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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9. 2020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본다

<서스페리아>(1977)


<서스페리아 1977>의 한 장면 © 더쿱
게임 <데드 스페이스>의 한 장면 © EA


<서스페리아>의 1977년 판본을 보았다. 최근에 리메이크 작품이 나왔기에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게 혼동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서스페리아 1977>이라는 제목은 <서스페리아>의 1977년 판본을 재개봉하며 사용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서스페리아>(1977)로 표기하는 게 옳다. 물론 영화를 관람함에 있어 크게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동명의 이름을 지닌 영화가 있다면 두 영화 제목 모두를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서스페리아>(1977)는 <서스페리아>(2018)보다 먼저 나온 영화이니 선례를 따름에 있어서도 <서스페리아 1977>라는 제목은 바르지 못하다. 오히려 <서스페리아 2018>이 더 신빙성 있는 제목일 텐데, <서스페리아 1977>이라는 제목이 <서스페리아>(2018)의 흥행을 위해 일종의 ‘원작’ 느낌으로 소개됨을 고려하면, 이는 슬프다 못해 기막힌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보세요. 내가 ‘진짜’라구요.”


진짜와 가짜 문제를 들먹이는 건 흥미롭지만 뜬금없는 일이다. 두 <서스페리아>를 보고 있자니 짱구 극장판의 로봇 아빠가 떠오르거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간에 <서스페리아>라는 영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어떨까. <서스페리아>의 1977년과 2018년은 너무나도 다르고, 리메이크라는 말만 붙여놓고 사실상 다른 영화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올드보이>의 영화판과 만화판이 딴판인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1977년과 2018년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영화로 취급될 이유는 없다. 한국의 수입, 배급사의 화법에 따르면 <서스페리아>의 2018년 판본을 보고 난 후에 1977년이라는 지도로 넘어가기를 ‘1977년’ 쪽에서 원하고 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1977’이라는 탄생일을 굳이 제목에 넣어야 할 만큼 인지도 면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스페리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2018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1977년은 부속품으로 딸려오는 모양새가 된다. 게임으로 치면 DLC 정도라고나 할까. 2018년이라는 대중성을 확보한 친구에게 1977년은 관심이 있다면 조금 더 찾아보는 정도일 것이니 말이다. 


이 관계를 문단 두 개를 들여 설명하는 이유는 두 영화가 마치 돌아온 판본 형태로 구성되는 듯 보인다는 점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두 개의 영화가 하나의 브랜드로 구축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2018년으로부터 1977년으로 넘어간 나에게 그것은 마치 ‘유령선’을 탐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018년의 현대적인 공간이 1977년의 허름한 고전기풍으로 변모할 때, ‘낡았다’는 느낌보다 ‘Ancient’라는, 오래된 시간에 잠긴 공간과 그곳으로의 탐험적 면모가 부각된다. 마치 피라미드나 진시황릉을 탐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모험은 미지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함께하는 듯 보인다. 더욱이 이러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서스페리아>의 1977년 판본이 어드벤처 게임과 같은 구조로 진행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서스페리아>의 1977년에서 주인공은 어느 저택 안에 입주하게 되는데, 벽이 온통 새빨간 색에 각종 화려함이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그런 와중에 진행되는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과 저택은 한데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게 붕 떠버린 인상이 주는 이질감이 영화 전반에 걸쳐 우리를 자극한다. 어떤 식으로? 우리는 그저 나아가기만 할 뿐이다. 주인공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움직여지기를 원하는 체스판 위의 장기 말처럼 보이며, 지적논리가 아닌 리플레이의 형태로 제공되는 이 영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흥은 그저 관전일 뿐이다. 관음조차 되지 못한다는 소리다. 


관음이 아닌 관전의 논리로 전개되는 영화가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결론은,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서스페리아>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빌려 말하려는 것은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는 ‘게임’의 구조를 흔히 따른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블록버스터의 다양한 분파에 대해 논해볼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블록버스터의 현란한 폭발에 특정한 미학적 의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블록버스터에 대한 미학적 비평의 지점이 그곳에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폭발의 대명사 마이클 베이의 영화에서 폭발 자체가 갖는 함의는 없지만, 폭발에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되는 도화선과 심지가 어떤 순서로 전개되는지는 말해볼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지금 폭발의 리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폭발의 리듬과 영화의 어떤 정물이 반복됨으로써 형성되는 미장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을 터트리기 위해, 표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가. 영화가 제안하는 게임이란 게 그렇다. 


영화와 게임의 관계를 논하는 건 어렵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게임은 영화를 부러워하고 있으며 영화는 게임을 닮아가고 있다. VR 시네마, 혹은 VR 게임 중에 어떤 것이 ‘영상’과 ‘체험’이라는 단어를 피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말할 수 없고, ‘영화적 연출’에 집착하는 코지마 히데오와 ‘게임적 연출’을 시도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비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불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과거로 돌아가 유물을 발굴해내는 게 미래를 위한 발자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미친 짓일까.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서스페리아>의 2018년 판본을 보고 난 후에 우리는 익숙하지만 어딘가 왜곡된 1977년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번에 다가오는 것은 두 작품-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41년의 시차이며, 이 시차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 몸소 체험한다는 점에서 공백없이 메워진다. 단순히 스크린 위에서 전후를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현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직언을 하나 하자면, 나는 영화가 내세우는 관음이 정신의 영역에 해당하고, 체험은 영적인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 영화가 관음에서 체험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중에 영화의 게임화(Gamification)이라는 건 체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게임은 눈앞에 보이는 타자를 자신으로 인식하기를 스스로 원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게임을 바라보는 태도는 관음도 체험도 아닌 관전에 가깝다. 관음하는 자는 객체에게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며, 체험하는 자는 객체의 고통을 주체의 경험으로 일치시켜야 하는데, 관전하는 이에게는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게임하는 이에게 죽음이라는 경험이 단지 수행의 일부에 불과하듯이, 게임에서 죽음이란 관음도 체험도 아닌 관전의 요소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게임이 된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점이 게임의 전문적인 스트리밍화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하며, 화면상으로 송출되는 타 플레이어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점에 있어 <서스페리아>는 게임적 면모를 제공한다. 


나는 이곳에 <서스페리아>를 보며 떠올린 게임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데드 스페이스>는 우주선에 퍼진 네크로모프-좀비와도 같은 시체들이며 사이비 종교의 컬트적 추앙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들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어느 한 우주 공돌이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이다. (네크로모프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오히려 자세히 설명하는 게 더 나쁠 것 같다.) 작품의 무대는 ‘이시무라 호’라는 채굴 우주선인데, 네크로모프로 인해 벌어진 지옥도에서 탈출한 주인공은 어쩐 일인지 2편에서 ‘다시’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1편과 2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경과는 1편의 마지막에 잠들어 2편의 도입부에서 감금당한 채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기억상실로 등장하는 것에 일조하고, 이는 마치 1편에서 2편으로 곧바로 넘어가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며, 그렇게 넘어간 공간에는 1편에서 벌어진 지옥도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풍경과 트라우마가 공존하고 있다. 


이 게임의 장르는 (적어도 1편과 2편은) ‘공포’이며 이러한 점이 <서스페리아>와 일치하는데, 단지 이것만으로 무언가를 논하기에는 재료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데드 스페이스>가 플레이어에게 공포감을 유발하는 방식 자체는 <서스페리아>의 연출과 닮아있다. 먼저, 공포 장르의 영원한 동반자라고도 할 수 있는 점프 스퀘어 방식은 <데드 스페이스> 속 연출에서도, <서스페리아>의 연출에서도 사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스페리아>의 연출 방식이 <데드 스페이스>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특정 영역에 진입할 때 시작되는 배경음악이다. <서스페리아>의 1977년 판본에서 주인공이 특정한 공간에 들어설 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공간의 ‘구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할 때 구슬픈 음악이 스크린 외곽으로부터 들려오고, 이에 우리는 조만간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요컨대 두 작품을 비교할 수 있는 원동력은 주인공/플레이어가 공간으로의 진입을 시도할 때 트리거가 발동된다는 점이다. 


<데드 스페이스>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는 어느 공간의 특정 선을 기준으로 배경음악이 바뀌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선은 가상의 선이기에 정확히 어디를 넘어가야 배경이 바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바뀌는 분위기가 플레이어에게 다음 사건에 대한 예고를 전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게임이 갖는 공간 설계의 장점에 귀인하는 바, 영화가 2D이자 처음부터 완성된 채로 제공되는 평면성을 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매체는 동일선에 놓일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서스페리아>에서 <데드 스페이스>를 떠올리는 우리의 여정이 어디까지나 <서스페리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단언컨대 나는 <데드 스페이스>의 공간이 <서스페리아>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기상으로도 비교될 수 없을 이 두 매체의 모험은 기묘하게도 작품이 갖는 공간의 시간적 흐름을 통해 공명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데드 스페이스>의 1편과 2편 사이에는 이시무라 호라는 공통된 공간이 있다. 여기서 1편의 그것이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공간이라면 2편의 그것은 게임 플레이어에게 추억을 안겨주는 장소이다. 공포에 잠식된 공간이 어찌 추억으로 변모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건 우리가 ‘게임 밖’의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게임 안에 자리하지 않은 우리에게 게임의 모든 이야기는 그저 관전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잠깐, 이것이 관음이거나 체험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데드 스페이스>가 말하는 우주가 그에 대한 시적 표현인 ‘데드 스페이스-죽은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 1편에서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찾아 우주선 안에 오지만 그곳에서 무전기를 통해 대화하던 여자친구는 내면의 환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에 절망해 끝나는 게 1편의 엔딩이라면, 2편의 도입부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환각 형태로 나타나며 ‘자살’을 강요하는 상황을 주인공 자신이 메타적으로 인지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2편의 결론이 그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1편과 2편은 트라우마의 생성과 소멸을 완성하는 짝패라고도 할 수 있겠고, 이러한 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이시무라 호라는 공간의 일치이다. 


<데드 스페이스> 1편의 도입부에서 이제 막 이시무라 호로 진입한 주인공 일행은 난데없이 네크로모프의 습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네크로모프들은 작품 내에서 어떤 컬트 집단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는 죽은 유기체 덩어리이다. (생명활동이 없는 유기체인데 ‘살아’ 움직인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며 이시무라 호를 탐사하다 보면 마치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특정 선을 기준으로 배경음악이 ‘발동’ 되며, 이는 플레이어를 놀라게 하는 점프 스퀘어 장치 또한 마찬가지다. 이때 우리는 주인공에 주어진 목표가 함 내 어딘가에 살아있는 여자친구를 찾아내는 것임을 알고 있고, 그런 목표가 작품 속의 여러 트리거에 결합함으로써 그런 선 자체는 그리움의 어떤 요인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마치 숨겨진 진상을 파헤쳐나가는 탐정처럼 플레이어는 이시무라 호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게임이라는 점이다. 게임은 영화와는 달리 플레이어에게 캐릭터를 조작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만 정작 게임 내 공간 전체를 플레이어가 향유할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 전체를 다 구축하는 것은 비용적으로나 게임상의 목표로나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 게임에서 그렇게 주어진 거짓 자유가 인간의 우주 탐사에 대한 회의와 개인의 자아 탐색에 대한 회의로 이어짐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철학적 함축이 있다는 게 아니라, 게임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그런 연계를 응용한다는 것이다. 배경은 분명 우주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조여드는 심리적 압박은-플레이어가 주인공의 몸을 움직임에도-공간의 트리거가 작동한다는 인상을 통해-폐쇄적인 게임 경험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치 게임의 도입부처럼 시작되는 <서스페리아>의 1977년 판본은 자기들이 설정한 트리거가 영화의 러닝타임에 따라 순차적으로 구축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게임과는 달리 영화에서 이런 연출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게임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제언을 해보려는 것은 아니고, 인물의 심리를 ‘여자친구를 구한다’는 것으로 확실히 설정해둔 <데드 스페이스>가 아니라 ‘그냥 발레를 배우러 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줄 수 있을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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