해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마치 확장된 외부와 고립된 내부라는 두 개의 지형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먼저, 부족한 자원을 충족하려고 외부에 손을 뻗는 제국주의 마수는 군국주의라는 군사적 노선을 타고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그 안에서 개인은 외부와 연결된 채로 내부를 확장하기를 꾀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때 그렇지 않은 사람이란, 정확히 자신의 영역까지만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집단 안에 있지만 집단의 일부가 되기보다는 집단을 이루는 개인에만 그치려는 사람이 있었다.  


집단을 이루는 개인에만 그치려는 이들이 그곳에만 머물려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외부가 너무 위험하거나, 외부 없이도 만족해서다. 여기서 외부에서 바라보는 내부는 확실히 이질적이다. 개방적인 곳에서 폐쇄적인 곳을 들여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의 측면에서 이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다. 관객 또한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응시의 한 형태를 실천하는 것이니 말이다. 예컨대 이에 따르면 오즈의 영화는 영화 스스로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는 게 된다. 이때 핵심은 바라본다는 단어이다.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 객관적일 수 없는 행위가 또 없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오즈는 자신의 영화가 그만큼 있을 수 없다거나 이질적인 무언가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쪽에서는 마냥 희비극에 불과하지만 바깥에서는 철 지난 한 편의 영화로만 보이는 이곳에서는, ‘~했지만’이라는 태도가 자기방어의 논리로 자리한다. 어쩌면 오즈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을 영화라는 필름의 한 조각으로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낭만적이기에 우스울 수도 있는 수사로 그를 말해보자면, 오즈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세상과는 필사적으로 연결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자신에게만은 솔직하고자 했던 어느 한 개인일 뿐이었다. 


5.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어려서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할 줄 아는 게 많아야 한다는 점이 나이에 어울리는 품위와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나라는 개인은 세상의 일부조차 되지 못한다는 슬픈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떻게 하면 작게 살면서도 큰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를 되새겨보는 것으로 생각이 닿는다. 왜 나는 그게 좋을까. 


나이가 들면 그만큼 세상이 넓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멀리 보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조그마한 자신이 바로 이곳에서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멀리 본다는 게 그만큼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님에도, 나이가 들어가면 세상은 필연적으로 커지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전히 좁은 세계에만 머무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갇혀있는 것보다는 광장의 공포가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성장이라는 게 쫓겨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부모의 품을 벗어나야 하듯이 언젠가는 독립을 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갈 것이고, 대학교에 가면 그만한 선택권이 주어지겠지만 그만한 선택권 속에서 개인은 그만큼 왜소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시간이라는 게 그렇듯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위압감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자신을 배제하거나, 세계의 일원이 되어 개인으로서 단체에 공조하는 것뿐이다. 예컨대 인간은 ‘~했지만’이라는 자기혐오를 양분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


이 대목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몇몇 일들도 해야 하는 때가 생긴다. 혹자는 그게 어른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에 세상으로부터 오는 단절이 두려워 어른이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즈의 카메라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오즈는 항상 제자리에 멈춰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오즈의 초기 영화에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쇼트는 나오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오즈는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긍정을 보냄과 동시에 외부에서는 그게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관객인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이고 초월적인 태도를 영화에 대해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인 우리가 오즈의 영화를 볼 때는 단단한 고치처럼 꿋꿋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즈는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며 그곳에 균열이 있음을 우리에게 숨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자신이 보거나 말하는 것은 결코 완벽하거나 고고한 일 혹은 대안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 균열 안으로 우리가 침입해 작은 세계를 깨부수어달라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오즈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변주로 흐름을 이루지만, 나는 이러한 오즈의 태도가 세월과 세계를 불문하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즈를 생각할 때마다 텅 빈 세계를 둘러보는 작은 개인과 그곳에 자리한 구멍 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이른바 존재와 부재로서의 개인과 세계인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있다 간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