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는 음악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

<예스터데이>(2019)

by 수차미
다운로드.jpg 영화 <예스터데이>의 작품 포스터 © 유니버설스튜디오


1.


「허구와 재현 불가능한 것: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라는 글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한 부분을 살짝 변형하여, “모든 영화는 음악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고 쓰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성영화가 막 상영되어 보편화될 무렵, 극장에는 피아노 연주자와 같은 음악 연주자들이 늘 상주해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극장, 이를테면 일본과 한국의 무성영화에는 변사의 존재가 이례적으로 따라붙었다는 점을 제하고서라도, 태초의 무성영화가 필름에는 소리가 없었을지언정 그것이 상영될 때는 영화관 안에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영화 안에 직접 삽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을 ‘영화 속 음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영화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를 설정함에 뒤따르는 문제의식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성영화를 논하기 전에 영화란 무엇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란 것은, 불특정다수의 사람이 어두운 장소에 모여 스크린을 바라보는 공간적인 경험이다. 예컨대 영화라는 건, 단지 스크린 안의 가상만이 아니라 그 밖의 분위기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물론 우리는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에 불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하면서 실재가 깃든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경험은 스크린의 허구를 진실로 믿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진실’이 ‘허구’가 되도록 믿게 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진실이 허구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이자, 영화가 우리를 치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일지라도,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진다. 이는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진실의 문인 빨간 약을 거부하고 가상의 문인 파란 약을 삼킨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네오가 파란 약을 삼켰더라면 그는 여전히 가상(시뮬라크르)에 머물렀을 테지만, 적어도 빨간 약보다는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매트릭스>처럼 진실을 목도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사명감 없이도, 우리는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눈과 귀를 속여도 되는’ 곳이라는 점에 안심한다.


말하자면 무성영화에게 있어 영화관 안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란, 가상의 세계로부터 전파하는 무형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에 안대를 씌워줄 때, 아직 못다 한 처치인 귀를 닫는 행위를 공간을 통해 직접적으로 수행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자궁 안의 태아에게 어머니의 심장 고동이 세상 무엇보다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과도 같다. 태아에게 세계란 자궁이며, 그곳을 지배하는 게 어머니의 심장 고동이라는 점에서 태아는 어머니와 일체화된다. 태아는 자신에게 영양분을 주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심장 고동이 그에 대한 간접적인 힌트를 제공함과 동시에 태아를 안정케 한다. 우리에게 영화관에서의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영화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지 모르지만, 음악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걸 깨우친다. 예컨대 음악이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이다. 그것은 치유이기 이전에 우리가 영화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다르게 말하면 태초에 그와 한몸이었다는 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2.


그러니 우리가 음악영화를 볼 때 영화와 우리 삶의 밀착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이 특유의 공감각을 통해 우리를 우리 삶의 어느 때로 데려간다는 점에서 그걸 찾아볼 수 있다. 소리는 물리적으로 감지되지만 질량이 없다는 점에서 자연계의 다른 에너지와 맥락이 살짝 다른데, 이때 소리의 질량을 채워주는 건 우리의 기억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와 길을 걸을 때 들려오던 거리의 낯선 음악이 훗날 기억의 어느 순간을 포함한다는 점을 떠올리곤 한다. 예컨대 음악은 기억의 촉발제가 된다.


그러니 영화와 영화관을 두고서 기억을 재현하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영화관이라는 턴테이블에 올려진 영화라는 레코드가 돌아갈 때, 공간에는 소리가 깃들고 기억이 돌아오며 우리는 태초의 경험으로 돌아간다. 이곳에는 추억을 거슬러 올라 마침내 탄생의 성소로 돌아가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예컨대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추상이 아니라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니 음악영화라는 말에서 음악과 영화는 분리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는 우리에게 정신분석학적인 대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영화에 깃들지 못하고 공간을 떠도는 망령 같은 존재이다. 이게 성립된 건 무성영화에 음악을 흘려 넣던 영화사 초기의 풍경이다. 다르게 말하면 정신분석의 무성영화에 음악은 포함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악은 우리를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로 여기는 영화의 바깥에서 우리를 구원할 존재로 설정된다. 오직 음악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 발언이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치는 낭만으로 변질될지언정 우리는 음악이 육신을 지배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콘서트장이라는 현대의 종교의식이기도 하고, 이어폰이나 헤드폰처럼 대기를 음악으로 치환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삶의 대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산소로 호흡하는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요, 인간이라는 동물 종의 하나인 우리 또한 사망에 이르게 될 테다. 그렇기에 우리는 ‘음악이 없는 삶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선언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로 그렇게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피곤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고 니체는 선언한다. 그러니 니체가 태초의 영화, 무성영화를 보았을 때 하게 될 말이 무엇인지는 이 대목에서 미리 예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따금 영화 같지만, 음악 없는 영화란 잘못된 삶이다”라고 니체는 말할 테다.


우리의 세상에 신이 가득하다고 말하는 게 만신론이라면, 신의 존재란 대기와 같을 텐데. 그래서 이 경우 음악은 우리 세상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대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에 필수적이라는 점이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무성영화에게 스크린 밖의 음악이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화의 완성=삶’에 필요하다는 점이 유사하다. 예컨대 무성영화가 살아감에 있어 음악이란 산소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제안, ‘무성’이라는 게 인간이 고등생물이 되며 얻은 발화 능력의 제거라는 점에서 삶을 슬프게 한다면. 영화 또한 ‘무성’이라는 점에서 슬픈 삶을 사는 것이다.


3.


말하자면, ‘필수적인 게 없다’. 필수적인 게 없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만족’한 존재이기에 그것을 쉬이 견뎌내리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필수적인 것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우리의 모습은 자녀를 떠나보낸 어미의 울음이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야 만 오늘날의 솔로이거나, 세상이 자신을 거부한다고 생각해 좌절에 빠진 ‘쓰러진 이들’의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그것이 보듬지 못하는 세상의 남은 부위를 다른 소리로 채워주는 것이다.


함성을 질러 세계를 소리로 가득 메우자. 이것은 공허한 마음, 정신분석학적 갈망이 충족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라깡-프로이트 계파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대항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린 채로 살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잃어버린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가 콘서트장에 가는 것은 온 세계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거나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 잊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욕망이라는 어머니의 육신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강렬한 염원이다.


<예스터데이>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류의, 소심하지만 대담한 목소리일 것이다. 이 문장이 추측에 가깝게 쓰인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감정이 행복한 동화적 결말로 이어지는 탓이다. 이 영화가 음악 영화인 줄 알고 보러 왔다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점에 실망했다는 관객의 이야기를 옆에서 주워들었다. 분명하게도 그런 실망이 불합리하다고만은 여겨지지 않는 게, 이 영화는 음악을 연주하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지 음악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예컨대 이것은 음악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음악에 대한 혹자의 갈망을 보여주려는 영화이다.


그에 대한 증거는 이것이 비틀즈에 대한 헌사라는 점에 있다. 저작권료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을 것임이 틀림없는 이 영화에서 비틀즈라는 소재는 주인공 사내가 떠올리는 ‘것’ 중 하나로 사용된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가수를 선택했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그 말인즉슨, 비틀즈라는 그룹이 선택된 것에는 그들이 다른 무언가보다 먼저 떠올랐거나, 또는 조금은 더 끌린다는 이유가 전제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소중한 음악이 사라진 상황에서, 지구 상에 그들을 기억할 ‘유일한’ 이로 남은 주인공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비틀즈’라는 ‘음악 혹은 음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그는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노래할 수는 없다면서 느닷없이 영국으로 향한다. 영화는 ‘Hey Jude’를 ‘Hey dude’로 고쳐 쓰면서까지 비틀즈를 노래해야만 했던 사내를 보여주면서, 이름이 어떻게 바뀌고 가사의 순번이 살짝은 틀려도 어찌 되었든 비틀즈라는 그룹이 한때 ‘여기에, 있었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예컨대 그것은 세상이 잃어버린 산소 같은 것 중에서도 비틀즈라는 유독 중요한 원소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그는 ‘여기에’ 있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는 분명 존재했다고 믿어지는 우리 시대의 공룡 같은 존재를 찾아 홀로 헤매는 세계의 유일한 진실자이다.


4.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단순히, 무명에서 탈출해 신처럼 다가온 ‘비틀즈’라는 음악의 신의 점지를 받아 그들을 연기하는 영매를 말하려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우리는 이 사내의 사랑 이야기보다는 그가 서는 무대가 점진적으로 거대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이 사내는 어느 페스티벌의 구석진 자리에서 소규모 공연을 한다. 두 번째로 이 사내는 러시아의 어느 무대에서 에드 시런과 함께 공연을 한다. 세 번째로 이 사내는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한다. 네 번째로 이 사내는 자신의 홈타운에서 성공한 채로 돌아와 공연을 한다. 이것들은 그의 음악적 명성이 커져만 간다는 사실을 ‘공간’의 명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요소이다.


이때 그 공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함성이 우리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곳을 이끄는 리드 보컬인 주인공 사내는 세계의 전부, ‘The One’. 말 그대로의 ‘신’이 된다. 쉽게 말해 그는 비틀즈라는 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잊혀진 신(Forgotten god)’을 세계에 전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불의의 사고로 산소가 사라진 우리 지구에 ‘비틀즈’라는 산소 같은 ‘존재’를 다시 도래하고자 거친 숨을 내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사내의 ‘욕망’도 아니요, 그에 걸맞은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남자의 열망도 아니다. 이것은, ‘음악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영화적 상상이다.


영화라는 것이 본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진실’을 믿게 한다면, 비틀즈라는 음악의 유명인사가 사라져버린 이 현실이 과연 정말로 현실인지에 대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게 사라진 현실은 이미 진짜가 아닐 테고, 진짜가 아니라면 그것은 거짓이어야 마땅한데, 이런 이야기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우리가 묻는 ‘본질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영화라는 건 거짓된 매체인가? 라고 물음을 던졌던 것은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학자-라고 불리던 당시의 비평가들이었다. 그 와중에 영화에서 음악의 존재는 이미지 본연의 아름다움을 ‘해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도 있었고, 하지만 본디 음악이란 영화관이라는 우리 ‘세계’의 일부였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영화를 스크린에 종속된 것으로만 볼지, 아니면 우리의 인식 전반에 걸쳐 주변부를 맴도는 청각적 신호일지를 따져볼 수 있을 테다.


이것은 비틀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반대로 말하면 영화 속 세상에서 주인공 사내를 통해 비틀즈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는 이들은 그것이 ‘눈과 귀를 속이는’ 거짓된 것, 콘서트장이라는 ‘공간적 심상’에서 그 인식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 허나 이때 우리가 ‘음악영화’라고 함은 음악을 들으러 간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콘서트장에 방문하는 행위가 가수를 보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을 들으러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둘 다이겠지만, 그러한 공간에서 우리의 신, ‘무대 위의 바로 그’는 대기 전반에 만연하는 것이 되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온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존재하던 음악을 기억하는 이들의 모습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음악을 노래하는 한 남자의 로맨틱 코미디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된 무성영화에 바치는 케이크의 마지막 체리, 음악이라는 존재에게 바치는 로맨틱하고도 코미디스러운 ‘장르’에 관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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