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Mar 03. 2020

기생충의 흑백판에 관한 단상


<기생충 : 흑백판>의 작품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1. 


“너는 끝났어.” 과연 누가 그런 선언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책임권자다. 끝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어떠한 책임권한이 있다는 것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그래서 이 선언에 책임소재를 묻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함부로 ‘끝’을 발언했다가 아직 붙어있는 숨통을 발견하면 ‘그’야말로 정말로 끝나버린다. 권한이 있는 만큼 책임도 주어지니 그에겐 끝장을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여기서 의문 하나가 문득 고개를 든다. 끝이 없는 일을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 건가.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네버 엔딩 스토리’의 좋은 사례는 정치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므로 어떤 말도 꺼내기가 조심스럽지만, 인류사의 최대 화두가 정치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으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치에서 기술로 화두를 돌려보고 싶다. 공식적으로 흑백영화의 시대가 끝이 났노라고 선언했던 바는 없었지만, 영화 산업의 변화가 그러한 선언을 대체했던 게 사실이다. 요즘 시대에 흑백영화를 내놓는 건 흥행을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으며, 흑백을 미학적 요소로 사용하는 경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니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흑백에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다. “흑백으로 영화를 찍은 것엔 이유가 있을 거야.”라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


새삼스럽게 정치와 기술과 흑백을 언급한 건 봉준호의 <기생충>이 흑백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면서 몇몇 부분의 색조에 손을 대긴 했지만, 편집이나 연출에 바뀐 게 없으니 흑백판에 대한 비평은 <기생충>에 대한 되풀이에 그칠 테다. 하지만 <기생충>의 흑백판이 아니라 ‘흑백’ 자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먼저 <기생충>의 흑백판에 대해 봉준호가 한 코멘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흑백으로 인해 빛의 대비가 강렬해졌고, 그 과정에서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 ‘선’이 강조되었다.” 여기에 봉준호는 영화에서 주된 메타포로 사용되는 물이 새까만 심연으로 바뀌었다고 언급한다. 이 언급에 따르면 영화 후반부 마을에 폭우가 내릴 때, 계단 아래의 물이 차오른 공간은 깊은 심연이 된다. 물이 차오른 집안은 심연 그 자체가 되며, 그곳에 빠지기라도 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된다. 


심연(Abyss)이 주는 두려움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 연유가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공간도 그런 깊이와 연관이 있다. 누차 말하자면 높이가 아니라 깊이다. 높이란 바닥부터 천장까지를 뜻하는 용어이고, 깊이란 이쪽에서 저쪽을 칭하는 용어이다. 반지하의 기택네와 동네의 높은 곳에 자리한 박사장네를 비교 배치한다는 점에서 높이를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선’을 넘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높이보다 깊이가 더 제격이다. 이쪽에서 저쪽이라는 깊이(Depth)는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거리감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계급적 은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더 앞엣것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이라는 높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너와 나의 깊이(그릇)가 다르다는 생각이 있어서고, 흑백판에서 강조되는 건 그 부분이다. 흑백판에서 강조되는 몇몇 장면들은 암부를 강조함으로써 은폐와 탈은폐라는 기준으로 우리의 시야를 조종한다. ‘어둡다=가려진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칼라인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만, 흑백인 세상에서는 흑과 백의 ‘경계’에 눈길이 간다는 점이다.


2. 


내가 은폐와 탈은폐를 지목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근시와 원시라는 시야의 깊이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근시와 원시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흐릿하게 되는 상태이고, 이는 이쪽과 저쪽 중 중점을 두게 되는 곳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근시와 원시는 초점 조절 능력을 잃어버리는 질병이다. 반면 카메라는 초점 조절 능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딥포커스라는 기교를 부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카메라와 비교해보았을 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언젠가 기술이 더 발달하면 (딥포커스가 그러했듯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한 것들을 나열하면 카메라가 왜곡한 세상에서 진실된 것들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카메라가 왜곡한 세상이라는 말은 카메라가 가장 진실된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바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진실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이기에 그렇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기생충>에서 보았던 것들이 카메라에 의해 높이로만 목격되었다는 점에 의문이 있다. 왜 우리는 <기생충>을 높이의 영화로 보게 되었을까. 계단이 나오고, 반지하가 나오고 그래서일까. 만약 이것이 높이에 관한 은유를 담은 영화였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느 뻔한 영화들처럼 도시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관망하는 쇼트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 쇼트들은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치환하여 마치 짓눌리는 듯한 계급적 압박감을 관객에게 주려 한다.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카메라의 시선이 내리 꽂히는 자리에는 중력이라는 전지구적 힘이 자리함으로써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자리한다. 


어쩌면 ‘If’를 가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이 그런 무기력함을 풍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 박사장 저택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정원에서 집안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거기서 보이는 것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다. 대문 앞에서도 정원으로 올라오려면 계단을 타고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점은, 올라온 계단과 마주한 계단이 늘 수평으로 놓인다는 점이다. 눈앞의 계단에 사람이 오가는 걸 감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들어오는 이가 들어온 사람을 감시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이 부분은 간수가 재소자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도록 설계된 감옥을 떠오르게 한다. 간수는 재소자를 자유로이 감시하지만, 재소자에게는 간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성립하는 시선의 권력은 간수를 은폐하고 재소자를 탈은폐하는 효과가 있다. 판옵티콘의 구조를 떠올려보면 쉬울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이 구조로 되어 있다.) 판옵티콘에서 간수는 감옥 중앙의 어둠에 숨어 목소리만으로 존재하게 된다. 간수는 어둠 안에서 재소자를 호령하고, 재소자는 간수를 어둠에 동일시하게 되므로 간수는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재소자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다시 <기생충>으로 돌아가 보면 이 저택의 구조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의 구조는 ‘들어오는 이’가 들어온 사람을 감시하게 되어있다. 이는 영화에서 박사장네를 감시하다가 박사장네 저택으로 들어오게 되는 기택네를 설명해준다. 또한 박사장네에 잠입해 놀던 기택네에게 문광이 찾아왔을 때, 초인종에 비친 얼굴이 기택네의 파멸을 예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지하실이다. 영화에서 지하실 사람은 박사장이 들어와 살기 전부터 거주해 왔다. 하지만 문광이 언급하듯이 지하실은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덕분에 그는 지하실에 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이 지하실을 ‘들어가는 것’만이 가능한 장소로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박사장이든 기택네든 지하실을 발견하고 들어가는 입장으로서 그곳에 어떤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 들어오는 이가 들어온 사람을 감시하는 구조에서 시선은 곧 권력이고, 지하실은 일방적으로 응시되는 장소로서 재소자들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하실이 감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지하실의 입구가 칠흑 같은 어둠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박사장네 아들은 거실에 올라온 지하실의 불청객을 ‘귀신’이라 불렀다. 어둠에서 빛으로 올라온 걸 두려워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기생충>의 칼라판에서 눈여겨 보이지 않거나 간과되는 부분이었다. 계단이라는 높이의 은유에 가려진 이 어둠이 영화가 말하는 심연을 이해하기에 중요한 요인임에도 그러했다. 


3. 


어둠 속에서 깊이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거리감이 사라지고 남은 세상에는 공포가 찾아온다. 인간은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때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게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이다. 바꾸어 말하면, 너와 나의 거리가 측정되지 않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올려다보기도 벅찬 재능의 차이를 느끼거나, 정도를 알 수 없이 내려다보아야 할 때가 대표적인 그런 때이다. 


지하실의 어둠을 목격할 때 드는 감정이 ‘어디까지 내려다보아야 할까’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기택네가 박사장네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건 눈으로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깊이였지만, 기택네가 지하실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건 눈으로 거리를 파악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고 말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확실히 ‘높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높이의 요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시선의 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태양 빛이 지구로 오는데 수초의 시간이 걸리듯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내는 시선에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공포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카메라와 눈의 관계를 언급해보고 싶다. 인간은 할 수 없지만 카메라만 할 수 있는 딥포커스라는 기술이 갖는 시야의 포괄은, 앞과 뒤를 삭제해버림으로써 거리감을 지울 것만 같지만 오히려 ‘깊이’를 만들어낸다. 어둠 안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보통 깊이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하는 시선의 도착, 원근법과 소실점과 같은 응집이 사라지고 텅 빈 공허만이 남을 때 그곳에는 심연으로의 공포만이 남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빛과 어둠으로 태어난 기술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암실에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으로부터 출발했으며, 그런 점은 감옥의 외딴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떠오르게 한다. 흥미로운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카메라가 감옥이라는 상상, 그렇다면 이때 카메라를 감시하는 어둠 안의 요인은 무엇이며 카메라는 그런 어둠에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카메라가 칼라 안에서 어둠을 바라보는 것과 ‘흑백’인 세상에서 어둠을 바라본다는 건 명백한 차이가 있다. 칼라 안에서 어둠은 ‘꺼진 것’, 세상에서 배제된 일부 소수자이지만 흑백 안에서 어둠은 ‘아닌 것’, 비(非)가 되어 자신을 세상에서 배제해버린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가 암실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고려할 때 흑백 영화의 어둠이 자가배제하는 모습은 카메라 자신에 대한 배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흑백 영화에서 어둠이 만연하는 장면은 카메라가 어둠 속의 간수로 변모한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맥락으로 <기생충>의 흑백판에서 지하실의 어둠을 바라보는 장면은, 카메라가 배우를 올려다보는 것으로서 배우에게는 심연의 낙차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고, 카메라에게는 자신이 삼켜야 할 먹잇감에 압박을 주도록 강요하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칼라판에서의 운동 에너지와는 다르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로 작동한다. 미지의 세계 안에서 개인은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 외부 세계를 파악하기에도 벅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박사장네를 파악하고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진입을 꾀하던 기택네에게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게 있다고 말이다. 


4. 


어쩌면, 단지 흑백으로 바뀌었을 뿐인 영화를 이렇게까지 바꾸어 바라보는 것은 무리이거나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생충>이 계급과 정치의 분류로만 읽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기생충>에서 ‘높이’라는 것으로 낙차라는 요인을 끌어낸다면 그건 기택네와 박사장네 사이에 존재하는 냄새를 혐오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게 된다. 


영화에서 기택이 박사장을 살해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냄새의 은유는 영화 전반에 걸쳐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 냄새가 지하철이나 반지하와 같은 공간에서 주로 난다는 점을 고려할 때(박사장이 그렇게 말한다.), 지하철 이용을 안 하고 반지하에서 안 살면 그런 냄새는 나지 않으리라고 예상해볼 수 있겠지만, 기택네가 당장 반지하를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기택네에게 냄새란 일종의 불가항력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를 구하려 가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으로 처리해버리며 그런 불가항력에 대항할 여지를 삭제해버린다. 이런 가정 자체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가장 도드라진 순응이자,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는 식의 허언에 직언을 하는 것임은 틀림없다만, 영화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감각인 후각을 언급함으로써 영화 밖의 요소를 영화 안으로 끌고 오려는 시도에는 불만이 있다. 영화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비겁하다는 게 아니라, 영화와 현실의 거리가 카메라를 통해 확인되는 이 영화에서 그런 거리를 뛰어넘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서다. 


흐릿한 미래에 기대를 거는 선명한 현재가 바로 기택네의 모습이다. 이는 마치 근경을 바라보는 것, 근시라는 안과 질환을 앓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영화는 냄새를 통해 관객석에서 스크린, 이쪽에서 저쪽으로 포커스가 이동하기를 원한다. 이쪽과 저쪽 모두에 초점이 맞으니 딥포커스라 할 수 있겠고, 그것은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다. 따라서 말을 맞추어 보면 기택네의 근시가 카메라를 통해 교정되기만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했지 카메라가 인간을 교정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디지털 재처리를 통해 바뀐 <기생충>의 흑백판은 영화가 보여주는 카메라의 응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기택네가 죽인 박사장 식구와 박사장네 지하에 갇힌 기택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한 심연, 죽음과 지하실에 머무를 테다. 그런 점이 영화와 현실의 거리감을 지운다. 불이 꺼진 영화는 정말로 어두우니까. 


끝나지 않을 문제가 우리를 무게로 짓누르기보다는 미지의 심연이 되어 우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기를 나는 원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지하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밑바닥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어두워서다. 깜깜한 곳에서 영화를 본다고 해서 우리가 밑바닥이 될 수 없는 이유이자, 그런 어둠 속에서 영화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이자, 영화와 우리의 관계를 조금은 벌려 놓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광활함 안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