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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9. 2020

불안, 드디어 열리는 천계의 문

<코토코>(2011)


영화 <코토코>의 한 장면 © 츠카모토 신야



1.




츠카모토 신야의 <코토코>는 감독의 성향만큼이나 알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렇게 알 수 없다는 점이 그의 다른 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추측건대 츠카모토 신야의 작품을 한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거기서 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게 될 수 있는지를 반문하게 될 것 같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이 영화는 ‘츠카모토’의 영화 중에서는 가장 따듯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딱히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고 권장하면서 글을 이렇게 이어나가려 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기록한 이 영화의 시놉시스에 따르면, 이 영화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볼 수 있는 여인인 ‘코토코(코코)’가 아동학대 혐의로 아이를 빼앗기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그렇지만 이런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영화는 선과 악이라던가 하는 주제를 다루지도 않고, 그냥 평소처럼의 신야가 평소대로의 ‘신야’를 해버렸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다. 영화는 아무리 보아도 조현병에 걸린 한 여인의 이야기일 뿐이며, 그런 여인에 무섭도록 빠져드는 남성이 바로 ‘츠카모토 신야’ 본인(배우도 겸했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영화가 감독에게 주어진 가상의 마약은 아닐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말하자면 그(감독은)는 조현병에 걸린 여인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영화 작업에 대한 원동력이 바로 그런 조현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 린치를 다룬 다큐멘터리 <아트 오브 라이프>로 넘어가야 한다. 츠카모토 신야가 일본의 데이비드 린치로 불린다는 점에 대한 유머가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제 막 아티스트가 되어 지하실에 구축한 자신의 장대한 박물관(당신이 상상하는 그것이다)을 부모님께 소개해 드렸을 때, 그의 부모님은 “넌 나중에 결혼하지 마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데이비드 린치는 나레이션을 통해 “제 부모님은 제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셨던 거죠.”라고 그때의 부모님에게로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가 자신의 어린 딸과 친절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화면으로 삽입하면서 린치 부모의 린치에 대한 우려는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린치의 작품이 괴상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린치 본인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을 츠카모토 신야의 <코토코>와 엮어서 영화 속의 그녀와 신야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코토코>는 조현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영화 밖에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그려낸’ 감독인 신야에게 자신이 왜 ‘그런’ 영화를 사랑/제작하는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영화이기도 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코토코>가 보여주는 꿈과 현실의 무경계에 기반한 리니어적 공상은 영화 밖에서 안으로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신야의 모습에 타당함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속된 말이지만 가장 직관적인) 미친 여인에게 얼굴이 탱탱 부을 정도로 맞아가면서까지 사랑에 빠지는 알 수 없는 모습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제공한다. 예컨대 이 영화는 사실, 자신의 영화관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세상, 자기만의 주관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영화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속으로는 그저 사랑에 빠진 한 남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코토코>의 신야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끝없이 사랑할 것이며 츠카모토 신야의 <코토코>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끝없이 웃을 것이다.



2.



그런데 <코토코>의 시놉시스가 ‘선과 악’을 볼 수 있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라고 적어두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보았다시피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의 구분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영화가 주인공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녀를 지켜보는 영화 속 주변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동학대라는 죄목으로 아이를 위탁기관에 (그녀로서는) 빼앗기고 홀로 생활하게 되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평온을 되찾는다. 그러니까 그녀로서는 그 아이가 자기 삶에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며, 그런 맥락으로는 평생 좋은 엄마가 되기는 글러 먹었으니 어쩌면 영원히 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기라는 인간 이전의 존재, 우리가 흔히 선과 악 둘 중 무엇인지를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는, 성악설과 성선설 둘 중 하나로 빗대어지는 아기라는 존재에 대하여 ‘선과 악’을 볼 수 있다는 코토코의 모습과 어떤 연결을 지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여기에는 천사 같은 아기가 있고, 악마 같은 코토코가 있으며, 그런 코토코가 아기를 대하는 환경은 본의치 않게 끝없는 위협에 시달린다. 코토코는 아기가 자동차에 치이거나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하는 식의 환영을 목격하게 되고, 그때마다 어머니로서 극렬하게 울부짖지만 무슨 장난인지 그 모든 것은 그저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만이 자리에 남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악마 같은 현상을 목격한 것은 코토코 본인이 악마이기에 악마적 환영을 목격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가정도 가능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 아기를 두고서 악마라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아기는 가만히 누워만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아의 고통!) 그렇지만 아이가 차츰 돌을 지나며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모는 아이가 마냥 천사 같은 존재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미워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지 천사는 아닌 셈이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가정하에 코토코가 선과 악을 목격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꼭 초능력에 속하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목격하는 능력이 있다는 코토코에게 세상이 선과 악, 나를 해치는 것과 나를 이롭게 하는 두 개의 양상으로만 진행된다면 그것들은 모두 일시에 뒤집힐 수도 있는 불안정한 세계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반대편이 있다는 가정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또는 저승과 이승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를 초월하고서 어느 믿음에도 대입될 수 있는,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계를 분리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되, 바로 그 세계가 우리 세계의 바로 위에서 동시진행형으로 자리한다는 점은 생각해보지 않는다. 이른바 ‘겹친 세계’라 할 수 있는 세상은 우리 세상이 결코 2D가 아니기에 3D라는 디지털 폴리곤을 떠올려보면 쉬이 알 수 있는 것일 텐데도 우리는 그걸 간과하곤 한다. 이를테면 코토코가 천사 같은 자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아이가 증발해버리는 상황으로 돌입하고 난 다음에는 코토코를 바라보는 카메라가 사정없이 흔들려버린다. 신야 특유의 무쇠펀치 같은 카메라 흔들림은 칼과 총, 주먹과 같은 물리적 위협을 마주할 때 주로 사용되고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카메라 흔들림은 풍요로운 세계에 닥쳐오는 재난의 전주곡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천사를 바라보는 천국에서의 코토코에게 카메라라는 균열이 닥쳐오면 천국에는 균열이 생기고 그곳은 이제 지옥이 된다. 말하자면 이곳에서의 천국과 지옥이란, 공간의 이치가 아니라 몰려오는 먹구름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농경 시대의 인간들처럼 급속도로 개변하는 세계의 어떤 양상이다. 신야의 다른 폭력적 영화에서의 카메라가 흔들림이 턱밑에 날아와 꽂히는 펀치에 의한 두개골의 양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코토코>는 불안이라는 ‘능력’으로 겹친 세계의 문을 열어젖힐 능력이 있는 어느 여인의 반(反)모성애를 보여준다.



3.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반(反)휴머니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듯이 코토코에게도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반(反)모성애라는 것은 모성애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모성에 반하는 행동으로서 모성이 더 짙어진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코토코가 좋은 엄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어머니가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어머니 노릇을 못한다는 점에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부모로서는 불합격이니 아이를 위탁기관에 빼앗기는 건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목격할 수 있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런 양면이 뒤집히는 대목이 어느쯤일지를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미쳐있었다면 그 세상이 본격적으로 미쳐버린 대목은 어느 시기일까.



흔히들 유령 혹은 망령이라 불리는 변화는 우리가 눈치채기도 힘들만큼 소리소문없이 찾아온다. 그렇게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변화의 순간에 영화와 현실은 프레임이라는 칸막을 찢어 두 세계를 오간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개념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다가오는 것들을 인식할 무렵에는 이미 세상은 우리를 넘어서고 있다. 어찌 보면 뻔한 말이지만, 우리는 은연 중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대분류로 세상을 갈라놓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말은 그럴듯하게 들려올 수 있다. 오직 선역만이 있다면 그런 세상/영화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오직 악역만이 있다면 그런 세상/영화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들은 피카레스크라는 이름으로 대응하지만 그런 것들을 보면 마치 세상은 누가 더 사악한지를 두고서 격렬하게 경쟁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변형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만 가는 구렁텅이 안의 삶이며, 어쩌면 끝없는 기분 좋음으로만 몰두하는 착하디 착한 것들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다.



이런 고민 속에 신야가 선택하는 건 뻔뻔함이다. 영화의 중후반에 신야의 끈덕진 구애 끝에 코토코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여 합방을 진행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느 신혼부부처럼 새 가구를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방 안에 들여놓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은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사물을 바라보다가,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들로 인해 초점을 잃고 와해된다. 정신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흐트러지는 시선을 애써 집중해보면 신야의 얼굴이 피멍투성이가 된 채인데, 그런 그가 피를 흘리며 다독이는 곳은 건너편에서 한창 자해 중인 그의 아내 코토코이다. 이내 신야는 이전처럼 코토코를 다독여주면서 그녀를 진정시킨다.



이 장면이 신야의 뻔뻔한 선택인 것은 <코토코>가 신야의 자기 영화에 대한 자기 긍정이라는 점에서 그런 단순한 편집은 곧 영화라는 세상에 대한 긍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조현병에 걸린 듯한 여자에게 아이가 사라지고 나자 증상이 완화되고, 그런 타이밍에 스토커로 시작해 사랑에 골인하는 신야의 모습은 마치 아이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인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일 뿐이다. 이 영화는 막연하게라도 존재하는 인과가 없다. 단지 신야가 세워둔 시놉시스 안의 ‘선과 악, 양면성’이라는 키워드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막연하게라도 존재하는 인과가 없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은 없다. 선과 악이라는 게 하나의 짝패에 해당한다면 영화 속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인과를 따져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이유 없는 행동에 대한 추론은 어머니가 아기의 우는 이유를 추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기가 왜 우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아기의 행동에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는 명확하지가 않다. 단지 아기의 행동을 보며 선과 악을 구분 지어 개념을 교정해주는 주변의 보호자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은 그런 점에서 연유하는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이에 대한 판정이 되어야 하는 걸까. 무엇이 아이를 옳고 그름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가. 때때로 아이들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알 수 없는 곳에서 그런 것들을 배워온다. 그렇다면 그런 문구들의 (의미없을 수도 있는) 반복은 아마도 다음처럼 쓰여져야 할 것이다. 신야의 거친 영화들이 태양족 영화 속의 거친 움직임을 모방한 것이라면, 신야의 따스한 이 영화 <코토코>는 영화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영화, 양측 모두 선과 악으로 재단되는 것을 뻔뻔함, 드셈, 거침없음, 이라는 이유를 대며 보호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4.



작디 작은 아이가 길거리의 이웃으로부터 목격한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코토코는 써내려간다. 이러한 상상은 영화에서 코토코가 육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리를 빼앗기게 되는 계기이자, 신생아 시절로부터 출발한 영화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쯤이 된 아이가 코토코의 집을 찾아왔다가 다시금 떠나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런 모습이 어른과 아이는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곳을 목격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영화는 아기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을 양면성으로 코토코를 해치게 했음에도, 그 아기가 다 자라서 코토코에게 돌아왔을 때도 아무런 양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코토코의 능력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모두 양면성이 있고 그게 목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그만큼 간과되어왔던 게 바로 이 갓난아기이다. 이런 설정에 대해 우리가 어떤 해석을 덧붙여야 할까. 또는 어떤 논평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답변은 그 아이가 자라서 밖으로 나온 게 바로 우리라는 것일 테다. 관객이라는 아기, 영화 안에서 태어나 영화 바깥으로 떠나온 존재,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우리가 이입해야 할 작중 등장인물은 코토코가 아니라 갓난아기였던 것이다. 은연중에 찢긴 세계의 구분 안에서 우리 또한 영화의 안팎이 병합되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셈이다. 이 얼마나 멋진 배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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