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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9. 2020

믿음이라는 자가 생성의 아우라는 여전히 존재한다

<두 교황>(2019)

영화 <두 교황>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두 교황>은 두 명의 교황을 신구 갈등을 중심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넷플릭스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넷플릭스라는 매체가 영화관에 대한 대안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관에서 상영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두 교황>은 그런 대립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하나의 교리에 집중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그런 신구 대립에서 ‘신(新)’쪽에 서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조너선 프라이스)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영화관과 넷플릭스라는 신구 대립에서 이기는 쪽이 넷플릭스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영화를 종교처럼 여긴다면 신학/영화학이라는 구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영화를 보며 우리가 얻는 깨달음이 일종의 종교와 같은,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인 것은 아닐까. 학문이라기보다 감상에 그칠만한 이 생각 속에는 영화가 우리를 스크린의 저편으로 데려간다는 점이 그 근거로 자리한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것에 견주어 보면 그 의미는 아마 ‘영화라는 아편’에 관한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찾지만, 역설적으로 종교에 순응하기 위해 현실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결국 여기서 방점은 잊어버린다는 망각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과 종교가 각각 우리에게 무엇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무엇에 고통을 느끼기에 그것을 잠재우려 하는가. 예컨대 여기서 왜 하필 영화가 진통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영화라는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의 물질로서, 손아귀에 넣고 쥘 만한 상태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영화를 감당할 만큼 의식이 성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화가 말 그대로 상품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 영화를 영화로만 받아들이는 관객은 거의 없을뿐더러, 오히려 영화의 내용이 아닌 영화 자체가 유튜브와 같은 곳에서의 콘텐츠로 사용되는 게 실정이니 말이다. 이는 마치 타르코프스키가 정전처럼 여겨지던 90년대 한국의 영화 소비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지만, 그때와는 달리 근래의 영화 소비문화는 일정한 인덱스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영화’라는 추상으로서 영상 매체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요즘 시대에 영화 이론을 배운다는 것은 영상 이론을 배운다는 것이며, 영상 이론을 배운다는 것 또한 영화에 대한 배움을 수반하지만, 그 두 가지 사례는 영상이 영화를 포함하는 식의 괄호가 아니라 ‘본다는 것’이라는 목격의 행위만이 남아버렸다는 점으로 통합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근래에 영화를 소비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영상 문화 전반에 걸친 이론에 근거한 행위가 되어버렸다. 기호학이라는 학문이 영화를 안내하는 일종의 메타인지 능력을 심어주지만, 그것은 그저 영화를 ‘어떻게 독해할 것인지’의 문제일 뿐이다. 영어 독해를 잘한다는 게 영어 쓰기나 말하기에 대한 능력을 검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영어 구문의 현장에서는 영어라는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에 대한 분석적 능력만이 요구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영화 구문의 현장에는 영화를 문장으로 풀이하여 모듈 상태로 배치하는 ‘영화 해석’이라는 것이 곧이곧게 자리하고 있다. 반면 영화를 자신의 문법으로 받아들여 말하거나 쓰는 훈련은 비교적 부족하거나 미진한 게 사실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영화를 말하고 쓰는 게 ‘찍는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과 소비하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다. 영화를 만드는 유산기술과 영화를 소비하는 무산기술으로 나눌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찍는다는 건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쪽에 가까운 믿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대일로 대응할 만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건 데이터와 기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영향을 받곤 하는데, 영화를 찍는다는 것도 데이터와 기술 이외의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제작하는 입장에서 그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의미의 모듈이 아닌 삶의 어느 순간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종교적 헌장이 된다. 


아마도 이런 점이 영화관람이라는 행위를 제의적인 것,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제사를 지내는 곳,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을 기도하는 신자로 바꾸어놓는 게 아닐까 한다. 분명 영화와 종교의 유사성이 있음에도 우리가 그걸 확증할 수는 없지만, 신당에 방문해 자신의 죄를 털어놓는 고해성사가 영화관에 방문해 등장인물에게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구실을 발견하는 것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는 점은, 고해성사에서 중요한 게 죄가 아니라 용서라는 기도의 행위이듯 영화 관람에서 중요한 건 이해가 아니라 납득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쉽게 말해 우리는 머리로는 알아도 논리로는 모르겠는 상황에서 눈앞의 현장을 거부하게 된다. 감정보다 이성이 우선이라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영화가 요구하는 물질적인 특성이 현실의 그것을 베껴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에 발 디딘 채로 살아가는 우리가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두둥실 떠오른 삶을 산다는 게 얼마나 불안할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면 태어날 때부터 떠오른 채로 살아왔다던가 아니면 마약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현실을 지워버리면 된다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영화에서 물질을 지우고 영혼만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마치 육체의 고통이 정신의 감응으로 상쇄될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의 어떤 성질과도 유사하게도 보이는 면이 있다. 


이러한 말들은 영화를 물질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측면으로 분리하고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두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안소니 홉킨스)와 프란치스코의 신구 견해에 따라 갈라지는 파벌 대립을 그리는 게 아니라, 신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믿음의 종류를 그리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게 신학이라는 엄중한 의미에서의 학문은 아니지만,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 전력을 투구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하는 관용어구에 따라 ‘신성애자’라는 다소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육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인 무언가를 뜻하는 아가페적 성애로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걸 고려하면 충분히 고려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신부, 추기경, 교황.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을 신학에서의 권위자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자신은 그저 일반 신도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 뿐이고, 그럼 앎을 베풂으로써 신의 자비를 배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인 성직자들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시네필은 남들보다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잘 알뿐, 영화를 대리하거나 지배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여기서 신학과 영화학의 이상한 교리 관계가 성립한다. 신학과 영화학은 학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의 종교적인 믿음을 수반한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분명하게도 그것을 과학의 논리로 해석한다면 전혀 다른 엉터리가 됨을 피해 갈 수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 같은 인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게 되어 버린다. 영화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영화로 전해진 현실성이 다시금 우리 삶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을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그러하다. 쉽게 말해 신학과 영화학은 발견의 순간, ‘본다는 것’이라는 목격의 행위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라는 ‘것’의 아이러니한 대목이 바로 그곳에 있다. 혹자는 이동진을 두고 그의 메타인지적 영화 해석의 근간이 학부 시절의 전공인 종교학으로부터 귀인한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발언의 기원이 종교학이 곧 본다는 것에 대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기에 영화 안에서 무언가를 ‘보아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어떠한 맞춤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만약 삶을 살아가던 와중에 문득 들어오는 깨달음이 영화를 보며 기막힌 우연의 순간을 잡아내는 것과 유사하게 보임을 인정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두 교황>에서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청년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말하듯이, 그가 신부라는 직업에 귀의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깨달음의 순간 때문이었다. 이전에 프란치스코는 내내 신부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직 주님의 부름을 받지 못했기에 그때까지 기다려보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다. 사실 이 대목에서 과연 어떤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직자들의 마음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깨달음을 얻었고 그렇기에 실천한다는 것만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성직자는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것을 자신의 몸을 통해 타인에게도 관측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병이어와 같은 믿음을 실천하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종교적 행위에는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만이 해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조리 있게 정리하는 것 또한 영화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행위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화가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렸던 것과 사진사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찍었던 것에는 리얼리즘이라는 차이가 있었듯 말이다. 


화가는 자신이 본 대로 그리는 사람이다. 사진사는 자신이 본 것을 찍는 사람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는 사진사가 도출해낸 사진이라는 결과물이 객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이 세상의 어느 순간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의미의 맥락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기호라고 불리는데, 사진을 기호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기호식품’처럼 소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예컨대 사진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영화들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겪은 어떤 현실에 대입하기 위해 영화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요청되는 유희로서의 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현실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문장이다. 하지만 사실은 꽤 합당한데, 현실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영화에서 어떠한 담론을 도출해내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영화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관객은 현실로부터 영화로 잠시 몸을 피한 것뿐이고 이제 곧 돌아가야만 할 사람이어서다. 돌아갈 사람과 돌아가지 못할 사람을 나누는 게 과연 영화 담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엔딩 크레딧에 스태프들의 이름이 흘러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몇몇 관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영화가 끝나는 순간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만든 이들의 노고를 알아주려면 저 바깥의 세상과 연결되는 바로 이곳의 흘러나오는 현실의 끝자락에 매달려야 할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오르면 주변이 환해지면서 길고 긴 터널의 끝자락에 당도한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경험을 두고서 고통의 끝에 찾아오는 환희라던가 하는 말로 서술할 수 있다면, 영화 관람이란 일종의 임사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간에,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임사체험을 겪은 이들이 대게 종교에 빠지게 되는 것은 무언가를 목격했기에 ‘본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인데, 영화를 보는 중간이 아니라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본다. 물론 이는 터널의 끝에 희망이 있다는 식의 희열적 쾌감에 근거한 게 아니라, 우리가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 사실은 거짓된 세상이었고, 그로부터 이탈해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우리가 현실의 균열에 진입해 무언가를 목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즉, 영화와 현실은 분리된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의 안에 영화가 있고 영화의 안에 현실이 있다는 유연한 사고, 부드러운 전환이 이루어짐을 몸으로 채득하게 된다. 


세계 기독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바티칸이 이탈리아 한가운데에 동떨어져 있다는 점은 척 봐도 흥미롭지만 역사를 알고 나면 더욱 흥미롭다. <두 교황>은 바티칸에서 전화를 거는 모습으로 시작해 바티칸에서 전화를 거는 모습 이후의 이야기로 끝나는데, 이런 시퀀스 구성을 살펴보면 이 영화에서 괄호 쳐진 것은 그 중간의 이야기,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즉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까지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실 안의 현실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바티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반인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영화 안에서 두 교황의 주된 화해 방법으로 사용되는 고해성사를 통해 영화가 프란치스코의 과거를 보여줌을 떠올려 볼 때, 이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가 감정이 아니라 종교적 논리에 기반한 화해를 이루어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영화라는 매체의 신구 대립을 각기 대변하는 <두 교황>을 보면서 그들의 화해가 영화에 대한 가장 본원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넷플릭스와 상영관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두 교황>에 대한 생각이 그런 영화관의 유무에 따라 갈릴 것이기에 영화라는 종교는 오늘날에도 슬기롭게 자신을 변화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체질 개선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한 믿음을 점진적으로 개진해 나가는 것이다. 디지털이라는 신기루에도 믿음이라는 자가 생성의 아우라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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