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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11. 2020

트리비아가 아니라면 성립하지 않을 것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2019)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작품 포스터 © 아이엠







1.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에 얽힌 트리비아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영화에 대한 트리비아를 접하고 난 후에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애초에 트리비아라는 게 여담이거나 사족이라는 말로 번안되는 만큼, 그것은 본편이 없다면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편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본편에서 떠올리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자의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트리비아는 흥미롭고, 그러니 트리비아라는 것은 본편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기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편 자체를 볼 생각이 없었음에도 트리비아에 이끌려 본편을 보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의외의 만남을 이끌어낸 트리비아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트리비아와 같은 흥밋거리에 이끌린 사람들에게 세상이 그렇게 흥미롭기만 하느냐고 반문해야할지를 고민하게 될 테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생전에 아무도 자신의 영화를 보러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죽어버릴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한 바가 있고, 영화관에 관객이 들지 않던 시기에는 심한 우울에 시달리며 자살을 시도하다가 타인에 의해 무마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 자체도 하나의 트리비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보여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때 그는 자신이 여기에 있음에도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는 상태중첩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라면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다를 바 없다. 있다고도 말 못하고 없다고 말 못 하는 다소 이상한 상태, 그게 바로 영화라는 영화(Cinema)다.



그런데 다소 흥미로운 점은 영화라는 게 본래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있지 않은 사물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인하는 것 중에는 가장 명확하게 구분되는 가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해오던 생각이기에 따로 덧붙일 말이 없겠지만, 그러한 상태중첩을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주체의 시선으로 바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면 영화의 제목처럼 코끼리에 관한 단상 하나를 짚어볼 수 있겠다. 코끼리는 현생 인류가 마주하는 육상 동물 중에서는 가장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러 곳에서 코끼리라는 생물을 개념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라는 비유도 그중 하나이다.



2.



방 안의 코끼리라는 비유는 방 안에 코끼리처럼 거대한 게 들어앉아 있더라도 모른 척하고자 하면 어느 순간 정말로 모르게 됨을 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행태에 대한 수사이다. 요약하자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문제’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여기서 코끼리를 쉬쉬하는 우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들로부터 애써 모른 척을 당하는 코끼리가 될 것인지에 따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진다. 첫 번째로, 눈앞에 놓인 코끼리를 바라보는 쪽은 코끼리에 대한 시선을 상대와 교환하고 있지만 정작 코끼리에게는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두 번째로, 코끼리인 자신은 자신이 단체의 문젯거리인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둘 중 무엇이든 간에 코끼리라는 문제는 상당한 비극이다. 그렇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더 고통스럽다. 문제를 방치하는 것만으로는 그게 정말로 해결되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총대를 멜 사람이 없는 것에 불과한지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바로 그 문제라면 해결되지 않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 모두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후보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바로 그것이다. 후보의 이 영화가 후보의 자살로 인해 우리 곁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점도 그런 점에 일조하는 듯한 면이 있다. 다른 영화라면 단순히 트리비아에 불과했을 내용이지만, 이 영화를 접하는 이들이라면 그 트리비아를 먼저 접했을 것이니 말이다.



제작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이 이 작품을 후보의 것이 아니게 해버렸지만, 후보의 자살로 인해 이 영화의 저작권은 유족에게로 돌아갔다. 다시 말해 후보는 자살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위에서 말했던 트리비아에 대한 두 가지 가정이다. 일반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트리비아를 추가로 찾아보는 게 순서이지만, 이 영화는 후보의 자살 덕분에 (표현이 좀 그렇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영화제에 걸렸고, 관객을 만났으며, 본토에서와는 다른 평가를 받고 우리 곁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고작’이라는 불투명한 타이틀은 어떤 형태로든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3.



영화에 대한 판단이 그에 휘둘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후보라는 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점이 마치 영화의 시작과 끝을 통해 후보의 삶 전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트리비아를 통해 본편을 바라본다는 건 앞뒤가 바뀐 문장에 가깝다. 여담이라는 말은 말을 다하고도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에서 구도가 잘못되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후보의 삶은 소설로 시작해 영화로 나아갔으니 후보에게 본편은 소설이라 할 수 있겠고, 그렇다면 영화는 후보에게 있어 그런 삶의 트리비아라 할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코끼리>는 후보의 사족이자 전부다.



<코끼리>가 후보의 사족이자 전부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곧 트리비아가 전부인 삶을 그가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가 훗날 후보라는 이를 논할 때 트리비아를 피해갈 수는 없다. 다르게 보면 <코끼리>는 우리가 후보라는 이를 생각할 때 후보의 작품이면서도 후보의 삶이 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코끼리는 영화의 제목인 만큼 작품 안에서도 주된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신기한 건 방 안의 코끼리와 후보라는 코끼리, <코끼리> 안에서의 코끼리,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얼추 들어맞기도 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90만 위안(한화로 약 1억5천)이라는 제작비로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했던 것은 작품의 원안이 후보 자신의 소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저작권료나 각색비용이 들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소설이기에 그만큼 애정이 깊었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 소설만으로도 돈이 부족하지 않게 살던 후보에게, 자신의 소설을 손수 영화로 만드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이상의 실현에 더 가까웠을 테니 말이다. 영화 제작에 관한 여러 트리비아를 제하더라도 그런 트리비아를 알게 됨으로써 영화 관람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분은 많은데, 그중에 하나를 꼽자면 후보의 4시간짜리 영화를 보며 주변 사람이 했던 불평이 ‘쓸데없는 롱테이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



영화 제작 후 후보가 편집한 4시간 판본(우리가 보았던 그게 맞다.)에서 영화사 측의 요구는 쓸데없는 롱테이크를 줄여 2시간 분량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영화를 보면 굳이 롱테이크를 고집할 만한 장면이 아님에도 롱테이크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영화사 측의 요구는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코끼리>에서 후보의 롱테이크가 일반적인 영화의 쇼트와 리버스 쇼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을 고려하면, 편집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롱테이크를 고집하고자 했던 건, 자신의 문학적 소산을 영화로 옮길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귀인했을 공산이 커 보인다.



먼저, 소설과 영화는 서로 다른 매체이기에 취할 수 있는 형식이 각각 다르다. 간단하게는 글과 영상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코끼리>를 통해 후보가 시도한 것은 소설이 주는 감정선을 영상으로도 재현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던 듯 보인다. 후보의 영화에서 다소 불필요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롱테이크는 주로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것에 사용되곤 하지만, 인물이 어딘가를 바라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는 인물의 시점을 벗어나 상대 쪽으로 향한 다음에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시점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인물의 시선에서 돌출된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을 후보는 묘사하고 있다.



개중에 대표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웨이부(펑유창)가 할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웨이부가 집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지만 카메라는 문턱에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문턱에 서 있으니 시야가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둔 것처럼 제한되는데, 이는 그동안 롱테이크의 형식으로 인물을 따라오던 카메라가 문득 멈춰 섰다는 점을 말해줌과 동시에 자신의 영역은 딱 이곳까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프레임 안에 있는 웨이부는 이윽고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설정된 방문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그 모든 건 방문의 안쪽에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웨이부가 무엇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5.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동안에는 인물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묘사하던 카메라가 갑작스레 관찰자 시점으로 진입하는 이 시기에는 감정적으로 배제되거나 생략되어야만 할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이는 아마 후보가 쓴 소설의 흐름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일종의 편집지점처럼 보이기도 하는 인물의 시점 간을 잇는 방식이 유사한 이미지를 몽타주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런 흐름은 드러난다. 이는 후보가 생각하는 인물의 이미지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이면서도, 작품 전반에 걸친 여러 인물의 시점을 하나로 잇는 효과가 있는데 이건 영화라기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운 문법이다. 예컨대 후보가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원작에 충실해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 영화 문법이 더는 고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된 지가 오래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롱테이크 중간에 돌출된 시간을 가져가는 것은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돌출된 시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움푹 꺼져버린 듯한 시간도 있다. 영화에서 돌출된 시간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게 롱테이크 중간에 꺼져버리는 카메라의 모습이다. 영화는 여러 시점으로 나누어져 있고 마치 타임라인을 보는 듯 명료하게 나누어떨어지지만, 각각의 인물은 서로의 영역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카메라는, 여러 명을 동시에 포착하는 대신에 자신이 주목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포커싱을 날려버린다. 물론 한번의 프레임 안에서 인물의 포커스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시선을 묘사하는 게 오래된 기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포커스가 달라지는 것을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프레임 안에서 포커스가 유동적으로 변화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포커스가 아웃된 상대방과는 전혀 다른 각을 바라보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건 영화가 아니라 인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입봉작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없는 건 으레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후보의 4시간짜리 예술 영화는 더더욱 그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후보는 자신의 영화에 타협하지 않았고 그렇게 영화의 후반 작업을 두고 벌어진 갈등에서 후보는 코끼리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자신이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예술인에게 그 무엇보다 큰 치욕이었을 테고, 반대로 보면 자신의 소설을 자신이 영화로 만든다는 것에 있어 글과 영상이라는 두 개의 예술혼이 동시에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예술가의 삶은 작품의 내용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어느 속설이 떠오르기도 한다.



6.



이 영화에는 코끼리가 만저우리에 있다고 말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네 명의 인물이 나온다. 작품 안에서 이야기되는 걸 보면 만저우리에는 서커스단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종일 앉아만 있는 코끼리가 있다고 한다. 종일 앉아있는 코끼리의 존재가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지만, 그게 서커스단의 코끼리라는 점에서는 더더욱 시시한 것일 텐데도 인물들에게는 그게 일종의 버킷리스트쯤으로 받아들여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에서 도피할 곳이 없는데 그런 와중에 문득 던져진 게 코끼리라는 화두이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의 맥거핀으로 남는 이 코끼리는, 그들의 도피수단이자 문제의 물화라는 점에서 ‘방 안의 코끼리’가 말해주는 모두가 쉬쉬하는 무언가를 떠오르게 한다.



국내에서 이 영화의 소개 문구에는 ‘지독한 현실, 탈출구 없는 삶’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 말처럼 이 영화는 네 명의 인물이 겪는 네 개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인물이라는 것 말고는 그들이 겪는 사건에 별다른 공통점은 없다. 서로의 타임라인에 조연으로 개입하기도 하지만 사건 자체에 연관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로 잇는 게 코끼리가 있는 만저우리이다. 크게 특이할 것도 없지만 영화 내내 만저우리를 현재 삶의 탈출구로 말해오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게 뻔한 결말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인물과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도 포커싱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모습은, 그들 앞에 놓인 것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 각자가 외면한 코끼리는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그들 전체가 공유하는 코끼리라는 외면된 문제이자, 그들 단체로부터 터부시되는 코끼리라는 이름의 그들이었을 것이다.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제까지 중국의 뉴 웨이브라고 불렸던 이전 세대와 현세대 감독들은 당대 중국의 문제지점을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했고,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후보의 이 영화도 동일하게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과업에 집중할 때 개인의 기억은 트리비아 정도로 남기 마련이다. 세상에 자리한 거대한 코끼리, 그런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본편을 보고 트리비아를 볼 수도 있지만, 트리비아가 아니라면 성립하지 않을 작품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에 집중하고 그 안에 있는 개인을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성립하지 않을 몇몇 문제 또한 있다. 따라서 그런 문제를 방 안의 코끼리로 남겨두려고 개인을 외면하는 것도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후보의 이 영화는 이야기를 축약해 사건을 만드는 편집이 아니라 인물의 동선을 통해 시선의 지점을 좌표로 그리고자 하는 불필요한, 혹은 부질없는 시도가 담겨있다. 그걸 유심히 보아주길 바란다. 코끼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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