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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7. 2020

인플루엔자, 괴물, 기생충

<인플루엔자>(2004)

디지털 시네마 프로젝트 '삼인삼색'의 2004년, <거울에 비친 마음> 중 봉준호의 단편 <인플루엔자> © 전주국제영화제                                 


인플루엔자, 괴물, 기생충. 이하의 제목은 봉준호의 영화를 순서대로 적은 것이다. 후자의 두 개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가장 처음의 영화는 생소한 이름이리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2004년에 전주국제영화제의 삼인삼색 프로젝트로 만든 단편이다. 지금에 와서야 봉준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2004년까지만 해도 봉준호는 2006년의 괴물이 예견되지 않은, “<살인의 추억>”이라는 작은 발걸음으로 존재하는 상태였다. 물론 여기서 내가 <살인의 추억>을 ‘작은’ 성과로 표기하기에는 이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살인의 추억>은 성공한 영화다. 이 성과를 그냥 보고 지나치기에는 ‘봉준호’라는 사람을 온전히 다룰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때의 봉준호가 동시기의 여러 한국 영화감독과 번들로 묶여 있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를 대표하는 세 개의 영화,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박찬욱의 <올드보이>, 그리고 이 마지막 자리에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있다. 이 세 영화는 비루한 환경을 유머로 승화하거나, 억지로 웃어 보이며 유머라고 우기던가, 유머와 공포가 자리를 바꾸는 ‘바디체인지’ 장르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신체강탈자, 그들은 외계로부터 온 광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의 우리이다. 속을 뒤집어 까놓은 고무공 같은 모양새에 방심하던 우리가 영화에 한대 ‘얻어맞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2004년이라는 시기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인제 와서 떠올려본다 한들, 무언가 강렬하게 남을 사건은 없었다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껏해야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 시기에 봉준호는 <인플루엔자>라는 이름으로 단편을 내놓았다. 혹자는 봉준호의 이 영화를 ‘사스(SARS)’의 광풍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서 발견한 필름 ‘조각’이라 평가했다. 불이 꺼지고 남은 자리에 잿더미가 있듯이 사스가 지나가고 남은 곳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한 영화적 ‘포착’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조각’이라는 말과 ‘포착’이라는 말이 한데 어우러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손에 넣어봐야 아무런 촉감도 제공하지 못하는 질료에 불과하다. 영화의 제목처럼, 발견되었을 때 이미 한차례 자리를 휩쓸고 간 역병과도 같다고 우리는 평가했다. 어쩌면 이게 봉준호가 ‘디지털 시네마’를 꾀하는 ‘삼인삼색’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디지털의 가장 큰 특징이 비(非)물질성이라는 점이 그렇다. 손아귀에 넣으면 금세 사라져버린다는 점에서 모래성과 역병은 닮아있다. 그리고 분명 ‘물질’의 형태임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물질적인 ‘촉감’을 제공한다. 아마 봉준호는 그에 착안하여 디지털이라는 점조직을 떠올렸음이 틀림없다. 디지털을 세분화하면 픽셀과 도트라는 점으로 최소화할 수 있고, 그것을 들여다본다는 건 프레파라트 위의 병균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외람된 말이지만 잠시 다른 영화로 외도하겠다.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에는 옥상에서 아래로 순차적인 자살하는 회사원 무리가 등장한다. 이 기괴한 이미지는 이곳이 꿈의 세계이고, 그렇기에 죽는다는 망상이 그리도 행복하게 그려짐을 말해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우리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이미지가 주는 일련의 ‘행복’이다. 왜 행복할까?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낙하를 통한 삶의 단절이라서? 애석하게도 이 영화는 낙하하는 무리가 바닥에 닿는 지점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카메라를 돌려버린다. 이 과정에서 낙하의 쾌감은 있되 추락의 끔찍함-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의 이미지는 생략되어 버린다. 이는 마치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우리가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순정만을 간직하는 것-별똥별이 추락한 자리에 어떤 파급력이 일어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봉준호의 <인플루엔자>는 CCTV의 영상만을 편집해 만든 영화이다. 이 과정에서 CCTV는 목격자가 아니라 카메라라는 느낌이 강조된다. 남자가 사람을 패서 죽여도 카메라는 왼쪽-오른쪽이라는 고개 돌림만을 반복할 뿐이다. 마치 선풍기처럼 카메라는 따분한 동작만을 반복할 뿐인데 이런 모습은 <플란다스의 개>에서 벽에 걸린 선풍기가 카메라로 재발견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인플루엔자>를 통해 <플란다스의 개>를 재해석하는 건 다소 무리인 시도이다. 하지만 우리가 <플란다스의 개>에서 발견한 것들이 선풍기-CCTV를 거쳐 <인플루엔자>로 옮겨온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봉준호는 CCTV를 주체가 아닌 객체에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CCTV가 목격자로서 하나의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봉준호의 이런 선택은 어떤 의도가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선택을 했는지 논하는 건 영화를 보는 것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주장에 대한 아주 간단한 이유를 대자면 다음과 같다. 봉준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믿을 만한 건 오직 가족뿐이다. 그래서 봉준호의 가족들은 서로를 믿으려고 가족이 되려 한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기에 서로를 믿지 않는다. 이 불협화음은 영화 전반을 흘러가며 우리의 신경을 긁어 놓는다. “아니 대체, ‘삑사리’가 왜 나는 거야!”


아마 <인플루엔자>의 의도는 시선이 내리꽂히는 장소, 프레파라트 위에 놓인 병균을 나지막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여러 CCTV 속 사내의 모습은 특유의 ‘디지털적 흐릿함’과 더불어서 이것이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그러니까 마치 ‘애써 확대해봤지만 이게 최선인’ 배율을 제공하는 듯 보이게 한다. 물론 이게 개인의 주관이라는 점을 피해갈 수 없겠지만, 주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게 사회적 참여를 꾀하는 적극적인 손짓이라면,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는 건 점선면의 데이터베이스로 수치화한 무언가라는 점에서 이 발견은 다른 의미로 수색될 수 있다. 1) 선풍기와 같은 카메라는 사내의 범죄행각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 2) 모른 체한다기보다는 고개를 돌리는 게 삶의 루틴일 뿐이고 그런 루틴 중에 일부로 편입되는 게 남자의 모습이다. 3) 말하자면 이 목격담은 그 자체로 목격이라는 행위가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발견해 도덕적인 판단을 꾀했을 때만 비로소 목격이라 할 수 있다. 4) 결과적으로 이 목격담은 ‘발견했다’는 쾌감이 아니라 ‘목격했다’는 불쾌함이 되어버린다. 이런 추론을 따라가다 보면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우에 꼬리가 있다는 사실과 그 잔해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걸 목격한다는 게 얼마나 큰 재앙인지를 알게 된다. 예컨대 이 목격담은 언제나 후일담으로만 남겨진다. 그래서 불쾌하다.


이 대목에서 내가 해보는 생각 중 하나는 봉준호가 2004년에 시도한 디지털 필름의 어떤 경향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디지털 필름에 맞는 시도를 했고, 지금이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의 서막이니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양한 분과에서 이루어지는 점선면의 물신 분해 시도를 한군데 어울려 보는 건 몹시 즐거운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신카이 마코토의 2016년 판타지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운석을 중심으로 몸이 뒤바뀌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농담을 건네자면 ‘디지털’이기에 가능한 배경작화를 들고나온 이 영화가 ‘그렇기에’ 디지털적인 면모를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긋난 시간의 자리를 떨어지는 혜성의 잔존물로부터 목격하게 된다는 점은 우리 시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아주 명확한 지표이다. 1) 만약 이것이 이전 시대의 재난 영화였다면 그런 잔존물로부터 본체를 파훼하는 방식-마치 <아마겟돈>처럼 무(로 돌아가려는 위기)에서 유(의미한 시도)를 창출하려 했을 테다. 2)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그런 무자체를 건드리기 보다는 유와 무라는 구분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분해의 영역으로 들어가 두 개념의 좌표를 바꾸어 버린다. 3) 이때 그렇게 좌표를 바꾸는 행동에서 중요시되는 건 양측 모두 자신의 육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4) 역으로 침투해 과거를 감염시켜나가는 디지털이라는 바이러스는 애초에 그게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리고는 우리의 기억에서 ‘존재했었던’ 현재를 지워버린다. 5) 그런데 짠. 몸이 바뀌었던 두 남녀는 육체 교환으로 얻은 농후한 끌림을 통해 망각했던 서로를 알아본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이런 결론이 디지털 이후의 아날로그를 말하는 방식이다.


다시 <인플루엔자>로 돌아가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겠다. 고작 30분짜리 단편영화 가지고는 많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CCTV의 은밀한 목격담이 관음과 같은 행위로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건 인간의 꿈과 희망이 ‘불행과 절망’이라는 긴 꼬리를 남긴다는 봉준호의 말이었을 테다. 이 모습은 처음에는 지하철 잡상인과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것으로 시작한 사내의 모습이 Atm기 앞에서의 절도와 주차장에서의 퍽치기 범행으로 이어지는 것에서 추상으로 다가온다. 순진하게 보이면서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던 이들이 어떤 이유로 그런 살인마가 되었을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가 남기는 족적은 그런 면에서 타락인 것처럼 보이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CCTV라는 객관적 사물을 시야로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이에 어떤 판단을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뇌리에 남는 것은 CCTV 카메라의 운동방향처럼 기계적으로 이동하는 무브먼트 속에서도 ‘기계식 손목시계’와 같은 우연한 알고리즘, 시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함을 목격한다는 점이다. 


시간? 너무 뻔한 말은 아닌가. 카메라에는 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고, 카메라로 찍는 영화가 시간적 요소를 내포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것은 CCTV 화면으로 제공되는 자료의 구석에 실시간을 나타내는 중의 숫자들이다. 이 시간대에 실시간으로 녹화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이 증표가 영화로 치면 러닝타임의 한 면모를 뜻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며 그 아래에 얇은 로딩바로 러닝타임을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적어도 극장이라면 그렇다.) CCTV 화면은 영화의 잘린 조각처럼 보인다. 실제로 봉준호가 이 영화를 ‘제작(이라기 보다는 주조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다.)’할 때 CCTV의 소유주들에게 협조를 얻어 그 모든 조각들을 분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봉준호가 이 영화를 기획하고 만든 것은 그런 조각을 섣부르게 이어 붙이려는 발상 때문이 아니었을 테다. 아마도 봉준호의 이 조각들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이미 발견된 것의 공백을 메꾸어 보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봉준호의 선풍기로부터 홍상수의 무미건조한 시선을 읽어내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홍상수의 무미건조한 시선은 고개를 돌려버린다는 점에서는 선풍기의 기계적 움직임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물론 홍상수가 스타일적인 변모를 거친 중반기 이후부터는 그렇게 맞는 말도 아니게 되었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고개 돌린 싸늘함은 봉준호의 <인플루엔자>가 제공하는 외면의 논리와 얼추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홍상수는 공간에 남긴 흔적에서 인간의 시간을 거두어 보려고 시도한다는 것이고, 봉준호의 시도는 공간이 인간에게 더는 시간을 말하는 입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직접적인 이미지로 풀이하자면 홍상수에게 인간은 일종의 ‘역병’처럼 보인다. 이 역병은 가만히 보고 있자면 꾸물거리는데 그런 점이 징그러울뿐더러 지나간 자리에 잔존물을 남긴다는 점이 더 끔찍하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인간이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인 것처럼 묘사하며, 같은 이유로 스크린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을 역병으로 몰아세울 것만 같은 (제목부터 그러한) <인플루엔자>는 인간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사내는 어디까지나 우연하게 CCTV에 찍힌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런 조각들을 이어 붙인 감독의 명백한 의도가 개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사내는 CCTV라는 화면이 아니라 감독에 의해 정렬한다. 그리고 이것이 홍상수와 봉준호의 역병에 대한 관점적 차이이다. 홍상수가 세상에서 치워버려야 할 하지만 동선을 추적하기 힘든 욕망의 일종으로 역병을 관찰한다면, 봉준호에게 인간은 세상에 풀려나 살아 숨 쉬는 검체이기 보다 실험실의 프레파라트이기를 자구한다. 병균으로서, 마치 자신을 봐달라며 세상으로부터 목격되기를 원하는, 자기 자신이 일종의 영웅이 되어 영웅담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의 잔존물이 <인플루엔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시점에 우리가 <기생충>을 경유해 <인플루엔자>를 돌아보는 과정 또한 영화적 현미경-만화경이 아니라 한곳으로 시선이 모이는 경통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인플루엔자>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는 영화 역사상의 몇몇 빼어난 시네아스트들에게서 발견되는 몇가지 도드라지는 특징 중에 하나는, 후반기에 발굴된 것들에 의해 초창기의 이야기가 설명되고 합리화되려 한다(고 믿)는 것인데, 이는 시네아스트의 후광이 짙어질수록 앞의 고인 어둠을 몰아내려는 추종자들의 무브먼트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플루엔자> 속 무의미한 고리(Patrol)가 뒤쪽의 시간을 통해 앞쪽의 시간을 덮어버리는 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앞쪽의 이야기를 ‘후일담’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플루엔자>는 <기생충>의 수식어에 불과한 (기생충과 인플루엔자는 질병의 일종이기도 하니 연상작용으로는 비슷하겠지만) 영화가 되어버리는데, 이런 생각은 봉준호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소는 봉준호의 영화의 디지털에 관한 생각이 그의 사회학적 관점과 어떻게 맞물려 나가는지를 추적 관찰하는 광장이다. 사회로 풀려나온 <인플루엔자>가 <괴물>이 되어 한강을 파괴, 큰 주목을 받자 <기생충>이 되어 숨어드는데 그 이후에는 무엇이 될까? <괴물>의 낙하하는 이미지, <기생충>의 그보다 더한 지하로의 낙하, 아마도 그다음은 바디체인지를 통한 재구축이 되리라고 감히 예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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