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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2. 2020

그런 광활함 안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결혼 이야기>(2019)

영화 <결혼 이야기>의 작품 포스터 © 넷플릭스



노아 바움백이 어떤 감독인지 모른다 하여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대략 느낌이 올 것이다. 노아 바움백은 인생을 희극이거나 비극, 둘 중 하나로 그리지 않고 중간에 서서 인생을 멍하니 관조한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굉장히 애매한데,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간에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그만큼 작품을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적극적으로 이입하지도 않고, 너무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니 적당한 정도의 관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매체가 일종의 ‘적당한 거리’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미묘함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영화관에 앉아 스크린을 볼 때,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이유를 물어보아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오는 가운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영화를 볼 때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기본적으로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 흘러나오는 영상 매체라고 생각해서다. 현대에 들어 스크린이 어디에 자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 말인즉슨 스마트폰이든 티브이든 간에 저것은 ‘현실이 아니다’라는 감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대두된 풍경이기에 디지털이 그런 감각을 만들어내었다고도 말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굳이 디지털을 범인으로 지목할 이유는 없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하던 것은 인류사의 아주 오래된 인간관계의 법칙이니 말이다. 


예컨대 나는 영화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로 보고 있다. 영화를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은 영화를 보는 방법과 유사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섣부르게 접근하기 어려운 생각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틀린 것 같지도 않은 생각이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를 하는 우리에게는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인터넷이라는 요인이 면밀하게 결합해 있다. 여기서, 이전 시대의 메시지와 통화는 마치 편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송신과 수신 사이의 거리감을 필요로 했고, 그러나 우리 시대의 메시지와 통화는 그런 거리감이 인터넷이라는 유동형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수많은 인공위성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 인공위성의 헌신으로 우리에게 데이터 통신이라는 인터넷 서비스가 제공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 인공위성만이 할 수 있는 데이터 서비스는 바로 GPS이다. 인터넷 서비스는 바다에 깔린 해저 케이블도 사용하지만 GPS만큼은 지구를 에워싼 인공위성을 이용해야만 정확한 좌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데이터 서비스 중에 ‘좌표’ 값은 항상 공기 중으로부터 내려온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은 감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시대가 인류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좌표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게 다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이라는 데이터는 안테나 망으로부터 출발해 공기 중을 떠다니는데,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마치 공기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GPS를 켜고 서로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 서로의 좌푯값을 명확히 해야 우리는 서로에게 보다 더 잘 다가설 수 있다. 


서로에게 연락하기는 쉬워졌지만 그런 만큼 가까워지지는 않았다는 점이 좌표라는 개념에 담겨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추상을 떠올린 것은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가 그런 것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결혼 이야기>에서는 이제 막 이혼하려는 두 명의 부부가 나온다. 그들은 각각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로 처음에는 서로를 신사적으로 대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건이 심각해지고, 서로에게 쌓인 감정을 쏟아내면서 끝내는 화해에 다다른다. 


어쩌면 평범한 이혼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근원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라 니콜과 찰리라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혼을 하면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만, 그 안에서 개인의 이름으로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부모의 역할을 지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삶이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나는 지금 뻔한 이야기를 조금 색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인터넷이 우리에게 제공한 정보 접근의 평등함, 지구촌이라는 거리감의 삭제가 직시하는 바는 우리네 가정 안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부부는 평등해졌으며, 어디를 가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끈끈하게 붙어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게 부부 사이를 좋게 해주는 건 아니다. 연락이 잘 된다고 해서 사랑이 깊어진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출정하는 남편과 그를 마중 나가는 아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연락이 일시적으로 끊기고 돌아올 때까지 응답이 닿지 않기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욱 애타게 된다. 


이혼을 위한 준비 기간 동안 니콜과 찰리는 떨어져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부부라는 규율에서 벗어나 솔로라는 자유를 되찾지만 그동안 가까이 있었기에 눈여겨보지 못했던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다. 이는 소위 말하는 부재의 신호, 있다가 사라진 것이라는 주제로 표현되면서 ‘마치’ 그들이 재결합할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니콜과 찰리는 그대로 헤어진다. 반전은 없다. 허나 참된 의미의 반전은 그들이 헤어지고 나서도 앙숙이 아니라 친구 사이로 남는다는 점이다. 


딱히 한국이 아니더라도, 헤어진 후에 친구 사이로 남는 건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 속에서 니콜과 찰리는 이혼 과정에서 서로 대판 싸우기도 했으니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남았을 법하다. 그러면서도 니콜과 찰리는 자신은 좋은 엄마/아빠가 아니라면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상대에게서 떠올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대에게 떠올리는 것들은 부모로서의 능력이라기보다 개인으로서의 능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개인의 능력이 곧 부모의 능력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혼 이야기>는 좋은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좋은 결혼 생활을 이어나갈 개인의 능력과 성숙함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들이 서로에게서 떠올리는 부재의 신호는 결혼 생활의 종말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결여된 것들에 대한 빈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부부의 아들이 부부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노아 바움백이 가족을 대하는 시선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와 같은 전통적 문제보다 부부 개인의 자아실현과 가정 운영에 대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테다. 예컨대 노아 바움백이 그려내는 가정 문제는 인간 사이의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직장생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감독의 이전 작품 <프란시스하>가 풍기는 자유분방함에서도 우리가 보았던 것이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흥미로운 부분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라는 문장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보고 싶은데, 니콜과 찰리는 결혼 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다. 으레 결혼생활을 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불꽃 같은 감정은 현실의 담론 아래로 침전되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두 사람의 직업이 연극단의 감독과 배우라는 점에서 이 둘은 서로 상충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는다는 게 어쩌면 포인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찰리의 직업인 감독을 위해 젊은 날의 꿈인 배우를 포기했던 니콜은 이혼을 계기로 자신의 꿈을 되찾으려 한다. 여기서 니콜이 배우가 되려고 이혼을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가정 밖으로 나가기에 가정을 위해 억눌러 놓았던 자신의 옛꿈을 수면으로 올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니콜이 자신의 꿈을 위하면서도 자녀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 걸 보면, 자녀가 포함된 ‘가정’이라는 개념보다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게 더 맞을 테다.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부연설명을 하자면 니콜이 자신을 위해 자식을 홀대했다는 게 아니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게 그들의 ‘가정’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이혼을 다루는 영화라면 이혼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별의 아픔, 자녀는 엄마와 아빠 둘 중 어디로 보낼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다룰 텐데, 영화가 진행하는 사건은 그것이지만 바라보는 장소는 두 사람의 내면 속이다. 예컨대 가정의 붕괴가 아닌 가족이란 무엇인가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요인에서 중요한 건 부부를 잇는 자녀라는 존재가 아니라 부부 개인의 인간적 면모임을 노아 바움백은 역설한다. 


이러한 대목이 시사하는 바는 가정을 지키려고 개인을 희생하는 부부가 있는 반면, 가족을 이루는 게 바로 개인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부부도 있다는 것이다. 서양은 모르겠지만 한국으로 국한하면 아직은 유교의 영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자녀보다 자신을 중시하는 부모는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평가받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부모라는 칭호 이전에 개인으로서, 아직 성장을 다 하지 못한 청춘임을 말해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되면 자신의 이전 삶은 모두 지워지는 듯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은 어쩌면 생물학적인 무언가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다소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추상적인 생각을 이것과 결부 지어보려 한다. 결혼이라는 게 개인의 선택에 따른 행위라는 점을 제쳐두면, 나이를 어떻게 먹든 간에 그것이 인생계획의 다음 단계에 자리하는 듯 여겨지는 현재 상황에서, 그것은 마치 위에서 말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시대적 변화와 맞물리는 듯 느껴진다. 


개인에게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이 어느 자리에 위치하는지에 대한 공감각적 인식이 있다. 자신이 세운 계획과 떠나온 길 사이에서 무엇을, 이 사회와 단체 안에서 어느 지위를 갖는지 잘 알지 못하면 인생을 계획하는 것에 애로사항이 꽃피기 마련이다. 그런데 니콜과 찰리의 직업은 각각 배우와 감독으로서, 연극 안에서 자신이 자리한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배우, 연극 전체에서 배우와 스태프를 어떻게 지정하고 운용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감독이다. (극단은 유사가족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들에게는 좌표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직업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들의 직업은 개인으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지위이고, 여기서 가정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된다. 개인의 삶에서 공과 사가 분리되어야 하는 건 양쪽을 양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판단이지만, 인터넷 시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연결성은 오히려 그 둘을 융합해버렸다. 그러니까,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연결이라는 편리함이 오히려 우리 사이에 적절히 단절되었어야 할 무언가를 이어놓아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감독이라는 찰리가 있고 어머니와 배우라는 니콜이 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서로의 장점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노아 바움백의 재치로 이루어진다. 시퀀스가 진행됨으로써 우리는 이것이 이혼 솔루션의 일부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는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점을 말해봄으로써 자신이 어떤 이유로 그/녀에게 반했는지를 상기해보고, 점진적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은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진다. 찰리가 알던 니콜의 모습과 현실에서의 니콜은 날카로울 정도로 괴리가 있었고, 이러한 괴리는 이 영화의 시선은 기본적으로는 찰리의 그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감독과 배우의 문제로 보면 이 설정을 우리가 슬기롭게 파헤쳐 나갈 수 있을 듯하다. 감독이 바라보는 배우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연기하는 모습이 아니었을지를 찰리는 되묻는다. 같은 맥락으로, 찰리는 자신이 알던 니콜이라는 한 명의 여성이 사실은 연기하는 개인에 불과했던 건 아닐지를 고민한다. 


그런 와중에 아이는 아빠도 엄마도, 감독으로서의 아빠도 배우로서의 엄마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포용하는 다소 아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라는 말이 의젓하다거나, 영화적 연출로 인해 각색된 아역 배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자신에게 주어질 만한 마땅한 좌표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 없다는 쪽으로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이는 아이 다운 것 같으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건 아빠도 마찬가지여서 아빠는 자신이 최대한 잘해준다고 잘해주었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모자란 듯하다며 양육권을 엄마에게 양도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가 이따금 그런 주관에서 객관으로 시선을 바꾸는 순간에는 그들은 그저 한 명의 개인이라는 점만이 밝혀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마치 거대한 사회 안에서 명확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이들의 자아실현이 GPS라는 기술, 모두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라는 기기를 통해 실현되는 좌표 지정의 삶처럼 보인다. 인터넷이 개인에게 주어진 도상, 지표, 상징을 지우고 ‘나’라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GPS라는 기술은 그런 광활함 안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나’를 고정하는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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